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자본의 애도

2018.04.18 21:12 입력 2018.04.18 21:21 수정

[직설]참담한, 자본의 애도

지난 3월28일, 경기도 남양주 이마트 도농(다산)점에서 무빙워크를 수리하던 직원이 기계에 몸이 끼여 사망했다. ‘스물한 살, 협력/하청업체 직원’, 이 프로필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2011년에는 이마트 탄현점에서 냉동기 점검 및 보수 작업을 하던 22세 협력업체 직원이, 2016년에는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19세 협력업체 직원이 세상을 떠났다.

젊은 사람의 죽음은 더욱 슬프고 안타깝게 다가온다. 어느 누구의 죽음이 그렇지 않겠느냐만, 아직 제대로 피어보지 못한 꽃의 떨어짐은 모두의 마음을 얼어붙게 한다.

그런데 사고 다음날 이마트 도농점의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안내문이 붙었다.

‘무빙워크 이용 안내, 현재 무빙워크 이용이 불가합니다. 지상 1층으로 이동하시는 고객께서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빙워크를 이용할 수 없다면 1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안내해 두어야 한다. 당연히 붙여야 할 안내문이다. 그런데 이마트 측은 거기에 작은 글씨로 한 문장을 덧붙여 두었다.

‘쇼핑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마트라는 쇼핑몰, 그들에게 한 청년의 죽음은 ‘쇼핑하는 데 준 불편함’으로 규정되었다. 나는 누군가가 직접 찍어 페이스북에 올린 안내문 사진을 보면서 몹시 참담했다. 동시에 모욕적이기도 했다. 이마트를 찾는 사람들이 모든 감정을 잘라내고 쇼핑에만 몰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디에서든 감정을 가진 하나의 자아로서 존재한다. ‘쇼핑에 불편을 드렸다’고 사죄하는 것보다, 그 자리에 국화라도 몇 송이 놓아두었다면, 마트를 찾은 사람들은 그를 애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한 문장을 덧붙이지 않았다고 해서 항의할 사람은, 내가 짐작하기로는 많지 않다. 만약 그러한 이들이 있다면 거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면 된다. 고객을 위해 그러한 문구를 적었다는 것은 염치가 없는 핑계다.

자본이 사람을 애도하는 방식이 대개 이와 같다. 무언가 세련되어 보이지만 보는 이들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문구를 하나 걸어두고 책임에서 이탈한다. 그것은 희생자가 아닌 자신을 위한 비열한 방식의 애도이고, 비판을 피해가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일 뿐이다.

며칠 전, 세월호 참사 4주기가 지났다. 나는 그날, 그 바다에, ‘관광에/낚시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는 것을 잠시 상상했고, 그러다가 곧 그만두었다. 물론 관광지와 쇼핑몰을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렵다. 특히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일은 가족의 저녁 밥상을 위해서 어떤 재난이 있더라도 계속되어야 한다. 다만, 안내판을 읽을 그들을/우리를, 계속 삶을 살아가야 할 우리를 애도할 감정마저 없는 존재로 격하시키면 안된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 감정에서 멀어지거나 무디어져서도 안되겠다. 누군가의 죽음을 두고 당신에게 불편을 드려 죄송함을 운운하는 안내판이 보이면 그 즉시 항의해야 한다. 마트든 어디든, ‘고객센터’라는 공간은 그럴 때 찾으라고 있는 것이다.

2018년 4월16일에도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도했다.

그것은 SNS의 프로필 사진에 노란색 리본을 더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잠시 희생자를 떠올리며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이달에 문을 닫는 안산의 합동분향소를 찾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나에게도 내 나름의 애도 방식이 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서명을 할 때, 리본 모양을 그리는 것이다. 4년 동안 그것을 나의 서명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는 동안 단 한 번 어느 점원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서명인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저, 그게… 추모의 의미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나에게 영수증을 건네며 “저도 앞으로 이 서명을 사용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정말로 리본 모양의 서명을 사용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물건을 살 때마다 리본을 그린다. 그 외에 내가 하는 것은 별로 없다. 다만 그렇게라도 일상에서 이 세월을 애도할 여유를 남겨두고 싶다.

사실 큰 재난을 애도하기는 쉽다. 우리가 아는 자본도 이때는 애도의 물결에 동참하거나 그것을 선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잔잔한 일상에도 재난은 찾아온다. 크고 작은 세월호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애도해야 할 대상은 자본에 종속되어 천박해진 이 세계 자체이고, 어쩌면 애도에서 점점 무디어져 가는 우리들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스물한 살 이명수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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