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티’와 ‘키스’, 그리고 40대 여성 서사

2018.02.22 20:56 입력 2018.02.22 21:07 수정

김남주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미스티>의 한 장면.

김남주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미스티>의 한 장면.

최근 드라마계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40대 여배우’들의 맹활약이다. SBS 월화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의 김선아, tvN 수목드라마 <마더>의 이보영, JTBC 금토드라마 <미스티>의 김남주 등이 그 주역이다. 주연작 시청률 1위 기록, 연기대상 수상 경력 등을 기본 스펙으로 지닌 이들은 절정의 연기력과 아우라로 드라마를 이끌어가고 있다. 특히 이들의 활약은 이제까지 드라마에서 소외됐던 40대 여성들의 사회적 고민을 본격적으로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 드라마에서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는 주로 아침드라마나 저녁 일일극 등 소위 ‘아줌마 드라마’로 불리는 통속극 장르 안에 게토화되어 왔다. 프라임타임에 방영되는 주류 드라마의 여성 서사는 20~30대 이야기가 중심이고, 이조차도 남성 서사의 높은 비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 몇몇 40대 톱 여배우들이 유의미한 선례를 남기면서 조금씩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김희애의 2014년 드라마 <밀회>는 성공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리던 여성이 불혹에 이르러 진정한 사랑을 만나 사회적으로 각성하는 이야기를 통해 기존 주부 불륜극의 자아 찾기 서사를 한 단계 확장시켰다. 김희애의 차기작 <끝에서 두 번째 사랑>도 40대 중반에 들어서며 신체적 노화, 조기 경력 마감, 관계의 단절 등 다층적 위기에 직면한 중년 여성의 고민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전도연 주연의 2015년 드라마 <굿 와이프>도 여러모로 혁명적인 이야기다.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전업주부로 살았던 여성이 15년 만에 법정에 복귀한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가부장제 의무에 억눌린 기혼 여성의 심리드라마와 경력단절로 인한 사회적 수난 극복기를 잘 조화시켜 중년 여성 성장서사의 신기원을 마련했다.

현재 방영 중인 40대 여성 중심 서사 역시 스펙트럼을 조금씩 더 넓혀가고 있다. 먼저 눈에 띄는 드라마는 <키스 먼저 할까요?>(이하 <키스>)다. 이 작품은 이혼한 중년 남녀들의 ‘리얼 어른 멜로’를 표방한다. 그런데 로맨스 못지않게 두드러지는 것은 중년 여성 특유의 사회적 갈등이다. 김선아가 연기하는 40대 중반의 스튜어디스 안순진은 20년째 평승무원으로, 언제나 권고사직 위협에 시달리는 것으로 그려진다. “폐경 오고 갱년기 오고 하면 독거노인”이라는 친구 미라(예지원)의 말대로 노화의 불안과 압박도 심하다. 비슷한 연령대의 남주인공 손무한(감우성)이 ‘고독사’와 같은 중년 1인 가구의 ‘보편적’ 고민에 빠져 있는 것만 봐도 남녀의 사회적 격차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돌이켜보면 김선아가 연기한 2005년작 <내 이름은 김삼순>도 서른 살 비혼 여성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그려낸 작품이었다. 10년 뒤 <키스> 속 안순진의 모습은 그보다 훨씬 퇴보한 40대 여성 삶의 질을 보여준다. 지난해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발표한 ‘2017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도 나타나 있듯, 40대 이후 여성의 삶은 20대에 비해 비정규직 비율이 계속 증가한다. 남성들의 삶과의 격차도 급격하게 벌어진다. 지난 17일 온라인 자산관리 서비스 뱅크샐러드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40대 여성들의 1인당 평균 금융자산은 같은 연령대 남성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전남편의 빚이라는 극중 설정이 더해지긴 했으나 경력 조기 마감의 위기에 처한 ‘극빈’ 1인 여성 가구 안순진의 삶은 현실에서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다.

또 한 편의 드라마 <미스티>는 최고의 전문적 경력을 지닌 여성이 불혹에 가까워지자 유리천장과 충돌하는 모습을 날카로운 스릴러로 그려낸다. 주인공인 대한민국 톱앵커 고혜란(김남주)은 ‘5년 연속 올해의 언론인상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영예의 정점에서 급작스러운 세대교체 요구와 맞닥뜨린다. 남성들로 이뤄진 조직 수뇌부는 고혜란보다 젊고 풋풋한 신예 기자 한지원(진기주)을 내세워 시청률 공략에 집중할 것을 지시한다. 나이가 들수록 연륜과 경력을 인정받는 남자 앵커와 달리, 독보적인 기록과 커리어를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얼굴 마담’ 취급을 받는 여성 앵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스티>는 혜란 이전에 “한때는 잘나가는 아나운서였지만 지금은 라디오 시보로” 물러난 선배 이연정(이아현)의 존재를 통해 중년 여성의 제한된 사회적 위치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미스티’와 ‘키스’, 그리고 40대 여성 서사

고혜란을 시련에 빠뜨리는 것은 직장뿐만이 아니다. 사실 그녀의 성공은 사생활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다. 과거 그녀는 꿈에 그리던 앵커 오디션을 앞두고 임신을 알게 된 뒤 아이 대신 일을 선택했다. 이 과거는 두고두고 그녀를 괴롭힌다. 평생의 사랑을 맹세했던 남편과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시부모는 계속해서 아이 낳을 것을 강요한다. 김남주의 전작 역시 일하는 여성과 전통적인 시댁과의 고부갈등을 소재로 한 <넝쿨째 굴러온 당신>인 것을 떠올리면, 기혼 여성의 일과 가정의 양립이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새삼 환기하게 된다.

최근 드라마 속 40대 여성 목소리의 가시화는 유의미한 한편, 씁쓸한 지점도 있다. 나이에 상관없이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남성 중심 드라마와 비교하면, 여성의 이야기는 여전히 한정된 소재 안에 갇 혀있다는 뜻이기도 해서다. 그런 면에서, 요즘 드라마 중 유일하게 ‘여성의 특수성’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채 수사극 히어로의 가능성을 보였던 또 한 명의 40대 톱스타 고현정이 배역에서 중도 하차한 현실은 무심히 넘겨지지 않는다. 여성 서사의 다양성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증후와도 같기 때문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