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김용갑 떠난다…이제 자유인” 화끈한 정계은퇴

2008.01.17 08:20

이념논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자 하면 떠오르는 제제다사가 있다. 그중 하나가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이다. 한데 김용갑 하면 다른 ‘보수 꼴통’과 뭔가 다른 향기가 있다는 말이 적지 않다. 음모, 정략, 부패의 냄새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평이 그것이다.

노정객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인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보수의 순수성이 배어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용갑 의원이 국회의사당 앞 뜰에서 “이제 난 자유인”이라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그는 포즈를 취해 달라는 요청에 응하며 “나, 개그맨 해도 되겠지?”라고 농담했다. /박민규기자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용갑 의원이 국회의사당 앞 뜰에서 “이제 난 자유인”이라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그는 포즈를 취해 달라는 요청에 응하며 “나, 개그맨 해도 되겠지?”라고 농담했다. /박민규기자

김의원은 그가 바라던 보수로의 정권이 교체되자 ‘화끈하게’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현역 의원 중 첫 불출마 선언이었다. “원조보수로서 할 일을 다했으니 퇴장한다”는 게 은퇴의 변이었다. 배지 떼면 인생 망가지는 줄 아는 게 국회의원의 속성임을 감안하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던 정치인들도 인간적으로는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설전을 예상하고 찾아갔다. 그런데 그는 동네 아저씨처럼 소탈하게 “난 이제 자유인”이라고 말했다. “평생을 군인, 공무원, 정치인으로 살았다”면서 “여러 분야를 두루 구경도 하고, (중풍에 걸린) 아내를 돌보며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처음부터 이명박 당선인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든다면서 한쪽(기업)으로만 치우친 것 같아요. 대운하 같은 것도 독단적으로 하고 있는 거야. 국민을 설득하는 게 리더십이고 민주주의예요. 이거 잘못하면 환경재앙이 안 온다고 누가 장담합니까. 이재오 같이 당선인 의지라면 무조건 따르면 조금 있다가 비판의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구체적으로 더 얘기해 주세요.

“한나라당의 후보가 된 이후 상임위 별로 점심을 살 때 ‘측근 실세를 잘 다스려야겠다. 횡포가 심할 것 같다’고 했어요. 보수가 10년 만에 정권을 잡았는데 이명박정부가 실패하면 ‘역시 보수는 부도덕하고 부패하고 자기들만 위하는 패거리 아니냐’는 욕을 먹게 되는 거 아니에요? 인생 자체가 순간인데, 5년은 백마가 문틈으로 휙 지나갈 정도로 짧은 기간입니다. 욕심 부리면 나라가 망합니다.”

-그러면 박근혜 전 대표는 어떤가요.

“이념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경선 과정에서) 도와달라는 말이 없었어도 스스로 도왔어요. 박근혜씨는 사실상 당대표를 할 때 제대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경선과정을 거치면서 리더십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박근혜씨가 다음에 대통령 했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인생을 평가하신다면.

“평생 할 말 다하고 살았어요. 이명박 당선인에게도, 박근혜 전 대표한테도, 국회에서도 눈치 안보고 할 말 다했습니다.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로 인해 상처를 입은 분이 있었다면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정치를 그만두는 소회는요.

“맥아더 장군이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했는데, 참 멋있는 말이에요. 인명진 목사(한나라당 윤리위원장)에게도 사과했어요. ‘광주해방구’ 발언을 문제삼고 징계한다고 해싸서, (그때) 내가 전화 한 통화도 안 걸었거든. 보수단체에선 저보고 욕을 많이 해요. ‘김용갑이는 앉아만 있어도 한나라당이 보수당이란 칼라가 분명한데, 빠지면 (누가) 그 색깔을 대신하느냐’고….”

그는 “요즘 100만원, 50만원씩 후원해줬던 사람들한테 쭉 전화 걸고 있다”고 소개했다. “보수당을 하면 후원금이 안 들어와요. 여당에다가 아픈 소리 하니까 ‘김용갑이한테 주면 조사 들어온다’고 해서. 밖에 나가면 시원히 말을 잘했다고 하면서도 후원금은 안 줘요. 마이너스 통장 써요. 국회 산자위원장할 때 산하(단체)가 많으니까 10만원 소액후원이 많았고, 그 나머지는 아주 힘들었어요. 그래서 후원금 줬던 사람들한테 고맙다고 일일이 인사하는 게 요즘 일이에요.”

