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헌법상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2021.08.02 03:00 입력 2021.08.02 09:30 수정
박범계 법무부 장관

영화 <재심>의 한 장면. 희미한 불빛 아래 한 형사가 불러주는 진술을 다른 형사가 받아 적고 있다. 소년은 맞으면서 거짓 진술을 강요당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인권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 15세 소년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오토바이 배달을 하며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그는 택시기사가 살해된 거리를 지나던 목격자일 뿐이었다. 이 상황이 너무나 억울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

박범계 법무부 장관

영화의 배경이 된 약촌오거리 살인사건과 관련, 누명을 쓴 피해자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형사들은 잠을 재우지 않고 발바닥을 경찰봉으로 때리는 등 영화보다 더 가혹하게 대했다. 피해자는 강압수사를 못 이겨 허위자백을 하고 10년의 옥살이를 했다. 다행히 사건 발생 16년 만에 재심으로 누명을 벗었다.

사법연감 통계를 보면 연간 1000건이 넘는 재심사건 중 10% 내외의 사람이 무죄를 선고받는다. 2016년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중 대다수가 허위자백에 의한 경우라고 한다. 2000년대가 되어서도 자백 위주인 예전의 수사 관행이 여전한 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변호인이 도왔다면 약촌오거리 살인사건과 같은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찰 피의자 신문 절차에 변호인이 참여하는 비율은 약 1%에 불과하다고 한다. 반면 재판 단계에서는 그 비율이 약 54%에 이르는데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재판 단계와 달리 수사 단계에는 국선변호인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OECD에 속한 35개 국가 중 29개 나라가 수사 단계에서 국선변호인 제도를 도입했다. 피의자에 대한 국선변호 제공은 이미 국제 기준이 되었다.

약촌오거리 살인사건뿐만 아니라 이춘재 연쇄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사건, 낙동강변 살인사건,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등 수많은 재심 사건의 공통점은 피해자들이 소아마비, 지적장애, 미성년자, 노숙인 등 사회적 약자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약자들은 수사 초기에 제대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해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크고, 한번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된 수사는 재판에서 뒤집기가 매우 힘들다.

1999년 ‘삼례 나라슈퍼사건’ 1심 재판에 배석판사로 참여했다. 비록 주심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된 걸 알게 된 직후 억울한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을 국회에서 만나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들이 받은 상처와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오지 않을 만큼 마음이 아프다.

사회적 약자들이 수사 단계에서 인권침해를 당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국가가 수사 초기 단계부터 변호인을 선임해 줄 필요가 있다. 법무부는 미성년자, 70세 이상인 자, 듣거나 말하는 데 장애가 있는 자 등 사회적 약자들과 기초생활수급자 등 경제적 약자들에게 수사 초기부터 국선변호인을 선정해 주는 형사공공변호인 제도 도입을 추진해 왔다. 그 결과 지난달 13일 형사소송법 및 법률구조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입법예고했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헌법상 권리다. 형사공공변호인 제도가 도입되어 사회적·경제적 약자들이 수사 절차에서 실질적으로 변론을 받고, 수사 과정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인권침해가 방지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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