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을 넘긴 공정위의 퇴행

2023.01.27 03:00 입력 2023.01.27 03:03 수정

이명박 정부 시절 공정거래위원회가 ‘물가관리위원회’로 전락했던 적이 있다. 2011년 초 대통령이 물가관리에 신경을 써달라고 공정위원장에게 주문한 게 직접적 계기가 됐다. 물가당국이 아니란 내부 반발이 일자 “공정위가 물가기관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은 사표를 쓰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공정위는 결국 가격불안 품목에 대해 전면적 조사에 들어갔다.

오관철 경제에디터

오관철 경제에디터

물가를 잡으려는 정부 부처의 노력이 무슨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담합 등 불공정 사유가 없음에도 민간의 가격결정에 개입·간섭한다면 위법의 소지가 있고, 경쟁촉진이란 공정위 본연의 업무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보란 점에서 우려와 비판이 적지 않았다. 결국 국제적 전문지인 영국의 ‘국제경쟁저널’로부터 “한국 공정위가 외견상 이상한 정책 기조를 띠고 정책적 환경 변화의 영향을 받았다. 많은 시간을 가격통제에 투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정위가 얼마 전 화물연대본부를 검찰에 고발했다. 화물연대 파업의 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공정위 현장조사를 방해했다는 이유다. 화물연대가 과거 여러 차례 파업을 벌였지만 공정위가 공정거래법으로 제재하려는 시도는 처음이다. 노조 무력화에 혈안인 대통령의 행보에 맞춰 검찰의 힘을 활용하려는 공정위 수뇌부의 정무적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공정위의 화물연대 검찰 고발은 물가관리에 동원됐던 사례와 함께 공정위의 일탈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엉뚱한 일에 힘을 쏟으면서도 공정위는 정작 재벌 감시·견제를 위한 규제들은 화끈하게 풀고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명분으로 내건 규제 완화 사례는 나열하기 숨가쁠 정도다.

공정위는 지난해 조직개편을 통해 기업집단국 지주회사과를 폐지했다. 지주회사과는 지주회사의 설립·전환 과정을 관할하고 재벌 일감 몰아주기 등을 조사하는 부서다. 문재인 정부 초기 기업집단과가 국으로 확대되면서 신설된 바 있다. 감정적인 이전 정부 정책 뒤집기의 사례 중 하나로 보인다.

공정거래법 규제를 받는 대기업 집단 총수의 친족 범위는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에서 ‘4촌 이내 혈족, 3촌 이내 인척’으로 축소됐으며 대기업 집단의 의무 공시대상 내부거래 기준금액은 50억원 이상에서 100억원 이상으로 완화됐다. 내부거래는 일감 몰아주기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 이런 흐름 속에 재계에서는 경영권 승계 작업의 적기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있다.

공정위 소관인 공정거래법은 경제주체들의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부와 시장의 역할 구분, 경쟁 혹은 독과점의 경제적 영향 등을 두고 가치관과 철학의 충돌이 빚어지는 이념적 대결의 장이기도 하다. 정권교체기마다 공정위가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분명한 점은 공정위가 공정위답지 못할 때 신뢰를 잃었다는 점이다. 친재벌적 성향의 대통령 눈치를 봤던 공정위 모습은 과거에도 있었다. 하지만 재벌 기만 살리면 경제가 좋아질 것이란 낙수효과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공정위마저 휩쓸려선 안 된다. 규칙을 정하고 반칙 행위를 제재하는 규제기관의 성격상 공정위와 재벌의 긴장은 불가피하다. 경제적 약자를 울리는 원청의 횡포와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는 정권의 성격과 관계없이 척결되어야 할 과제다.

공정위는 출범 당시부터 숱한 재벌의 견제를 뚫고 성장해 왔다. 공정위가 펴낸 <공정거래위원회 40년사>를 보면 “1963년 삼분(밀가루·설탕·시멘트) 사건과 같이 국민생활 필수품에 대해 소수 대기업이 폭리를 얻는 독과점 폐해가 발생하자 1964년부터 공정거래법 제정 논의가 시작됐지만 시기 미성숙론과 재계의 반발 등으로 입법화되지 못했고 결국 1980년 12월에야 공정거래법이 제정됐다”고 적혀 있다. 1981년 4월 공정거래법 시행과 함께 집행기구로 설립된 공정위는 당시 경제기획원 소속 기관으로 출발했고 1996년에야 장관급 기관으로 격상됐다.

공정위 위상과 역할이 흔들리는 건 공정위를 두고 ‘기업하기 어렵게 만드는 조직’ ‘재벌 때려잡기에 혈안인 조직’으로 평가절하하는 편견이 뿌리 깊기 때문이다. 공정위 구성원들이 시장감독기구에 요구되는 전문성과 독립성을 쌓아오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어떤 정부에서건 공정위가 해야 할 기본적 역할이 있고 그것을 인정해야 하건만 이마저 이뤄지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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