-자유인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뭘 할 건가요.

“아내를 돌볼 겁니다. 국회의원 되고 2년 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10년이 흘렀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집사람이 지금까지 해준 것만도 고마워 가지고 ‘내가 나가서 봉사해줄게. 이제 내가 해야지’라고 했다. 재활병원에 다니는데, 내가 휠체어 밀고 그런 거 잘해요. 우리 가정에 와이프가 없다고 생각해봐요. 살아있는 거만도 얼마나 고마운데. (아내하고) 해외 가면 렌트카 내가 얻고 부킹도 내가 할 거예요.”

-자녀들하고는 관계가 어떠세요. 아버지가 국회에서 강경발언 하는 거 불편해하진 않았나요.

“아들이 셋이에요. 첨엔 다 불편해 했는데, 지금은 안그래. 한번씩 ‘이런 말은 하지 말라’고 코치도 해줘요. 전부 다 효자예요. 내가 지금은 자상하게 애들을 배려합니다. 클 때는 기합 많이 주고, 두드려 팼지. 커서 존중해주는 데도 아버지를 상당히 어렵게 생각하고 무서워해요. 그래도 며느리들은 남편 보고 ‘아버님처럼만 하라’고 한답니다. 허허.”

-의정 생활 중 기억나는 순간을 꼽으면.

“최근에는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을 했을 때입니다. 나는 시대가 바뀌어서 남성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고, 동등하게 경쟁을 같이 해야지 여성을 위한 부가 생길 필요가 없지 않으냐는 생각이었어요. 여성가족부가 호주제를 폐지하면서 ‘자녀가 아버지 성을 따르는 것을 없애겠다’고 했는데, ‘형제지간도 성이 달라질 수 있다. 동방예의지국이 이럴 수 있느냐고요. 여성가족부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6대 국회 말에는 여성단체들이 (호주제 폐지) 서명을 받는 데 다른 의원들이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전부 서명을 했지만, 나는 안 했어요. 그리고 남자 의원들한테 ‘왜 여성표 의식해서 할 말 못하냐. 남자 의원들 떼어버려라’고 했지. 그래서 국회에서 가장 비(非)여성적인 의원이 됐어요.”

-왜 그렇게 좌파를 미워하나요. 좌파의 가치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지.

“(좌파에) 개인적 한이 맺힌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당한 것도 없어요. 청와대 민정수석을 할 때 건대 사건(1986년 10월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 명이 건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을 결성하고 농성을 벌인 사건. 학생 398명이 구속기소됐다)이 있었어요. 유인물을 보니 ‘가슴에 비수를 꽂겠다’는 등의 말이 있어 섬뜩했어요. 아하, 이 선에서 막아야지 더이상 가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친북좌파를 싫어한 것이지 일반적인 좌파는 인정합니다. 보수 주장을 하면서도 양날개는 있어야 한다는 논리도 많이 썼어요. 진보도 있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진보가 소금 역할, 견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균형감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김의원이 주장하는 대북 강경책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은데요.

“저는 인도주의적인 대북 지원까지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나 ‘지금처럼 저자세로 끌려가는 거는 안된다. 그것은 북한에 나쁜 습관을 주고 핵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안된다’는 거예요. 시대에 뒤떨어진 게 아니라 확실히 하자는 것입니다. 북한 인권도 그대로 둬서는 안됩니다. 최고위층은 잘살지만 (나머지는) 정말로 인간 이하 대접을 받고….”

-의외로 대통합민주신당 젊은 의원들 사이에서 ‘인간 김용갑’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던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국회 산자위원장을 2년 전에 했는데 여당의 386출신 의원들이 (위원회에) 많았어요. 이 사람들이 ‘김용갑하고 한판 붙어야겠다’고 날을 세우고 있었더라고. 그런데 내가 위원장하는 걸 보면서 이 양반들이 김용갑은 이념문제·북한문제 빼놓고는 너무 멋있다고 그래. 일 열심히 하는 것 보고 그러지 않았겠나 싶어요. 촛불 감사니 뭐니 하면서 연구도 많이 해서 칭찬도 받았고요.”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위기에 놓여있던 민주노동당 조승수 전 의원의 구명운동 탄원서에 서명한 것은 의외였습니다.

