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식량위기? 반도체를 먹을 수는 없다"

2020.04.19 10:06 입력 2020.04.19 14:52 수정
이하늬 기자

코로나19 여파로 국제곡물시장에서 쌀·밀 등의 가격이 출렁이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쌀 가격은 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유통과 노동 인력의 이동 제한, 그리고 이로 인해 각국이 곡물 비축에 나섰기 때문이다.

세계 3위 쌀 수출국인 베트남은 지난 3월 자국의 곡물 비축을 위해 신규 수출 계약 체결을 중단했다. 캄보디아도 지난 4월 5일부터 흰쌀과 벼 수출을 금지했다. 러시아·카자흐스탄·우크라이나 등도 밀 수출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밀 수출국이다.

지난 4월 8일 오후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논에서 농민이 트렉터로 논갈이를 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지난 4월 8일 오후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논에서 농민이 트렉터로 논갈이를 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식량 부족 문제, 유통과 사재기 때문

이런 상황 때문에 ‘식량위기’ 이야기까지 나온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막시모 토레로 컬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식량 공급 붕괴가 4월과 5월 사이에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압돌리자 아바시안 FAO 수석이코노미스트도 “물자 이동이 어려워져 공급 쇼크가 올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하고 현재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이라고 지적했다.

식량의 절대량을 보면 FAO의 지적은 호들갑처럼 느껴진다. 올해 전 세계 곡물 생산량은 27억2060만 톤으로 예상 소비량(27억2150만 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곡물 재고량(8억6110만 톤)까지 더하면 식량은 부족하지 않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관계자는 “국제적으로 곡물 생산량과 재고에 문제는 없다”며 “다만 물류 유통 문제와 일부 사재기 국가들의 상황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식량의 절대량이 아니다. 절대량과 관계없이 식량위기는 일어날 수 있다. 세계적인 식량대란이 일었던 2008년 사례를 살펴보자. 당시 미국 시카고 선물거래소의 밀 가격은 사상 최초로 톤당 400달러를 찍었고, 콩 역시 처음으로 500달러를 넘었다. 그 전까지 밀은 100달러대 콩은 200달러대였다. 치솟은 곡물 가격은 요식업·가공업·공업 등 다른 부문에도 영향을 미쳤다. 곡물 가격이 치솟자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집트·멕시코·필리핀 등 34개국에서 식량과 관련된 집회 시위가 일어났고, FAO는 37개국을 식량 긴급 위기국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2008~2009년 밀의 생산량은 6억8300만 톤으로 소비량(6억3600만 톤)보다 많았다. 쌀도 마찬가지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쌀 생산량은 소비량보다 많았다. 당시 식량대란은 2012년이 되어서야 가라앉았다.

전문가들은 식량위기가 이런 방식으로 온다고 지적한다. 바로 식량의 가격탄력성 때문이다. 식량은 가격이 오른다고 해서 소비를 줄일 수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식량 생산량이 10%만 줄어도 가격은 30%, 50% 오를 수 있다. 조 글로버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 선임연구원은 최근 사태를 두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시장조사업체 피치솔루션스는 세계 식량 공급에 차질이 빚어질 경우,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을 나라로 한국·중국·일본과 중동을 꼽았다. “주요 수출국이 식료품 수출을 제한해 가격이 상승하는 가운데 해외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식량 수입에 막대한 지출을 감당해야 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사료용을 제외한 국내 곡물 자급률은 1965년 93.3%에서 2018년 21.7%로 빠른 속도로 감소했다. 그나마 쌀 자급률이 100%가 넘기 때문에 20%를 유지하고 있다. 콩은 25.4% 밀은 1.2%, 옥수수는 3% 수준이다. 세계 평균 곡물 자급률은 101%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수입에 의존하는 밀·옥수수·콩 등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옥수수의 경우 지금은 에탄올과 사료의 수요 감소로 낮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격이 오른다면 한국 식품시장에 영향을 줄 것이다. 과자와 빵은 물론이고 사료의 영향을 받는 고기와 달걀, 심지어 콜라에도 옥수수가 들어간다. 우리가 가진 게 없으니 외부 상황에 따라 가격이 출렁이는 것이다.

한국 자급률 22%… 밀은 1.2% 불과

이 같은 문제의식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유하고 있었다. 1990년대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 대표적이다. 당시 농민들은 수입밀 때문에 우리밀이 고사했으며, 앞으로 밀 가격이 폭등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 밀 자급률은 30%였지만 1950년대 미국 밀이 수입되면서 자급률은 곤두박질쳤고, 정부가 우리밀 수매를 중단한 1984년 이후에는 0%대로 떨어졌다.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이병훈씨(63)는 “밀 종자를 구하지 못할 정도로 자급률이 떨어져 있었다. 농촌진흥청 같은 곳에서 연구용으로 남아 있는 종자를 구해왔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는 “농산물이든 축산물이든 싼 가격으로 들어오면 생산기반이 무너진다”며 “그렇게 생산기반이 무너진 다음에는 농산물 가격이 올라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덧붙였다. 현재 우리 국민의 연간 밀 소비량은 32.2㎏으로 쌀 62.9㎏에 이어 두 번째다.

따라서 당장 위기가 없더라도 식량 관련해서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의 경우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약 61조원의 돈을 농업 부문에 풀었다. 프랑스는 “우리 모두 먹고살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연대가 필요하다”며 농장과 도시의 실업자를 연결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프랑스의 곡물 자급률은 181%, 미국은 125%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을 비롯한 농업계는 수십 년 전부터 ▲농업의 국가기간산업지정 ▲식량자급률 법제화 ▲농민수당 도입 등을 주장해왔다. 국가기간산업은 국민의 생존권과 직결된 산업을 일컫는다. 교통·에너지·보건·교육 등이 여기 속한다.

전농 관계자는 “위기가 닥친 것은 아니지만 이번 기회에 정부가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곡물 자급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을 좀 고려해야 한다”며 “예를 들어 농민수당은 농가 소득 안정은 물론이고 새로운 인력을 끌어들일 수 있다. 이는 곡물 자급률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독일·스위스·브라질 등이 다양한 명목으로 정부가 농가 소득을 보전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미국이나 유럽이 돈이 없어서 곡물 자급률이 높겠나. 농업이 중요하고 또 장기적으로 무기가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팔아서 먹거리 산다는 인식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비싸도 반도체는 먹을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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