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의 맛’ 제대로 보는 중

2018.07.19 10:15 입력 2018.07.20 08:45 수정

여름휴가의 이미지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다. 제주 협재. 2016. / 김창길 기자

여름휴가의 이미지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다. 제주 협재. 2016. / 김창길 기자

“파리가 조는 듯한 더위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더위 먹은 소는 달만 봐도 헐떡거린다고 합니다.”

“가을비는 장인 수염 밑에서도 피할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 지역에 따라 비는 내렸습니다만 양은 아주 적었습니다.”

프랭크 밀스의 경쾌한 피아노 연주곡 해피송이 흘러나오며 9시 뉴스에 그가 등장했다. 땡전뉴스가 재미있을 리 만무했던 한 초등학생은 김동완 통보관의 기상예보를 보고 듣기 위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어린이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속담도 있었지만 아저씨의 날씨 설명은 그 어떤 선생님의 가르침보다 귀에 쏙쏙 들어왔다. 한반도 지도 위에 기압골을 그리는 아저씨의 손놀림도 볼거리였다. 내일의 날씨는 김동완 아저씨의 손놀림에 따라 결정된다고 유년의 나는 믿었다.

제주 세화. 2017. / 김창길 기자

제주 세화. 2017. / 김창길 기자

<휴가 계획은 세우셨나요?>

여름휴가의 이미지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 너머로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지는 파란 하늘. 상상만 해도 힐링이 될 것 같은 블루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휴가 계획을 잡는다. 하지만 휴가의 즐거움은 거기 까지다. 막상 휴가를 떠나면 집 밖을 나서자마자 시작되는 교통정체와 바가지 상술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래도 1년에 한번 있는 여름휴가라며 마음을 진정시켜본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참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궂은 날씨다.

파란 하늘과 햇빛에 대한 동경은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 것일까? 알랭 코르뱅 등 프랑스의 인문학자 10명은 햇빛, 바람, 비, 눈, 안개 등 날씨를 느끼는 사람들의 감수성을 추적했다. <날씨의 맛>(책세상) 공동 저자인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해에 대한 평가가 1750년에서 1960년 사이에 말 그대로 완전히 뒤집혔다며 다양한 사례를 보여준다.

중세의 물리학과 의학은 신체가 햇빛에 노출되는 것을 금기시 했다. 프랑스 의사 포르숑은 ‘태양의 열기가 기력을 불태우고, 신체를 탈진케 하고, 소화력을 약화시키고, 자연스러운 열기를 흩뜨림으로써 생명을 빼앗아 간다’며 태양을 멀리 하라고 충고했다. 햇빛에 대한 두려움은 실생활에서도 발견됐다. 여름휴가를 보낼 시골집은 남향이 아닌 북향집을 선택했다. 햇빛에 오랫동안 노출된 사람들은 비둘기 똥을 태워 가루로 만들어 얼굴 마사지를 하고 물을 타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라는 민간 처방도 있었다. 햇빛은 인종의 분류에도 개입했다. 강렬한 태양의 불꽃이 흑인들의 뇌를 혹사시켜 아프리카 사람들의 지성이 낮다는 한 박사의 진단이 설득력이 있던 분위기였다.

태양에 대한 두려움은 1787년 광합성 메커니즘의 발견 등으로 서서히 전복됐다. 태양이 생명의 섭리를 조절한다는 광합성의 이해는 사람들을 햇빛에 다가가는 계기가 됐다. 인간 광합성인 일광욕 대한 욕망은 20세기 중반에 절대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1964년 프랑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성공적인 휴가를 위해서는 햇살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답변이 90퍼센트에 육박했다. 보험사들은 휴가철 맑은 날씨를 대비하는 우천 보험 증권을 만들었고, 구릿빛 피부를 만드는 일광욕의 기술을 소개하는 여성 잡지들의 실용 기사와 사진들도 속출했다. 1920년대의 한 홍보 잡지는 일광욕에 대한 현대인들의 욕망을 다음과 같이 강렬하게 표현했다.

