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보수’···그들은 아직 “바닥은 치지 않았다” 생각한다

2018.04.06 14:16 입력 2018.04.06 16:11 수정
이지선·강병한·허남설 기자

일부 극우에 기대 기득권 지키기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에 이어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구속되면서 와해된 보수진영이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116석의 원내 제2당인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은 20%대에 머무르고 있고 새로운 보수를 내건 바른미래당도 대안 세력으론 미흡하다. 차기 대선에 등판할 이렇다 할 주자도 보이지 않는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정권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치던 야성은 사라졌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위기의 보수’···그들은 아직 “바닥은 치지 않았다” 생각한다

■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잖아”

9년 만에 야당이 된 보수정당에서는 야당다움을 찾아볼 수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지나는 10년 야당 시절에는 기존 정치인이 아닌 새로운 인물들 중심으로 뉴라이트운동을 벌이는 등 나름대로 변화하려는 노력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탄력성마저 도태된 지 오래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이명박·손학규 등 유력 대선주자가 둥지를 틀었던 인큐베이터 기능도 상실됐고 ‘소장파’라고 불리며 당내 쓴소리를 내던 인물들도 자취를 감췄다.

모두들 ‘보수의 위기’라고 하면서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다. 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 보수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이 말하는 보수의 현실은 이렇다.

우선 지금에 만족하며 손해볼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다는 점이다. 한 중진 의원은 “입만 갖고 ‘과거와 절연했다’고 할 뿐이지 꽃가마는 그대로 타고 가고 싶어 한다”고 했다.

비슷한 문제의식은 초·재선 의원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한국당의 한 초선 의원은 “현재 보수진영은 ‘탄핵 거치면서 이 정도 회복한 게 어디냐’ ‘이만하면 됐다’고 만족한다”며 “그러니 홍준표 대표를 향해 ‘사당화’라고 비판하면서도 굳이 나설 필요를 못 느끼는 거다”라고 비판했다. 한 재선 의원은 “한국당은 ‘일반 월급 생활자보다는 조금 더 벌고 1년에 한두번 여행다닐 수 있을 정도의 부자’를 유지하려는 것 같다. ‘이 정도면 됐지 뭘 더 하나’라는 생각으로 확장할 의지도 없고, 회복성도 없어 보인다”고 잘라 말했다.

‘위기’라 말하지만 아무것도 안 해“탄핵 거치며 이 정도 회복 어디냐”
보수의 수직적 당 운영과도 직결 변화·혁신 주장하면 눈 밖에 나

이는 현재 보수진영의 수직적 당 운영 방식과 직결돼 있다. 당 대표를 정점으로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강조하고,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문화가 당 전반을 지배하다 보니 변화와 혁신을 주장하면 정을 맞는다는 것이다. 과거 공천 과정에서도 정권 운영에 협조적인지 여부를 우선 기준으로 본 것 아니냐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홍 대표의 당 운영방식도 사당화, 사천 논란을 빚는 등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MB 정권의 한 인사는 “초·재선의 특권이 뭐냐. 떠들고 들이받고 그런 건데 그걸 아무도 안 하고 있다. 목소리를 안 낼 만한 사람들을 공천한 것”이라며 “지금은 당이 위기라는 이유로, 자칫 나섰다가 홍 대표가 또 공천권 잡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으로 스스로 나서지 않는 것”이라고 걱정했다. ‘혹시 모르는데 굳이 밉보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다른 의원은 “한국당 내에서 공천과정이나 의사결정 과정을 보면 지도부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사람들로 쫙 깔아서 황제식으로 운영하지 않느냐”며 “과거 소장파라는 의원들이 나서서 바로 그 조직문화를 확 뜯어고치자고 했던 것인데 지금까지 안되는 거다. 당 대표와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이 왜 해당 행위냐”라고 반문했다.

■ “나의 위기는 아니잖아!”

보수의 위기가 구성원이 아닌 ‘대표’의 위기로 받아들여진다는 점도 문제다. 특히 홍준표 대표가 강한 야당을 표방하며 드라이브를 걸면서 ‘한국당=홍준표’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상 보수진영 위기는 홍 대표의 캐릭터로 악화됐을지는 몰라도 잉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때문에 ‘당내 민주주의 파산’이라는 위기의 본질이 가려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한국당의 문제는 위기가 보수의 위기로 치환되지 않고 홍준표 대표의 위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위기관리를 하려면 위기가 세력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홍 대표 개인과는 분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역시너지 효과를 내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보수 아닌 ‘대표’의 위기로 인식 ‘당내 민주주의의 파산’ 본질 흐려
변화보다 지지층 결집에만 신경

구성원들에게 위기가 위기로 인지되지 않다보니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도 변화를 통해 외연을 넓히기보다는 오로지 지지층을 결집하는 것만 최대 목표가 됐다. 홍준표 대표는 지난 2일 “선거는 상대편 지지자 빼오기가 아니라 자기편 지지자들 결집이 본질”이라며 “선거에는 중도가 없다. 스윙보터들은 어느 한쪽의 세가 커지면 자기들 이해관계를 계산해 따라가는 계층”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지지율이 낮은 상황이라면 맞는 전략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보수진영 재건이라는 장기적 안목으로 보면 해답이 아니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여러 여론조사를 통해 10%대 혹은 20%대 초반까지의 충성도 높은 지지층에 갇혀서는 유의미한 정치 세력으로 행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중진 의원은 “지금 남은 지지층이 가장 오른편에 있는 일부 아닌가. 국민의 절대 다수가 그런 보수는 원치 않는다는 것이 증명됐는데 이렇게 계속 가면 국민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닐까 한다”고 우려했다.

