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정약용의 가족애 ‘하피첩’

2018.04.27 17:20 입력 2018.04.27 19:47 수정

아내 치마 엮은 서첩에 재산 대신 남긴 두 글자

아마 1810년쯤으로 추정된다.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부인 홍혜완(1761~1838)으로부터 다섯 폭의 치마를 전해받는다. 결혼식 때 입은 예복이었다. 곱던 붉은색이 노을빛으로 옅어진 낡은 치마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치마를 보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10년째 귀양 중인 남편이 안쓰럽고, 그리웠을 수 있다. 아버지의 빈자리로 허전한 삼남매가 안타까웠을 수도 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생활을 하던 중 아내가 보내온 낡은 치마로 서첩을 만들었다. 아들들에게 주는 교훈을 적은 ‘하피첩’이다. 사진은 ‘하피첩’(2첩)에서 다산이 아들들에게 ‘勤’(근·근면)과 ‘儉’(검·검소)를 강조하는 부분이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생활을 하던 중 아내가 보내온 낡은 치마로 서첩을 만들었다. 아들들에게 주는 교훈을 적은 ‘하피첩’이다. 사진은 ‘하피첩’(2첩)에서 다산이 아들들에게 ‘勤’(근·근면)과 ‘儉’(검·검소)를 강조하는 부분이다.

다산은 치마폭들을 70여장으로 자르고 다듬었다. B5보다 조금 작은 크기다. 재단한 치마폭마다에는 종이를 붙여 빳빳하게 만들었다. 글을 쓸 만했다. 그러곤 먹을 듬뿍 묻힌 붓으로 한 자 한 자 써나갔다. 고향인 마현(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두 아들 학연, 학유에게 주는 당부의 말이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선비의 학문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 집을 비운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전하는 말은 간곡하다. 안타까움과 미안함도 담겼다. 아이들 엄마를 향한 애잔함도 짙게 묻어난다. 애비로서, 남편으로서 애끓는 정이 행간에 눅진하게 배어 있다.

다산은 그렇게 글을 엮어 4개의 반듯한 서첩, ‘霞帖’(하피첩)을 만들었다. 아내, 자식들 엄마의 해진 노을빛 치마로 만든 ‘정약용 필적 하피첩’(보물 1683-2호·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은 한 아버지의 가족애를 떠올리게 하는 문화재다. 첫째 첩을 완성한 게 1810년 7월, 다산초당 동쪽의 동암(東菴)에서다.

■ 재산 대신 두 글자를 물려주니…

다산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하피첩은 모두 네 첩이지만, 현재 세 첩만 발견됐다. 1첩은 1810년 7월에, 2첩과 3첩은 그해 9월에 역시 동암에서 썼다. 각 첩의 크기는 24.8×15.6㎝, 24.9×15.6㎝, 24.2×14.4㎝. 1첩과 2첩은 표지가 미색, 3첩은 박쥐·구름 무늬가 있는 푸른색 종이다. 각 첩은 하피첩을 만든 경위를 적은 서문으로 시작된다. 글을 쓴 면은 30쪽 내외다. 1첩은 모두 치마폭인 비단이지만, 2첩과 3첩은 종이가 섞였다. 일부 비단면에는 지금도 바느질한 흔적이 남아 있다.

정약용 영정

정약용 영정

하피첩을 통해 다산은 자식들이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자녀교육이다. 1첩은 ‘孝弟爲行仁之本’(효제위행인지본) 구절로 시작된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인(仁)을 실천하는 근본이란 의미다. 효도를 뜻하는 ‘孝’자와 우애를 뜻하는 ‘弟’자 옆에는 붉은색 동그라미까지 표시했다. 효, 제를 바탕으로 집안의 화목을 강조한다. 화목한 집안을 위해선 “돌을 던지면 옥구슬로 답하고, 칼을 들면 단술로 대접하라”고까지 말한다.

