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수탈의 아픈 역사현장, 나주 영산포구 마을

2009.08.12 09:44 입력 2009.08.12 10:26 수정

비옥한 평야가 많아 일제시대 수탈현장이 됐던 호남권에는 아직도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라남도 나주 영산포구는 목포항의 개항과 함께 일제 침략의 교두보였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종로 거리를 누비며 한국 상인을 지키는 김두한의 모습, 1900년대 초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영화의 배경이 된 무대는 전라남도 나주 영산포구 일대다. 비옥한 평야가 많아 일제의 수탈현장이 되었던 호남권에는 여전히 60여 년 전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라남도 나주도 그 중 한곳이다.

옛 영산포구는 홍어의 거리로...

강가에 초라하게 서 있는 영산포등대만이 번화했던 옛 영산포구를 증거하고 있다. (이다일기자)

강가에 초라하게 서 있는 영산포등대만이 번화했던 옛 영산포구를 증거하고 있다. (이다일기자)

비릿한 홍어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나주에서 영산강을 따라 도착한 옛 영산포구는 이제 ‘홍어의 거리’가 됐다.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가 이곳에 오면서 저절로 삭았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영산포는 내륙 깊숙이 자리한 포구다. 고려시대 수운의 발달로 형성된 영산포는 1897년 목포항 개항과 함께 전라남도의 경제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1910년 일제는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개폐식 목교를 설치하고 1930년대에는 아예 철근콘크리트 다리를 설치했다. 영산포역과 직선으로 연결된 다리는 나주평야의 쌀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탈해가는 수단이 됐다. 1970년대 영산강 하구언이 지어지고 배가 더 이상 드나들지 않게 되자 영산포는 포구로서의 역할을 잃었다.

그나마 옛 포구에 남아 있는 영산포등대가 화려했던 과거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영산포등대는 1915년 일제가 영산강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이다. 이제 배가 드나들지 않아 수위를 측정할 필요는 없지만 내륙하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등대로서 저녁이 되면 여전히 불을 밝힌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영산포등대 인근 영산동과 이창동에는 일본식 가옥이 고스란히 남았다. 일제가 만든 문서창고는 회사와 가정집으로 용도가 변하긴 했지만 붉은 벽돌건물 그대로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3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온 집주인은 “가끔 이렇게 근대문화유산을 본다며 사람들이 찾아와요. 오래된 집이지만 워낙 튼튼하게 지어서 생활하기에는 불편함이 없어요.”라며 마음 좋게 집 구경을 시켜준다.

“여기도 일본집, 저기도 일본집”

영산동 일본식 가옥 처마 밑 귀퉁이에는 일장기 표시를 해두었던 동그란 표식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다일기자)

영산동 일본식 가옥 처마 밑 귀퉁이에는 일장기 표시를 해두었던 동그란 표식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다일기자)

“여기도 일본집, 저기도 일본집, 다 일본집이야~” 영산동 골목에 들어서자 주민 이환배(74) 할아버지가 마을을 설명해 준다. “이 앞은 일본 까페였고, 저 옆은 담배 가게였지. 어렸을 적에는 일본아이들과 골목을 뛰어다녔어.”라며 당시를 회상한다. 일제강점기 나주의 인구는 14만 6000여명. 그 중 일본인은 3400여명에 달했다. 일본인은 영산포를 침략 교두보로 삼고 교육, 상업. 금융시설을 만들었다. 해방 후 일본인이 떠난 영산동과 이창동 일대에는 130여 채가 넘는 일본식 가옥이 그대로 남았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장군의 아들>, 1970년대 시골을 무대로 한 드라마 <죽도록 사랑해>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주민의 안내를 받아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보자 예상보다 더 많은 일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정(西町·니시마찌), 본정(本町·혼마찌)이라 불리던 거리 명칭부터 가옥에 일장기 표시를 했던 흔적까지 1930년대에 타임머신을 타고 온 기분마저 들 정도다. 오래된 양철집 내부는 긴 복도에 다다미방과 옷장 등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정미소, 창고, 공장 등으로 쓰이던 건물은 일반 살림집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빈집이 되어버린 곳이 많다.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윤상근(76)할아버지는 “그때만 해도 여기가 엄청 번화가였지. 뱃길이 끊기고 상권이 다 죽었어. 사실 60년도 더 된 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게 신기하지 뭐.”라고 말한다. 낮은 지대의 집은 1989년 큰 홍수로 물에 잠겨버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옛날 사진을 가지고 있는 주민을 찾기 힘들었다. 영산동 이성자 통장은 “마을에서 아이 울음소리를 들어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집주인이 마을을 떠나거나 연로해서 세상을 떠나면 집은 그냥 비어버리죠.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니까 잘 정비하면 더 좋을 텐데요.” 라고 말한다.