보수의 가치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늘고 있는 현실도 과제로 지적된다. 한국당 관계자는 “이제껏 보수정치의 기반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반공주의와 경제성장을 이뤄낸 성장주의였는데 이제 이 같은 개념으론 시대의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고 보기 어려워졌다”며 “촛불집회와 탄핵국면이 시대적 변화를 확인해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 처절한 반성·해체…전면 재구성 필요

보수진영 내부에서 이런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음에도 왜 변하지 않는 것일까. 바른미래당 관계자는 “아직 우리는 바닥을 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6·13 지방선거 결과가 또 한번의 보수진영 참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게 진짜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이르러야만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아직 남은 기득권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자성이기도 하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지지도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정치에 기반한 소선거구제가 지속되는 한 기득권을 장악한 지도부는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몸속의 암은 계속 자라고 있는데 진통제를 맞아 회복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꼴”(장성철 공감과 논쟁 정책센터 소장)이라는 지적도 있다.

반공·성장주의, 한계 부딪쳤는데 개발 독재·종북 프레임 못 벗어나
“성찰해서 외연 확대하지 못 하면 ‘TK 자민련’ 될 가능성 농후해”
20% 넘는 ‘무당층’ 유권자 잡아야

그렇다면 변화의 첫 단계는 뭘까. 모두들 ‘처절한 반성’이라고 입을 모은다. “일련의 상황은 전직 대통령만의 책임은 아니고 여당도 국정운영의 중요한 축이었다. 총체적 통치 실패에 대해 역사와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침묵하거나 회피하고 있다”(윤 교수)는 것이다.

한국당 관계자는 “국민들은 아직도 보수가 덜 반성하고, 덜 변했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인 자기성찰 없이는 변화가 생길 수 없다”며 “세월호 사고, 국정농단과 탄핵 등에 책임을 진 사람이 누가 있나. 자기 신념에 꽂혀서 국민들의 정서를 무시하다 보면 책임정치는 실종된다”고 짚었다.

다음 단계는 보수의 가치와 철학, 인물, 당 구조와 시스템의 환골탈태가 꼽힌다. 윤 교수는 “해체에 준하는 전면적 재구성이 필요하다”며 “사죄와 재구성 없이는 지금은 그냥 조소의 대상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특히 ‘인적 청산’ 요구가 많다. 장성철 소장은 “지난 시절 계파를 배경으로 당을 좌지우지했던 정치인들은 2선으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 인적 청산이 최우선”이라며 “보수의 얼굴을 새롭게 해야 한다. 막말하고, 예의 없고, 잘난 척하는 ‘꼰대형’ 지도자들에게 국민은 마음을 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 의원은 “풀빵 기계를 백날 돌려봤자 케이크는 안 나온다. 보수의 낡은 시스템을 바꾸려면 풀빵 기계를 갖다 버리거나 뜯어고치기 전엔 불가능하다”고 했다. 보수의 가치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보수진영 한 인사는 “박정희 개발 독재 프레임, 종북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며 “지금은 그런 철학이 득표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붙잡고 있을지 모르나, 일부 극우 세력에 미련을 못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는 “지난 10년 동안 중도·보수 성향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이젠 한국당에 투표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며 “성찰해서 외연을 확대하지 못하면 ‘TK(대구·경북) 자민련’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하다”고 전망했다.

이는 유연한 입장으로 지지층을 확장해야 한다는 과제와도 연동된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한국당과 바른미래당도 지지하지 않는 ‘무당층’이 20%대 중반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올드보수’로 대표되는 한국당을 지지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바른미래당을 새로운 보수로 인정하지 못하는 보수적 유권자들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는 진단이 가능한 대목이다.

바른미래당 핵심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가 잘못 방향을 잡고 있는 굵직한 정책들에 대해 차곡차곡 구체적인 수준까지 대안을 마련해놓아야 한다”며 “새로운 보수의 어젠다가 될 수 있는 일자리, 4차 산업혁명 등 경제 문제와 교육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그럴 경우 30~40대, 중도·보수로의 지지층 확장도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보수의 재구성 없이는 현재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유지될 것이라는 점도 잊지 않아야 할 일이다. 윤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한국당이 지리멸렬한 상황은 좋은 모습이 아니다”라고 했다. 박 교수는 “현재 우측에 위치한 유권자를 흡입할 세력이 비어있는 것은 사실인데,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이들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국가와 시민사회, 경제 운용을 폭넓게 내다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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