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 영면하다

2018.07.23 13:14 입력 2018.07.24 10:43 수정

2009년 4월 본사 인터뷰 당시 최인훈 작가.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9년 4월 본사 인터뷰 당시 최인훈 작가.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문학의 한 획을 그은 소설 <광장>의 최인훈 작가가 23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4세. 4개월 전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경기도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이날 오전 10시46분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했다.

1934년(공식 출생기록은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최인훈은 원산고등학교 재학 중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 목포고를 거쳐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대학 4학년 재학 중이던 1956년 “한국사회의 현실이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학업을 중도 포기했다. 1959년 군에 입대한 이듬해 ‘자유문학’지에 ‘GREY 구락부 전말기’, ‘라울전’ 등의 작품으로 문단에 나왔다.

그는 1960년 ‘새벽’지에 발표한 <광장>으로 작가로서 두각을 드러낸다.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될 당시 76명의 포로들이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으로 추방되는 것을 목격한 것이 <광장>의 집필로 이어졌다고 한다. <광장>은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체제를 모두 비판함으로써 분단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전후 새로운 시대정신의 출현을 알렸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광장> 발표 당시 ‘새벽’지에 실린 ‘작가의 말’의 한 구절이다. 여전히 명문으로 회자된다. 최인훈은 4·19 혁명의 정신을 작가 정신의 바탕에 뒀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4·19를 계기로 이제 한국문학은 ‘전시체제’를 벗어나 새로운 비약을 시작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작가는 최인훈이었다”고 평한다.

최인훈은 이후 <회색인>, <서유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태풍> 등의 장편과 ‘가면고’, ‘구운몽’, ‘열하일기’ 등의 중편, ‘우상의 집’, ‘국도의 끝’과 같은 단편을 잇따라 발표한다. 1960~70년대 최인훈의 작품은 질적·양적 측면에서 돋보적인 지위를 얻어내며 “전후 최대의 작가”(김현·김윤식, <한국문학사>(1973))라는 평가를 얻었다. 특히 발표작마다 정치·사회적 문제를 다뤄 “시대적 징후를 표현한 작가”(염무웅)로 표상됐다.

최인훈 작품의 특징은 주로 전쟁을 화두로 삼았다는 것, 그리고 관념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전쟁’의 화두를 놓지 못한 이유에 대해 “평생 머릿속에서 전쟁과 피난을 계속해온 것”이라며 “결국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피난다니는 것이 아닌가”라고 답했다. 그는 작품에 시대와 결속한 작가적 사유의 결과물을 꾸준히 반영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광장>의 개작이다. <광장>은 1960년 발표 이후 신구문화사·민음사 등 출판사에서 나오다가 대폭적인 수정작업 후 1976년 문학과지성사가 펴낸 <최인훈전집> 제1권으로 결정판이 나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10여차례 수정됐다. 최인훈은 지속적으로 개정판을 내놓는 의미에 대해서 “정신력이 살아있는 동안에 한 글자라도 좋은 모습으로 후대의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2015년 <광장> 출간 55주년에도 또 한 차례 개정판이 나왔다. <광장>은 현재까지 통쇄 205쇄를 찍었다.

2008년 11월 등단 50주년 기념 전집 출간 간담회 당시 최인훈 작가.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8년 11월 등단 50주년 기념 전집 출간 간담회 당시 최인훈 작가. 경향신문 자료사진

<최인훈전집>에는 소설 뿐만 아니라 희곡, 수필, 문학론 등이 실려 있다. 최인훈은 1970년대 극작가로서 10년간 희곡만을 썼다. 그는 2009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연극이야말로 인류문화와 마찬가지 연령을 가진 ‘위대한 예술’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상업적인 수지(계산)없이 뒷받침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최인훈은 1977년부터 24년 동안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2001년 정년퇴임 한 후 2003년 단편 ‘바다의 편지’를 잡지 ‘황해문화’에 발표했다. 이후 신작 발표는 없었다. 그는 최근까지도 언론과 만날 때면 미리 써둔 작품이 여러 편이고 곧 신작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해왔으나, 작가 생전에 신작을 만날 수는 없었다. 최인훈은 2011년 박경리문학상을 받을 당시 “글은 최소한 예술적인 훈기가 불어와야 한다. 그럴 때가 오면 쓸 만하면 쓸 것이고, 못 쓰면 못 쓰는 것”이라고 했다.

1968년 5월 문학평론가 김우창(왼쪽)과 작가 최인훈(오른쪽)이 현실참여 문학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8년 5월 문학평론가 김우창(왼쪽)과 작가 최인훈(오른쪽)이 현실참여 문학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해 2월엔 서울대 법대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입학 65년 만이다. 그는 당시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옛날 법과대학 도중 탈락자인 사람이 문학에 종사하고 있다”며 “내가 학창시절 때 더 세상에 대해 밝은 관점을 가졌을 필요가 있었는데 그때는 참 철이 없었다”고 말했다.

최인훈이 등단 50주년을 앞두고 열린 기자 간담회(2008년 11월)에서 “4·19혁명이라는 시대가 <광장>을 쓰게 만들었다”면서 한 말은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오롯이 비추는 거울과 같다.

“<광장>은 내 문학적 능력보다는 시대의 서기로서 쓴 것입니다.”

유족으로는 부인 원영희 여사와 아들 윤구, 윤경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다. 장례는 ‘문학인장’으로 치러지며, 위원장은 문학과지성사 공동창립자이자 원로 문학평론가인 김병익이 맡았다. 영결식은 25일 오전 8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내 강당에서 열린다.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지영동 ‘자하연 일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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