수탈의 현장이자 독립운동의 근거지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 저택/ 영산동 마을 한가운데에 으리으리한 저택이 있다. 지금은 문화재 관리 보존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구로즈미 이타로는 전국을 시찰하다가 나주평야를 보고 영산포에 정착해 1,100여 정보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됐다. 지금 봐도 호화로운 저택은 1935년경 청기와를 비롯한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운송해 지은 것이다. (이다일기자)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 저택/ 영산동 마을 한가운데에 으리으리한 저택이 있다. 지금은 문화재 관리 보존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구로즈미 이타로는 전국을 시찰하다가 나주평야를 보고 영산포에 정착해 1,100여 정보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됐다. 지금 봐도 호화로운 저택은 1935년경 청기와를 비롯한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운송해 지은 것이다. (이다일기자)

마을 안쪽까지 들어서자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택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 나주에서 가장 많은 농토를 보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저택이다. 전국을 시찰하다가 나주평야를 보고 영산포에 정착해 1,100여 정보(町歩)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됐다. 지금 봐도 호화로운 저택은 1935년경 청기와를 비롯한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운송해 지은 것이다.

이렇게 수탈의 증거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나주지만 동시에 항일학생운동의 근원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작이 나주역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나주에서 출발한 호남선 열차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한국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과의 싸움으로 번졌고 이것이 불씨가 돼 호남지역에서는 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나주항일학생운동기념관에서는 당시 나주 모습은 물론 독립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나주에는 영산포등대 이외에도 옛 나주경찰서, 노안천주교회, 남평역사 등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가 많다. 옛 동양척식회사 건물 등 나주 시내 몇몇 건물은 문화재등록이 예고됐다. 물론 아직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지도를 꼼꼼히 살피면서 찾아야 하지만 호남의 웅도로 찬란한 문화유산을 가진 나주를 둘러본다면 근대문화유산 기행은 꼭 풀어야 할 과제처럼 여행객을 따라다닐 것이다.

〈경향닷컴 이윤정기자 yyj@khan.co.kr〉

가는길/
서울에서 나주까지 고속버스가 하루 12회 운행된다. 기차는 나주역까지 KTX가 하루 4회 운행된다. 나주역에서 내려 영산대교를 건너면 바로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지인 영산동이 나온다. 바로 옆 이창동으로 가면 ‘영산포 홍어의 거리’가 나오고 영산강가로 나가면 옛 영산포등대가 보인다.

기타정보/
영산동, 이창동 이외에도 나주 전역에 천년의 문화를 간직한 문화재와 근대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나주시 관광안내도를 활용해 호남의 웅도인 나주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동시에 돌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근대문화유산은 관광지도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면서 봐야 한다.

나주시 문화관광홈페이지 http://tour.naju.go.kr/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http://www.najusim.or.kr/


