(7) 전통은 과거 자체가 아니다, 선별과 편집을 통해 ‘남겨진 것’이다

2018.01.31 21:46 입력 2018.01.31 21:50 수정
최범 디자인 평론가

전통이라는 이름의 권력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인 한홍택의 일러스트레이션과 포스터.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진다.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인 한홍택의 일러스트레이션과 포스터.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진다.

전통의 선별 또는 발명

덕수궁 앞에서는 하루 세 차례 수문장 교대식이 열린다. 1996년부터 시작된 이 행사는 현재 가장 인기 있는 관광 아이템의 하나다. 이것이 인기를 끌자 경복궁과 창덕궁, 숭례문에서도 비슷한 행사가 열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복식과 의례 등을 참고했지만, 현재 우리가 보는 수문장 교대식 자체는 조선시대의 것이 아니라 영국의 버킹엄궁 위병 교대식을 모방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말한 ‘전통의 발명(Invention of Tradition)’에 해당된다. 다만 버킹엄궁의 경우는 현재도 국왕이 존재하고 왕궁으로 사용되는 만큼 진짜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국의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시뮬라크르(simulacre)’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문장 교대식이 전통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통이 과거의 사실 꼭 그대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수문장 교대식은 전통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전통은 세상에 없다. 전통이란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된 과거일 뿐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전통은 전통적이지 않다. 오히려 매우 현대적이다. 그런 점에서 고궁 수문장 교대식은 매우 훌륭한 전통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재료(왕궁, 복식, 의례 등)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이지만, 또 관광이라는 현재의 필요에 맞춰 재구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현대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발명된 전통’이며 곧 전통이다.

과거의 요소들 중에서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만이 남아서 전해지는 경우도 많다. 이를 영국의 문화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선별된 전통(selective tradition)’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모든 전통은 ‘선별된 전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의 전체로서의 과거 그 자체는 결코 연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는 언제나 살아남은 일부로서의 과거일 뿐이다. 물론 그 살아남은 일부의 과거는 저절로 그렇게 된 것도 있고, 인위적인 선별 작업에 의해 그렇게 된 것도 있다. 어느 것이든 결과는 ‘선별된 전통’일 뿐이다. 과거 자체는 전통이 아니며, 반드시 현대적 관점에서 재구성된 것만이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전통이란 과거만큼이나 현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전통을 상실하고 전통과 단절되었다고 말한다. 한국의 근대화가 비주체적이고 급속하게 이루어진 만큼 역사적 연속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통을 회복하고 역사를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과연 역사를 잊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주장은 마치 자명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나 전통이라는 것을 어디다 맡겨놓은 보따리처럼 가서 찾아오면 되는 일인 양 생각한다. 과연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역사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다만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역사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말보다는 차라리 “역사를 맹목적으로 믿는 민족은 몸과 마음이 고생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전통에 대한 사고는 역사의 자의성과 다의성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준다.

전통의 변용 또는 편집

모든 전통이 ‘발명된 것’이거나 또는 ‘선별된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전통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나는 전통은 ‘편집된 것’이라고 본다. 전통은 선별되고 발명될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편집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근대사에서 적어도 다섯 차례 정도의 주목할 만한 ‘전통의 편집’ 과정이 있었다고 본다.

한국 근대사에서 전통이 처음으로 문제가 된 것은 당연히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이다. 20세기 초 민족주의자들은 비록 국가는 잃었지만 민족마저 잃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수(國粹)’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국수란 민족문화의 핵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언어·역사·종교였다. 그리하여 애국적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어 연구(주시경, 최현배), 역사 연구(신채호, 박은식), 민족종교 창시(천도교, 대종교 등)라는 활동을 통해 국수를 보전하고자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근대사에서 최초로 전통을 발견한 것이며, 오늘날 국학의 기초를 이루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족주의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전통을 변용시킨 계기는 식민지 경험일 것이다. 식민지 시기에 가장 중요한 주체는 당연히 식민 지배자들이었다. 1920~30년대에는 조선색 또는 조선취미라고 불리는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이 성행했다. 조선총독부가 창설한 조선미술전람회는 그 주요 무대였다. 식민 지배자들의 눈에 비친 조선은 문명의 손이 닿지 않은 소박한 자연이거나 아니면 수동적인 여성의 모습이어야만 했다. 그들은 지배자 또는 관광객의 관점에서 조선의 풍경과 전통을 보았다. 조선예술을 끔찍이 사랑한 야나기 무네요시조차도 이러한 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식민 지배자들의 시선은 한국인들에게 내면화되었다. 이는 관광 이미지화된 전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이른바 ‘한국적 디자인’이라는 불리는 스타일이 모두 여기에 원형을 두고 있는데, 1세대 디자이너인 한홍택의 관광포스터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한국 근대사에서 전통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주체로 20세기 전반에 식민 지배자를 든다면, 20세기 후반에는 권위적 민족주의 정권을 지적해야 한다. 그들은 대대적으로 전통을 ‘선별’하고 ‘발명’하는 데 앞장섰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누구보다도 폄하했지만, 그와는 모순되게 민족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강조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내세운 민족문화와 전통은 영웅적이고 자랑스러운 것들 일색이었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은 박정희에 의해 재발굴된 민족 영웅이었다. 박정희는 문화재보호법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만들었다. 북한의 평양에 대응하여 신라의 고도 경주를 개발한 것도, 동대문운동장에서 민속경연대회를 연 것도 모두 박정희 때의 일이었다. 박정희는 자신과 정권의 이미지 강화를 위해 전통을 이용했다. 오늘날 우리가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대부분 식민지와 권위주의 정권을 거치면서 선별되고 발명된 것들임을 알아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박정희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민주화 운동세력들 또한 자신들의 관점으로 전통을 변용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민중적 민족주의자들로서, 민중문화야말로 민족 전통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1980년대에 꽃을 피우게 될 민중문화 운동의 단초는 바로 저 1970년대 대학생들의 마당극 운동이었다. 권위주의 정권이 엘리트 지배계급 중심의 민족문화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민주화 운동 세력은 피지배 민중문화를 민족문화의 핵심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처럼 1970~80년대에는 민족문화와 전통에 대한 해석이 정치적 관점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것은 엘리트와 민중 사이에서 운동하였다.

