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실리 모두 취약…국정교과서 결국은 외면받을 것”

2015.10.12 06:00

1974년 국정 집필했던 한영우 전 규장각 관장

초대 서울대 규장각 관장을 지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77·사진)는 11일 “나도 국정교과서를 쓰긴 했지만 국정 전환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정교과서는 이미 학계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고 국사학자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며 “국정교과서는 아무리 강제성을 띠고 보급되더라도 결과적으로 현장의 외면을 받고 힘을 잃은 교과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학자들이 말하는 ‘국정 역사교과서 = 죽은 책’ 논리에 고개를 끄덕인 셈이다. 1974년에 나온 국사 과목의 첫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그는 중도성향 역사학자로 분류된다.

한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전화인터뷰에서 “민주사회에서 국정교과서는 시대에 맞지 않고, 역사 해석을 단일화하는 것은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국정교과서는 학계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두 달여 전 교육부가 국정화 전환 여부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도 이런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고 했다.

“명분·실리 모두 취약…국정교과서 결국은 외면받을 것”

- 학계 분위기는 어떤가.

“통계로 말할 순 없어도 절대다수가 국정화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연한 거다. 역사교과서에 융통성을 주는 것이 민주국가의 교과서에 맞는 것이다. 미세한 건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해도 좋다. 그래서 학문하는 것 아닌가.”

- 국정화 발표가 임박한 듯하다.

“학계에서 존경 받는 집필진을 구할 수 없고, 시간적으로도 너무 촉박해 국정교과서는 명분과 실리에서 모두 취약하다. 현실적으로도 현 정부가 추진하는 국정교과서 실패는 불 보듯 뻔하다.”

- 정부는 다양한 전문가를 공모해 중립적인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한다.

“국정화를 두고 ‘전체주의 국가냐’라는 당연한 비판이 나오는 상황에서 학계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과연 쓰겠느냐. 쓰겠다는 사람이 나설 순 있겠지만, 학계의 외면을 받는 교과서가 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게 아니고 징발되는 국정일 경우 필자 간 호흡이 안 맞는 문제도 있고, 또 솔직하게 말하면 인센티브가 있어야 일 잘하는 것은 학자들도 똑같다. 국정에 징발되면 원고료만 받고 마는데, 쓰고 나면 학계 평가는 좋지 않고, 인센티브도 없는 상황에서 엄청난 부담을 안고 집필진에 들어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본다.”

- 2017년 학교에 배포될 때까지 1년 반도 채 남지 않았다.

“글을 쓰기 전에 필자 간 조정을 하고, 원고를 쓰고, 윤문·교정 등의 과정을 거치려면 아무리 촉박하게 잡아도 3년 이상은 있어야 교과서가 제대로 나올 수 있다. 그래도 짧다. 2017년 현장 보급이라는 현재 일정은 불가능에 가깝다.”

- 40여년 전 어떻게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게 됐나.

“1970년대 국정교과서 집필 당시 30대 초반이었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건 아니다. 다른 분이 쓰기로 했다가 사정이 있어서 대타로 멋도 모르고 참여했다. 다시 하라면 절대 안 한다. 고교 교과서의 조선시대 부분을 맡았다. 당시에 학계 내부에서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써보자는 논의가 활발했다. 그래서 국사교육강화위원회라는 논의의 장에 명망가들이 다 들어가 있었는데, 정부에서 유신에 타이밍을 맞춰 국정화를 했던 것이다.”

- 현재의 검정교과서를 어떻게 생각하나. 국정화가 답인가.

“검정교과서에 문제 있으니 국정 가겠다? 이건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국정화는 답이 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시대 변화에 따라 대한민국의 모습을 과거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때가 됐고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제도 자체가 아니라 제대로 운영하는 것이다. 정부는 모든 책임을 검인정 제도에 돌리며 국정으로 바꾼다고 하는데, 그동안 학계의 중론을 모아 검인정제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교육부에 책임이 있다.”

- 정치권과 보수 진영에선 학계 대부분이 좌파라고 한다.

“통계를 내봤느냐. 학계를 그렇게 간단하게 보지 마라. 나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제자 수백명이 교수인데, 모두의 색깔이 다 다르다. 색깔론으로 국사학계에 대한 불신을 심는 것은 학계와 국민을 갈라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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