옛 영산포구/ 1970년대 영산강 하구언이 생기기 전까지 영산포는 목포항에서 영산강을 따라 내륙까지 연결되는 번화한 포구였다. 전라남도 경제 중심지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발달했던 모습은 옛날 사진으로나마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배가 수시로 드나들고 상점이 즐비했던 옛 모습과는 달리 현재 포구 자리에는 사진 가운데에 보이는 영산포등대만이 남았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옛 영산포구/ 1970년대 영산강 하구언이 생기기 전까지 영산포는 목포항에서 영산강을 따라 내륙까지 연결되는 번화한 포구였다. 전라남도 경제 중심지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발달했던 모습은 옛날 사진으로나마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배가 수시로 드나들고 상점이 즐비했던 옛 모습과는 달리 현재 포구 자리에는 사진 가운데에 보이는 영산포등대만이 남았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영산포개폐식목교/ 일제는 내륙에 위치한 영산포에 배가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개폐식 목교를 설치했다. 사람이 통행할 때 돈을 내기도 했다는 다리는 장마 때마다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1930년대에 일제는 목교 대신 철근콘크리트 다리를 영산강에 설치했다. 영산포역과 직선으로 연결된 다리는 나주평야의 쌀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탈해가는 수단이 됐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영산포개폐식목교/ 일제는 내륙에 위치한 영산포에 배가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개폐식 목교를 설치했다. 사람이 통행할 때 돈을 내기도 했다는 다리는 장마 때마다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1930년대에 일제는 목교 대신 철근콘크리트 다리를 영산강에 설치했다. 영산포역과 직선으로 연결된 다리는 나주평야의 쌀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탈해가는 수단이 됐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영산포 동정 거리/ 일본말로 ‘히가시마찌(東町)’라 불리던 이곳은 영산포의 번화했던 골목 중 하나다. 일본인은 수탈을 위해 영산포에 터전을 잡고 대지주가 되었지만 조선인은 소작농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지게 진 농민의 뒷모습이 유독 힘겨워 보이는 이유다. 번화했던 영산포 거리는 지금은 상권이 죽고 인구가 점점 줄어 빈집이 늘어가고 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영산포 동정 거리/ 일본말로 ‘히가시마찌(東町)’라 불리던 이곳은 영산포의 번화했던 골목 중 하나다. 일본인은 수탈을 위해 영산포에 터전을 잡고 대지주가 되었지만 조선인은 소작농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지게 진 농민의 뒷모습이 유독 힘겨워 보이는 이유다. 번화했던 영산포 거리는 지금은 상권이 죽고 인구가 점점 줄어 빈집이 늘어가고 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근거지/ 나주에서 광주까지 가는 호남선 통학열차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불씨가 싹텄다. 열차 안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한국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과의 싸움으로 번졌고 이것을 시작으로 호남지역에서는 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나주항일학생운동기념관에서는 당시 나주 모습은 물론 독립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근거지/ 나주에서 광주까지 가는 호남선 통학열차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불씨가 싹텄다. 열차 안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한국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과의 싸움으로 번졌고 이것을 시작으로 호남지역에서는 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나주항일학생운동기념관에서는 당시 나주 모습은 물론 독립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영산포등대/ 지금은 ‘홍어의 거리’가 된 옛 영산포구 자락에 위치해 있다. 1915년 일제가 영산강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설치했는데 이제 배가 드나들지 않아 본래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내륙하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등대인 영산포등대는 저녁이 되면 여전히 불을 밝혀 수탈의 역사를 떠오르게 한다. 현재는 보존가치가 인정돼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이다일기자)

영산포등대/ 지금은 ‘홍어의 거리’가 된 옛 영산포구 자락에 위치해 있다. 1915년 일제가 영산강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설치했는데 이제 배가 드나들지 않아 본래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내륙하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등대인 영산포등대는 저녁이 되면 여전히 불을 밝혀 수탈의 역사를 떠오르게 한다. 현재는 보존가치가 인정돼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이다일기자)

문서보관소/ 일제가 문서보관소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 내부는 목조 양식으로 견고하게 지어졌다. 금성산업에서 사용하던 건물을 3년 전 지금의 집주인이 매입해 회사 겸 가정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집주인은 “오래된 건물이지만 습기가 전혀 차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졌다”고 건물을 설명했다. (이다일기자)

문서보관소/ 일제가 문서보관소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 내부는 목조 양식으로 견고하게 지어졌다. 금성산업에서 사용하던 건물을 3년 전 지금의 집주인이 매입해 회사 겸 가정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집주인은 “오래된 건물이지만 습기가 전혀 차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졌다”고 건물을 설명했다. (이다일기자)