“7월 초부터 우리는 모두 자라투스트라(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의 제자가 되어 태양을 경배한다!”

카유보트의 비오는 날, 파리의 거리(왼쪽), 반 고흐의 비 내리는 다리(오른쪽)

카유보트의 비오는 날, 파리의 거리(왼쪽), 반 고흐의 비 내리는 다리(오른쪽)

<비는 애절해 보일수록 아름답다>

몸을 적시는 비는 분명 불쾌하고 궂은 날씨다. 하지만 비가 오는 풍경을 구경하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이다. 창밖에 내리는 비는 멜랑콜리한 심미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18세기 영국 남부지방을 여행했던 윌리엄 길핀은 비 내리는 풍경이 ‘픽쳐레스크’하다고 처음 표현했다. 픽쳐레스크는 ‘그림이 될 만한’이라는 뜻으로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풍경회화의 낭만주의적 속성을 말한다. 루소의 제자였던 작가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도 비에 대해 한마디 했다. 그는 ‘비가 올 땐 아름다운 여인이 우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그녀는 애절해 보일수록 더욱 아람다워 보인다’고 비와 눈물을 연결시켰다.

픽쳐레스크한 비는 당연히 그림으로도 표현됐다. 비의 이미지를 탐색한 알랭 코르뱅 교수는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와 반 고흐의 <비 내리는 다리>를 비교했다. 그는 반 고흐의 그림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서양 화가들이 비 자체를 그리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 했다. 줄을 그어 비를 표현한 고흐와 달리 카유보트는 빗물이 고인 인도와 우산을 통해 비내리는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지금 내 앞에 코르뱅 교수가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교수님, 하늘에서 내리는 비까지 그림으로 그린다면 풍경이 서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을 겁니다. 고흐의 비 내리는 다리 풍경은 이국적일 따름이죠. 사진기자들도 비 내리는 서정적인 풍경을 사진에 담을 때는 카유보트의 그림처럼 우산을 받쳐 든 행인들의 풍경을 사진 찍는 답니다.”

우포의 새벽. 2008. / 김창길기자

우포의 새벽. 2008. / 김창길기자

<해돋이, 안개의 인상>

나타나면 곧 사라지는 안개는 종잡을 수 없다. ‘인상주의’라는 말의 효시가 된 <인상, 해돋이>를 그린 모네는 그의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이 엄청나게 멋진 광경은 고작 5분간 지속될 뿐이오! 미칠 노릇이지!” 모네는 템즈강에 피어오른 안개가 사물의 뚜렷한 윤곽을 지워버리는 광경에 홀딱 반했다. 하지만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안개의 인상을 그림에 포착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안개 낀 풍경에 사진가들도 탐닉한다. 동 틀 무렵, 한 무리의 정령들처럼 땅 위에 퍼져 나가는 안개는 신화적인 세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새벽에 사진을 찍는 이유가 ‘빛이 태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라는 한 풍경사진작가의 말도 있다. 멋진 표현이지만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동틀 무렵 스멀스멀 피어올라오는 안개 때문일 것이다.

안개는 어떤 신비한 인물이나 사건의 출현을 알리는 연극 무대의 특수효과다. 노련한 풍경사진작가가 아닌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안개 특수효과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보일 듯 말 듯 한 안개에 가려진 풍경은 상상의 나래를 펴게 만든다. 안개라는 베일이 사라지기전, 풍경의 속살이 다 드러나기 전, 사진가들 졸린 눈을 비비며 카메라를 챙겨 문 밖을 나선다.

함박눈. 서울. / 김창길 기자

함박눈. 서울. / 김창길 기자

<오감을 통해 느끼는 눈>

눈만큼 재미있는 기상현상이 어디 또 있을까? 겨울이라는 한정적인 계절적 요소와 얼굴을 간질이며 떨어지는 물리적인 감촉, 들릴 듯 말 듯 땅에 내려앉는 눈의 속삭임, 장난스럽게 입을 벌려 맛보는 눈의 맛, 그리고 유년의 찰흙 놀이를 떠올리게 하는 눈사람 만들기… 눈은 오감을 통해 느낄 수밖에 없는 기상현상이다.

