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광이 없던 황금의 나라 신라 “신라유물에 쓰인 금은 경주 인근서 채취한 사금”

2014.06.10 06:05 입력 2014.06.10 06:07 수정
경주 | 도재기·백승목 기자

위덕대학 박물관 박홍국 관장 신라 황금에 대한 논문서 주장

삼국사기·총독부 문헌 연구스스로 사금 채취 방법 배워형산강 서쪽서 금 채취 ‘입증’수입 없이 신라의 수요 충당금제 장식드리개도 채취도구

신라는 흔히 ‘황금의 나라’로 표현된다.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금관을 비롯해 허리띠·귀걸이·목걸이·팔찌·신발·그릇 등 온갖 다양한 금, 금동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기 때문이다.

4세기 후반에 갑자기 시작된 신라의 황금 유물은 고구려, 백제의 금 관련 유물을 압도하는 것은 물론 같은 시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신라는 재료로 쓴 금을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했을까.

수많은 금, 금동제 유물의 원료인 신라 금의 공급구조는 아직 풀리지 않는 신라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여러 문헌자료상 경주와 인근 지역에는 금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라사 연구에서 금의 공급체계는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핵심 주제이지만 학계의 노력에도 불구, 관련 자료부족 등으로 뚜렷한 학술적 성과가 없는 실정이다.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의 사금 채취 장면.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의 사금 채취 장면.

박 관장이 경주 안강읍에서 채취한 사금.

박 관장이 경주 안강읍에서 채취한 사금.

■ 신라의 금 생산비밀, 풀리다

신라의 금은 ‘경주와 경주 인근에서 채취된 사금’이라는 내용의 논문이 발표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58)은 최근 ‘위덕대 박물관 논총’에 발표한 <신라 황금에 대한 소고-경주 및 인근 지역에서 채취한 사금을 중심으로>란 논문에서 “신라의 금 생산은 금광 운영이나 외부로부터의 수입이 아니라 사금 채취에 의존했다”고 밝혔다. 박 관장은 <삼국사기>, 조선총독부 문헌자료 등을 연구하는 한편 사금 채취방법을 직접 배워 경주와 인근 지역에서 직접 사금을 채취한 결과 신라의 금 산출지를 밝혀냈다.

박 관장은 논문에서 “경주 월성지역을 기준으로 40㎞ 이내의 형산강 서쪽 지역 일부만을 조사했음에도 불구, 모두 10곳에서 사금을 채취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본격 채취가 아닌 단 3개월간 학술연구 차원에서 채취해 확보한 금의 양은 적지만 신라의 금 생산이 사금 채취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했다.

경주와 인근 지역 중 사금이 채취된 곳은 경주시 내남면 1곳, 경주시 안강읍 3곳, 영천시 고경면 2곳과 자영면 1곳, 포항시 죽장면 1곳, 울주군 삼동면과 범서면 등 모두 10곳이다. 박 관장은 “이들 중 3곳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전국 1934곳의 사금산출지 지명과 강 이름을 기록한 자료 중 경주 관내의 4곳과도 겹친다”며 “사금 존재 여부를 확인한 것은 물론 일부 지역에선 혼자서도 하루 0.4~0.6g의 채취도 가능했다”고 밝혔다. 사금의 성분분석 결과 금 함유량은 75%(18K) 정도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신라는 사금 채취로 얻은 금으로 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을까. “현장조사 결과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박 관장의 결론이다.

그는 “당시에는 지금보다 사금 채취 환경이 100배는 좋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신라는 외부로부터 금을 수입하지 않고도 사금 채취로 충분히 수요를 충당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실제 토사의 퇴적, 각종 공사에 따른 강폭 축소, 댐·저수지·보의 조성 등으로 사금 채취 환경은 크게 열악해졌다.

박 관장은 “조선총독부 자료상에 나타나는 사금산출지와 그 양을 분석하면 통일신라 당시 신라영토 내의 사금산출지에서 하루 1g씩만 채취하더라도 하루 1㎏이 넘는 황금이 쌓이게 된다”며 “설사 당시 금광이 발견됐더라도 기술력 수준을 고려할 때 사금이 금광보다 경제성이 더 높은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이어 “대대적인 사금 산출지 탐색과 대규모 인력을 통한 활발한 채취 활동, 뛰어난 제련과 세공술 등으로 신라는 황금시대를 이어갔다”고 밝혔다. 당시 신라 지배층에게 영토 내 곳곳에서의 사금 채취 양상은 그야말로 ‘신천지의 엘도라도’였다는 주장이다.

신라의 화려한 금제 유물들 중 국보 191호인 ‘황남대총 북분 금관’

신라의 화려한 금제 유물들 중 국보 191호인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보 190호인 ‘천마총 금허리띠’.

국보 190호인 ‘천마총 금허리띠’.

■ 허리띠의 드리개는 사금 채취 도구

박 관장은 논문에서 금관과 함께 출토되는 금제허리띠의 장식 드리개가 “사금 채취 도구나 이와 관련, 깊은 사물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주장해 눈길을 끈다. 금관총·천마총 등에서 출토된 허리띠의 약통은 질병의 치료, 곡옥과 물고기는 다산이나 생명의 존귀함, 숫돌과 족집게는 금속제품 제작도구인 단야구 등으로 해석돼왔다. 그러나 박 관장은 “족집게는 사금 채취 활동의 필수 도구이며 약통은 사금통, 수실모양 장식은 사금 채취 활동에 필요한 솔을 형상화했다”고 밝혔다.

박 관장의 논문에 대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최맹식 소장은 “신라의 많은 금제유물 연구는 유물 자체를 분석하는 데 치우쳐 있으며 금의 출처나 허리띠 드리개의 연구는 없는 실정”이라면서 “박 관장의 논문은 향후 신라 금제유물 연구에 큰 기폭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방룡 부산시립박물관 관장도 “아주 재미나고 흥미로운 논문”이라며 “신라의 금 생산과정이나 허리띠 드리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앞으로 관련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 관장은 “직접 사금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어 좀 더 정밀한 연구를 할 계획”이라며 “신라의 금 공급체계 등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학술적 논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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