병원이 된 동양척식주식회사/ 나주매일시장 입구에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았다. 높은 천장의 단층 구조였던 것을 2층 건물로 개조해 내부는 변형이 많이 된 상태다.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은 외과병원으로, 뒤편에 있는 관사건물은 나주곰탕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집주인 강재수씨는 “등록문화재로 예고돼서 오히려 맘이 편하다”며 “시에서 옛 모습을 잘 보존해 역사적 의미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다일기자)

병원이 된 동양척식주식회사/ 나주매일시장 입구에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았다. 높은 천장의 단층 구조였던 것을 2층 건물로 개조해 내부는 변형이 많이 된 상태다.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은 외과병원으로, 뒤편에 있는 관사건물은 나주곰탕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집주인 강재수씨는 “등록문화재로 예고돼서 오히려 맘이 편하다”며 “시에서 옛 모습을 잘 보존해 역사적 의미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다일기자)

주민의 증언/ “여기도 일본집, 저기도 일본집, 다 일본집이야~” 영산동 골목에 들어서자 주민 이환배(74) 할아버지가 마을을 설명해 준다. “이 앞은 일본 카페였고, 저 옆은 담배가게였지. 나도 그 ‘삐종’이라는 담배를 사려고 줄서고 그랬네. 어렸을 적에는 일본아이들과 골목을 뛰어다녔어. 여기가 예전엔 알아주는 번정통(번화가)이었는데 요로코롬 되버렸네.”라며 당시를 회상한다. (이다일기자)

주민의 증언/ “여기도 일본집, 저기도 일본집, 다 일본집이야~” 영산동 골목에 들어서자 주민 이환배(74) 할아버지가 마을을 설명해 준다. “이 앞은 일본 카페였고, 저 옆은 담배가게였지. 나도 그 ‘삐종’이라는 담배를 사려고 줄서고 그랬네. 어렸을 적에는 일본아이들과 골목을 뛰어다녔어. 여기가 예전엔 알아주는 번정통(번화가)이었는데 요로코롬 되버렸네.”라며 당시를 회상한다. (이다일기자)

일제시대 담배가게/ 영화 <장군의 아들>을 촬영했던 영산동 골목에 일제시대 담배가게였던 건물이 고스란히 남았다. 1970년대 큰 홍수가 나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면서 대부분의 집은 크고 작은 보수를 했다. 담배가게도 1층 대문을 빨간색 철문으로 고쳐 달았다. 일제시대 호남지역에서 알아주는 번화가였던 이 골목은 영산포구의 쇠퇴와 함께 빈집이 점점 늘어만 갔다. (이다일기자)

일제시대 담배가게/ 영화 <장군의 아들>을 촬영했던 영산동 골목에 일제시대 담배가게였던 건물이 고스란히 남았다. 1970년대 큰 홍수가 나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면서 대부분의 집은 크고 작은 보수를 했다. 담배가게도 1층 대문을 빨간색 철문으로 고쳐 달았다. 일제시대 호남지역에서 알아주는 번화가였던 이 골목은 영산포구의 쇠퇴와 함께 빈집이 점점 늘어만 갔다. (이다일기자)

영산동 가옥의 창과 처마가 전형적인 일본 양식을 띄고 있다. (이다일기자)

영산동 가옥의 창과 처마가 전형적인 일본 양식을 띄고 있다. (이다일기자)

일본식 가옥의 내부/ 주민의 양해를 얻어 비어있는 일본식 가옥의 내부로 들어갔다. 높은 천장과 긴 복도, 다다미방과 옷장 등이 영락없는 일본가정집 구조다. 윤상근(76)할아버지는 “여기에 다다미만 깔면 그냥 일본집이지 뭐. 사실 60년도 더 된 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게 신기해.”라며 집 구석구석을 설명해준다. (이다일기자)

일본식 가옥의 내부/ 주민의 양해를 얻어 비어있는 일본식 가옥의 내부로 들어갔다. 높은 천장과 긴 복도, 다다미방과 옷장 등이 영락없는 일본가정집 구조다. 윤상근(76)할아버지는 “여기에 다다미만 깔면 그냥 일본집이지 뭐. 사실 60년도 더 된 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게 신기해.”라며 집 구석구석을 설명해준다. (이다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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