“조의원이 이념적으로 나와 다르지만 아주 성실하더군요. 내가 그걸 이해해 준거지. 정치를 그만둔다니까 조(전)의원이 전화를 걸어왔어. ‘위원장님 저는 이념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그때도 존경하고 지금도 존경합니다. 이런 용단을 아무나 합니까’라고. 아까운 사람이야.”

-지역구 관리에 소홀히 했다는 말이 있다. 가령 어느 중진의원의 지역구에 가면 그분 폭탄주 못 얻어먹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밀양 가면 김의원 술을 얻어 먹어본 사람 없다고 하던데요.

“내가 깨끗하게 했어요. 물론 100% 지킬 수 없지만, 돈을 거의 안 썼어. 무소속 할 때는 밥도 사고 했어요. 16, 17대는 선관위에서 내가 너무 모범선거하니까 조사할 게 없대. 그래도 밥은 샀어, 큰 밥은 안 사도….”

-장군 출신인 줄 알았는데 소령으로 예편하셨던데.

“제가 소위 때 결혼했거든요. 보병장교로 전방에서 생활하는 데 엄청나게 불편하더라고. 그래서 전과를 수송으로 옮기고 미국 유학시험을 봤어요. 합격했는데, 군사예산 삭감하면서 우리 병과는 못갔어. 그때 ‘내가 기껏해봤자 별 하나, 별 두개 받을 텐데, 이거 받기 위해 태어났나’고 생각했어요. 소령으로 제대하고 안기부에 들어갔죠. 기획, 해외인사과장, 감찰실장, 기조실장까지 했죠. 사람들은 그런데 (총무처) 장관까지 했으니 장군 출신인 줄 알아요.”

-전성기가 언제였다고 생각하는지요.

“청와대 민정수석 때예요. 그때 아주 바른 말을 많이 했지. 매주 수석회의를 할 때 사공일 당시 경제수석은 ‘경제가 잘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니 전두환 대통령이 기분 좋아 했어요. 그런데 내가 이러면 안된다, 큰일 난다 이런 얘기를 자주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지. 그래도 나중에는 다 (전대통령이)인정해 줬어요.”

-김의원을 전대통령이 신뢰하게 된 동기가 있었나요.

“민정수석 되고 나서 국내 실정도 모르고해서 석달간 보고를 안했습니다. 그러던 중 전대통령이 내각제를 연구하기 위해 유럽 순방을 갔어요. 그 사이에 민주당 이민우 총재와 김영삼 고문이 대전에서 실내공설운동장에 2만명 모아놓고 처음으로 개헌을 논의하는 행사가 있었어요. 경호원 없이 대전까지 내려가서 집사람을 전봇대 뒤에 세워놓고 내가 점퍼 복장에 선글라스 끼고 행사장으로 (몰래) 들어 갔어. 그런데 김원기 의원이 내 앞에 통과하는 거야. 전에 같이 골프도 친 적이 있어서 ‘얘한테 걸리면 큰일’이다 싶어서 그 전에 나왔지. 순방에서 돌아온 대통령께 ‘1시간만 주십시오’라고 했지요.”

-당시 무슨 보고를 했나요.

“‘안 계시는 동안에 개헌 행사에 다녀왔다’고 하면서 개헌문제를 조기에 공론화시켰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당시) 야당이 개헌을 정치적으로 쟁점화하려고 하는데, ‘민심이 야당에 가 있지 않다. 그렇다고 여당에는 더더욱 와있지 않은 것 같다’면서 개헌을 하자고 했지요. 대통령이 그 다음에 총리 부르고 해서 공론화시켰어요.”

그러면서 ‘각하 땡전(당시 TV9시 뉴스가 ‘전두환 대통령은~’하는 멘트로 시작되는 것을 빗대어 부르는 것) 뉴스란 말 들어봤습니까. 국민들이 ‘땡전 나오면 꺼버린다’고 했지. 이 양반이 ‘그거 말야.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민정수석이 직접 고치라’고 했어요. 나중에 백담사에서 ‘김용갑이는 연구 대상’이라고 했답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장군 출신이면 한 방향으로 한결같이 나가지 못했을 겁니다. 장군 됐으면 (장군 되려고) 청탁하고 하느라고 눈치봤을 거야. 누가 나를 끌어줬기보다는 내 스스로 나를 끌었지요.”

〈대담|이중근 특집기획부장·정리|이용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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