다산은 아들들에게 무엇보다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을 당부한다. “벼슬이 없으니 재산을 물려주지 못한다”며 “대신 두 글자의 신령한 부적을 남긴다”고 적었다(2첩). 재산 대신 자식에게 물려주는 두 글자는 ‘一字曰勤, 一字曰儉’(일자왈근 일자왈검). 근면과 검소를 뜻하는 ‘勤’ ‘儉’자 옆에는 역시 붉은색 동그라미가 진하다.

10년째 유배생활하던 다산에게 부인이 보낸 다섯 폭 낡은 치마
자르고 다듬어 4개의 서첩으로 아들들에 효도·우애 가르치고
폐족 신세 실망 말라 타이르기도 아버지로, 남편으로
애끓는 정행간마다 눅진하게 배어있어

“근면과 검소는 좋은 논밭보다 나으니 한평생을 쓰고도 남는다”는 다산은 근면, 검소를 알뜰하게 설명한다. 근면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아침에 할 일을 오후로 미루지 않는 것” “집안에 놀고먹는 식구가 한 명도 없고 한순간도 무료한 시간이 없는 것”이다. 검소는 옷과 음식을 예로 든다. “의복은 그저 몸을 가리면 되는 것인데, 고운 베로 만든 옷은 해지면 처량한 티가 나지만 거친 베로 만든 옷은 해져도 별 상관이 없다.” 음식은 “생명을 연장하는 것으로, 산해진미라도 입안에 들어가면 더러운 것이 되므로 정성과 지혜를 다해 화장실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군자가 가정을 다스리고 자신을 단속하는 방법으로 근면과 검소 두 가지를 버리고는 시작할 곳이 없다”며 “모름지기 명심하라”고 했다.

그러고도 부족했을까. 2첩 마지막 장에 다시 한번 강조라도 하듯 큼지막하게 경구를 남긴다. ‘勤以生자 儉以救貧’(근이생자 검이구빈·부지런함으로써 재물을 생산하고 검소함으로써 가난을 구제한다).

‘하피첩’ 중 다산이 삶의 자세로 강조한 ‘敬直義方’(경직의방)

‘하피첩’ 중 다산이 삶의 자세로 강조한 ‘敬直義方’(경직의방)

■ 석과는 먹히지 않는다

재물을 나누고 베푸는 삶의 자세도 기대한다. “재물은 잡으려 할수록 더 미끄럽게 빠져나가니 메기와 같다.” 다산은 “재물을 자신을 위해 쓰는 사람은 형체로 쓰는 것이고, 남에게 베푸는 사람은 정신으로 쓰는 것”이라며 “형체로 누리는 것은 해지거나 허물어지지만 정신으로 누리는 것은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고 조언한다(3첩).

15세에 홍혜완과 결혼해 22세에 생원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한 다산은 정조 등 주위로부터 주목받는 인재였다. 하지만 천주교 박해, 당파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다산이 1801년 포항의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된 결정적 계기는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중국에 있던 주교에게 박해를 막아달라는 청원서를 보내려다 발각된 것이다. 결국 처형된 황사영은 다산의 맏형인 정약현의 사위다.

유배로 딸의 혼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다산이 딸에게 보낸 족자인 ‘매화병제도’

유배로 딸의 혼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다산이 딸에게 보낸 족자인 ‘매화병제도’

다산 집안은 그의 표현처럼 폐족의 신세가 됐다. 하지만 아들들에게 몰락한 집안의 자손이지만 꿈을 잃지 말라고, 실망하지 말라고 타이른다. 더욱 자아를 확립하고 신중한 말과 행동, 철저한 공부를 할 것을 권한다. “하늘의 이치는 순환하니 한 번 넘어졌다고 일어나지 않을 것은 없다” “진실로 바라건대 너희들은 좋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다름없이 항상 마음과 기상을 화평(和平)하게 가져라” “그럼에도 선을 행하는 것이 복을 받는 길이므로 군자는 힘써 선을 행할 뿐이다”. 특히 “예로부터 화를 당한 집안의 자손은 깊은 산속에 지내다 보니 노루나 토끼처럼 되기 싶다”고도 경고한다.