눈 오는 풍경은 고요하다. 지저분한 현실을 하얗게 덮어버리는 순백의 향연에 마음이 잔잔해진다.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가면 눈송이의 기하학적인 생김새에 감탄한다. 근대 철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데카르트도 신비한 눈송이 결정체에 홀딱 반해 그림까지 그렸다. 광학기계인 현미경의 등장은 눈 결정체를 관찰하는 취미의 확대를 부추겼는데, 온도와 습도에 따라 변하는 눈 결정체의 모습을 동일한 것이 없었다.

광학기계인 사진기를 다루는 사진가들에게 눈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1893년 눈이 쏟아지는 뉴욕 5번가 한 복판에 한 사진가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온 몸이 얼어붙을 지경이지만 그의 눈초리는 험상궂은 날씨보다 매서웠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3시간이 흘렀을까? 눈발은 사선으로 날리고 마차의 궤적은 수직으로 프레임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화면 중심으로 다가오는 두 대의 역마차. 사진가는 드디어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그가 3시간동안 기다리던 그 절묘한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미국 근대사진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찍은 <겨울, 5번가> 사진이다.

그림을 흉내 낸 사진을 벗어나 독자적인 사진 문법을 추구했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도심 풍경에는 눈이 꽤 등장한다. 비슷한 시기에 찍은 뉴욕의 <종착역>에도 눈이 내린 풍경이다. 날씨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분위기도 스트레이트 포토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1902년에도 그는 봄비에 촉촉이 젖은, 여기서도 마차가 등장하는, 도심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그의 말년 사진 작업은 아예 하늘에 초점을 맞춘다. 200여점이 넘는 다양한 구름의 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하늘의 노래> 혹은 <등가물>로 불리는 사진연작이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자신의 미묘한 심리 상태를 변화무쌍한 구름에 등가 대입시켰다고 작품의 의도를 설명했다.

겨울, 5번가. 1893.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겨울, 5번가. 1893.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많이 덥지? 시원하게 소나기가 퍼부을 거 같네!”

기자 초년병 시절, 폭염이 지속되던 여름 한낮에 걸려온 사진부장의 전화였다. 뙤약볕에서 일하는 기자의 건강을 염려한 위문 전화였을까? 날씨 스케치를 유난히 좋아했던 사진부장의 전화 한통은 또 다른 취재 지시였다. 뉴욕 5번가에서 3시간동안 기다렸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만큼은 아니었지만 초년병 사진기자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폭염을 식혀 줄 소나기를 기다렸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날씨 변화는 소소한 일상의 뉴스다. 여름이 덥고,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이 뭐가 특이한 일이겠냐며 날씨 뉴스에 대한 가치를 의심하는 기자들도 있다. 하지만 날씨를 느끼는 현대인의 감수성은 점점 더 섬세해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계절의 시대가 아닌 일기예보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날씨의 맛> 공동저자들은 입을 모은다. 모바일 메인 뉴스에 날씨가 빠진 적은 없으며, 일기예보 앱 하나쯤은 어느 누구의 스마트폰에나 다 깔려있다. 날씨는 이제 자연의 법칙에 종속된 채 방치될 수 없다. 우리는 달력에 맞춰진 계절을 기다리고, 언제나 태양이 자신의 맡은바 의무를 다하기를 희망한다.

날씨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수성은 북반구의 서양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구석이 있다. 고층 빌딩과 아파트 숲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만 우리는 종종 농경사회에서 통용됐던 24절기 날씨의 감수성을 다시 되살린다. 8월 초는 아직 무더운 여름휴가철이다. 열대야는 사라질 수 있겠지만 한낮 더위는 쉽게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입추(8월7일)를 하루 앞둔 사진부장의 출근 인사말이 예상된다. ‘이제, 아침 저녁에 부는 바람은 가을 같네.’ 빨갛게 익은 고추 말리는 풍경을 취재해보자는 사진부장의 부드러운 업무 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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