20세기 초부터 거듭되어온 전통의 변용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전혀 다른 질적 변화를 맞게 된다. 1990년대 김영삼, 김대중 정권으로 이어지는 문민정부 시기 한국 사회는 급격하게 신자유주의의 영향권으로 밀려들어갔다. 최소한의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대신에 한국 사회는 곧 시장 전체주의(도정일)의 전일적 지배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제 전통은 정치적 의미를 띠는 대신에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일종의 재화로 간주된다. 전통문화는 문화 콘텐츠가 되었고, 문화콘텐츠진흥원이 설립되었으며, 문화 원형 찾기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전남 장성군의 홍길동 캐릭터.

전남 장성군의 홍길동 캐릭터.

이제 홍길동과 춘향은 캐릭터 디자인의 소재를 제공하는 문화 원형일 뿐이다. 20세기 초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출발했던 전통의 근대적 변용이라는 장정은 마침내 20세기 말에 이르러 그 정치적 의미를 완전히 탈각하고 순수 경제적 관심의 대상으로 전화하였다. 전통의 변용은 곧 근대의 변용이었으며, 그와 더불어 한국의 근대와 자본주의 역시 자신을 조형해나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은 역사 속에서 이렇게 ‘편집’된 것이었다. 그것을 편집한 것은 당대의 권력이었다. 그래서 전통은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당대적인 것이었다. 결국 전통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의 소재 못지않게 그 전통이 누구에 의해 편집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편집이라는 권력에 대해서 말이다.

한복 입기: 전통을 둘러싼 어떤 싸움

“성별 이분법 가이드라인을 폐지하라!” 지난해 12월 어느 날 광화문 앞에서 한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문화재청이 남성과 여성 한복을 제대로(?) 입은 사람에 한해 고궁 무료관람을 허용하는 가이드라인이 성별 이분법에 기반을 둔 것이어서 성평등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남녀 복장을 바꿔 입는 ‘크로스드레서(cross dresser)’들로서, ‘한복 크로스드레싱 퍼레이드’라는 것을 벌이기도 했다.

얼마 전 서울시에서 기획했다가 반발에 부딪혀 취소된 관광 광고안. 일제강점기에서 비롯된 기생관광의 이미지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얼마 전 서울시에서 기획했다가 반발에 부딪혀 취소된 관광 광고안. 일제강점기에서 비롯된 기생관광의 이미지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확실히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상황이다. 과연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들은 기존의 전통 해석에 반발하고 급진적으로 재해석하고 변형시키려고 한다. 과연 그들의 주장은 타당한 것인가.

오늘날 고궁은 왕이 사는 왕궁이 아니라 문화재이며, 관광을 목적으로 날마다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일종의 극장이라고 할 수 있다. 수문장 교대의식도 공연의 일부인 것이다. 한복은 그러한 무대에 어울리는 일종의 드레스코드로서, 무료관람은 그러한 공연의 일부로서 참여한 사람에게 주는 인센티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크로스드레서들은 단지 혜택을 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남녀 한복을 바꿔 입은 사람의 입장을 금지시킨 경우도 있다고 하면서 이는 명백히 인권침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것이 고궁이라는 극장 안에서만 벌어지는 문제라면 별 게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고궁의 담장을 넘어서 현재 한국 사회의 전통에 대한 인식에까지 영향을 끼친다면 한복 크로스드레서들의 주장처럼 순응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처럼 전통을 둘러싼 인식과 해석은 언제나 ‘문화전쟁’의 양상을 띤다. 다만 과거에는 그것이 권력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는 데 반해 지금은 다양한 사회 집단들이 전통의 해석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21세기 초 현재, 전통으로서의 한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19세기나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조건과 맥락 속에서 편집되고 있는 것이다.

편집이라고 해서 신문사의 편집장처럼 어느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의 편집 과정 자체가 다양한 힘들이 겨루는 권력 투쟁의 장인 것이다. 전통 편집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또 하나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 전통이라는 것이 바로 ‘편집된 것’이라는 것, 편집의 권력이 작용한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바로 전통의 편집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필자 최범

디자인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디자인 평론가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지냈다.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며 출판·전시·공공 부문 등에서 활동해왔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 국내 유일의 디자인 비평 전문지 ‘디자인 평론’ 편집인이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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