이어 “쓰러진 나무에 싹이 나고/ 마지막 남은 석과는 먹히지 않으니…”라며 용기를 북돋운다. 석과(碩果)는 주역에 나오는 말로 나무에 마지막으로 남은 과실이다. 씨로 쓸 만한 과실, 즉 세상을 구할 만한 인재를 상징한다. 아버지 다산의 아들에 대한 기대다. 자식들이 어엿하고 당당한 사대부이기를 바랐다. 그래서인지 2첩을 시작하며 그 지표라도 제시하듯 ‘敬直 義方’(경직 의방)을 크게 썼다. 공경함으로 마음을 바로잡고 정의로 일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하피첩에는 쇠락한 집안을 보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종의 처세법도 담겨 있다.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도성에서 수십리만 떨어져도 야만적인 지역인데 먼 지방은 더하다”며 “서울에 살 곳을 정해 세련된 문화적 안목을 떨어뜨리지 말라”고 한다. 서울에 있으면 더 좋고, 서울을 멀리 떠나지 말라는 충고다. “내가 유배를 당한 처지여서 (너희들을) 농촌에 물러나 살게 하지만 훗날 계획은 꼭 도성 십리 안에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도 덧붙인다. 남한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안동 김씨, 전주 이씨, 남양 홍씨 등의 예를 들며 “우리 집 마현도 그러하니 터전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어린 손자에게도 강조한다. 당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양평 양수리(두물머리) 건너편의 마현은 사람과 정보와 물자가 모여드는 요충지였다.

‘하피첩’이 쓰인 동암에서 바라본 지금의 다산초당.

‘하피첩’이 쓰인 동암에서 바라본 지금의 다산초당.

■ 꽃이 피었으니 튼실한 열매 맺으리…

두 아들에게 하피첩을 만들어 보낸 아버지 다산. 당시 남존여비 풍조 속에서도 딸 생각이 났다. 하피첩을 만든 3년 후인 1813년 7월, 딸에게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 족자를 보낸다. 꽃을 피우기 시작한 매화가지 위에 두 마리의 새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다정스럽게 앉아 있는 ‘梅花倂題圖’(매화병제도·고려대박물관 소장)다. 하피첩을 “만들고 남은 아내의 해진 치마로” 이번엔 결혼한 딸을 위해 화폭을 만든 것이다. 집을 떠나올 때 여덟 살이던 딸이 어느새 스무 살을 넘겨 결혼했다. 다산에겐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 이들 부부는 원래 6남3녀를 두었지만 천연두 등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2남1녀만 남았다.

귀양살이를 하느라 딸의 혼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아버지. 그 마음을 시로 지어 그림 아래 꾹꾹 적었다. ‘翩翩飛鳥 息我庭梅/ 有烈其芳 惠然其來/ 爰止爰棲 樂爾家室/ 華之旣榮 有賁其實’(편편비조 식아정매 유열기방 혜연기래 원지원서 낙이가실 화지기영 유분기실). ‘훨훨 새 한 마리 날아와 뜰 매화나무에 쉬네/ 그윽한 매화향기에 끌려 반갑게 찾아왔네/ 여기 머물고 둥지 틀어 집안을 즐겁게 해주렴/ 꽃이 활짝 피었으니 튼실한 열매 맺겠네’란 뜻이다. 그림 속의 새들처럼 행복한 가정을 이루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다산은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의 저서로 유명하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이자 정치가, 학자다. 학술적으로 ‘하피첩’은 19세기 한 사대부 가문의 삶과 그들의 가치관 등을 그려보는 귀한 자료다. 다산의 서체나 당시 서첩 연구에도 좋은 자료다.

다산의 역작들만큼이나 ‘하피첩’ ‘매화병제도’는 기껍다.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따뜻한 가족애, 부부의 사랑이 느껴져서다. 시간과 공간이, 세태가 아무리 변하더라도 사람 사는 곳이라면 영원히 간직해야 할 가치들이 있다. 가정의 달인 5월, 200여년 전의 ‘하피첩’이 새삼 가까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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