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올림픽을 ‘국뽕 행사’로 만들 텐가

2016.09.26 21:24 입력 2016.09.26 21:27 수정

[정윤수의 오프사이드]평창올림픽을 ‘국뽕 행사’로 만들 텐가

월요일 아침, 몇몇 신문의 1면에는 500일 앞으로 다가온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축하하는 문화 공연이 펼쳐진다는 광고가 실렸다. 더불어 문화체육관광부의 보도자료에 기반한 관련 뉴스들도 실렸다. 그 광고와 기사들을 보면서, 아 정말로 평창올림픽은 큰일 나겠구나, 하는 깊은 우려에 사로잡혔다. 그 많은 행사에 참여하는 연예인, 엔지니어, 자원봉사자들의 노고야말로 귀한 것이지만 지난 8일 고척돔구장에서 열린 ‘2018 평창올림픽 G-500 페스티벌, K-pop 콘서트’ 행사를 비롯해 이달 말에 서울과 평창 일대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문화 행사가 일종의 ‘한류 관광’과 같아서, 얼핏 보기에 화려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공허한, 속 빈 군무로 그칠 공산이 커보인다.

[정윤수의 오프사이드]평창올림픽을 ‘국뽕 행사’로 만들 텐가

왜 그런가? 새롭고 가치 있는 의미의 발견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스포츠가 됐든, 공연이 됐든 문화행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의미의 생산과 재현이다. 그 의미는 클리퍼드 기어츠가 발리의 닭싸움을 통해 밝혔듯이, 개인에게는 심층적이며 사회로서는 집합적이다. 88올림픽이나 2002월드컵은, 위로부터(88올림픽) 강제된 것이든, 아래로부터(2002월드컵) 생산된 것이든 당대의 집합적 열망이 터져나온 사건들이었다.

그런데 그 후, 여러 지자체들의 수많은 국제 행사들은 발전국가 시대의 의미나 상징의 시효가 소멸된 것을 모르고 과잉 중복의 이른바 ‘국뽕 행사’로 일관함으로써 오히려 대규모 국가 행사의 역효과만을 확인해왔다.

그 결정타가 2014인천아시안게임 개막식이다. 진행상의 어수선함은 별개로 하더라도 진부한 국가주의적 상상력, 퓨전도 아니고 전통도 아닌 기이한 의상과 춤들, 아시아는 인천에서 하나가 된다는 식의 무모한 국수주의, 한류 스타들이 시종일관 무대를 장악해 버리는 요란한 관광 무대로 졸렬함의 극치를 달린 바 있다. 어떤 의미도 생산하지 못했고 기존의 어떤 의미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지 못했다. ‘하나 되는 아시아’니, ‘세계로 뻗어가는 인천’이니 하는 구호의 남발인데, 이런 구호에 그나마 의미가 발생했던 20세기는 벌써 한 세대 이상 지나버렸다.

500일을 남겨두고 문체부가 기획하고 여러 단체들이 총망라돼 펼치는 각종 공연과 행사가 이와 다를 바 없으니, 2014년의 졸렬한 파탄을 보고 나서도, 2년여가 지나도록, 대규모 스포츠이벤트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개념과 상상력이 이 정도로 빈곤하다는 점에서, 나는 깊은 우려를 갖는다.

얼마 전에 끝난 2016 리우 올림픽도 되새겨보자. 시청률조사기관 닐슨코리아는 리우 올림픽 개막 직전에 “주요 경기시간대가 새벽에 몰리면서 본방송 시청률로는 역대 최저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상파 3사의 역대 올림픽 중계방송 평균 시청률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34.2%, 2004년 아테네 올림픽 31.5%, 2008년 베이징 올림픽 32%, 2012년 런던 올림픽 23.1%를 기록했으나 리우 올림픽의 경우 KBS1 10.5%, MBC 5.3%, SBS 4.3%를 기록했다.

이를 낮밤이 뒤바뀌는 ‘시차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것은 게으른 판단이다. 베이징을 빼고는 다들 심야나 새벽의 개막식이었다. 2012년 런던은 우리 시간으로 새벽 5시에 개막식을 치렀고 2004년 아테네는 아예 깊은 잠을 자는 시간대였다. 그럼에도 31.5%였다.

리우 올림픽의 저조한 시청률은, 시차 때문이 아니라, 올림픽이 더 이상 매력적인 구경거리가 아니며 그 문화 행사들을 통해 더 이상의 집합적 의미가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한국갤럽의 조사를 보면 “국민들은 밤잠을 설치며 응원을 하느라 생활리듬이 깨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적고 있다. 그랬던 것이 런던, 소치 그리고 리우에 이르면서 이렇게 ‘생활리듬’이 깨질 정도로 올림픽을 ‘국가지대사’로 보는 감정은 크게 줄었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올림픽을 통해 ‘생활이 즐거워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2004년 아테네 78%, 2010년 밴쿠버 89%, 2012년 런던 84%였으나, 2014년 소치 때는 67%로 하락했고 이번 리우에서는 55%로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올림픽이 더 이상 ‘국가지대사’가 아니며 황금알을 낳는 ‘특수’가 아니며 시청률의 고점을 찍는 ‘대박 상품’이 아닌 것이다.

요컨대 올림픽을 통해 ‘국민’이 되고 ‘애국’을 실천하고 ‘국가’를 드높인다는 식의 발상 자체가 효력을 잃었다. 20세기의 ‘국민’이 21세기의 ‘시민’이 되었으며 대규모 스포츠 대회는 따라서 다른 의미, 새로운 가치, 전혀 다른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조윤선 문체부 장관은 500일을 앞둔 여러 행사들을 통해 “전통과 첨단이 흥겹게 어우러지고, 인류 평화와 공영을 위한 소중한 가치들을 빛냄으로써 대한민국이 문화리더십을 발휘하겠다”고 한다. 이 낱말들은 사전적으로 뜻이 깊다. 그러나 그것이 조합되어 하나의 문장으로 의미를 생산해야 할 텐데, 아뿔싸, 이 수사들은 이미 1988년과 2002년에 다 써먹었고 2014년에는 더 이상 당대적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적자 투성이로 함께 겪었다.

그랬음에도 획기적인 발상, 당대적인 상상력, 모험적인 의미 창출은 어디에도 없다. 한류 스타 총출동일 뿐인데, 이런 빈곤한 상상력으로 평창을 준비한다고 하니, 어찌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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