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당선작- ‘글렌 굴드 이야기’

2008.12.31 16:40

소설부문/현진현

[2009 경향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글렌 굴드 이야기’

글렌 굴드(Glenn Gould)는 늘 자신의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녔다. 굴드의 이 거대하고도 미묘한 콘서트용 피아노는 배와 자동차, 비행기에 실려 주인과 함께 세계의 수많은 공연장을 누볐다. 굴드의 연주여행에는 이 스타인웨이 외에도 별도로 고용된 당대 최고의 조율사가 따라다니곤 했다. 콘서트 전날 밤이 되면, 피아노의 물리적인 속성을 빠짐없이 알고 있던 굴드와 그의 조율사는 스타인웨이를 완전히 분해했다 다시 조립하기도 했다. 굴드는 음의 높낮이를 정확하게 조율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연주방식과 연주할 작품에 맞추어 피아노의 기계적인 성격들마저 조율해버리곤 했다. 콘서트 직전에 이르면 굴드는 손가락의 마디마디까지 조율하기 위해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갔고, 손의 관절들이 충분히 유연해졌을 때를 기다려 자신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허락했다.

굴드는 데뷔한 이래 늘 과도하게 주목받는 피아니스트였으므로 그가 지구의 반대편까지 자신의 피아노를 대동한 채 연주여행을 다닌다거나 별도의 조율사가 연주여행에 동행한다는 사실은 그의 예민함에 대한 증거로써 널리 회자되었다. 그것이 예민함 때문인지 아니면 예술적 표현을 위한 것인지, 그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굴드는 늘 자신의 스타인웨이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고, 그러는 동안 지독한 인기와도 함께 했다.

회사가 이전하는 날 아침에서야 그 건물을 처음 보았다. 뵈, 레, 아, 삘, 뒹 - 건물의 입구를 장식하는 대리석 아치 위에 유려하지 못한 두꺼운 명조로 큼직하게 검정색 다섯 자가 박혀 있었다. 건물이 있는 거리는 80년대에 융성한 대학가였다는데, 대학들이 하나 둘 지방으로 옮겨간 탓인지 풀죽은 모습이 역력했다. 거리에는 다세대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교회, 유행을 좇지 못한 꾀죄죄한 맥줏집, 그네가 망가진 한적한 놀이터가 있었고 거리의 맨 끝에는 두 곳의 허름한 자동차 정비소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그리고 밀교의 십자가로 통할 것만 같은 전봇대가 촘촘히 서 있는 것이 퍽 인상 깊었다.

거리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뵈레아빌딩은 그 거리에서만큼은 단연 돋보였다. 5층짜리 건물 치고는 두드러지게 높았고, 몇 년 전 보수되었다는 외관은 국적을 알 수 없는 어정쩡한 것이긴 했지만 나름의 고풍스러움이 미워 보이지 않았다. 그 건물은 오랜 시간이 부여한 의젓함과 두터운 층위를 가진 비밀스러움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화방이 들어선 1층만큼은 연두색 타일이 외벽을 치장하고 있어 현대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고, 무역회사가 입주해 있는 2층과 3층에는 두 개씩 테라스가 딸려있었는데 그 테라스들이 건물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결정짓고 있었다. 긴 테라스에 부조로 형상화된 장미넝쿨은 비록 철근과 시멘트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제법 정교해서 그다지 조잡해보이지 않았다. 4층과 맨 위층인 5층, 다른 층보다 천장이 높아 보이는 두 개 층이 회사가 이전할 곳이었다.

직원들은 이삿짐이 든 박스를 든 채 건물 입구에서부터 수군거리고 있었다. 짐을 빼곡히 실은 낡은 엘리베이터를 올려 보내고 나서야 그 수군거리던 소리가 분명해졌다. 직원 하나가 오래 전 그 건물에서 <7인의 사무라이>를 보았다고 말하고 있었고 나이든 축들이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술영화나 상영이 금지된 영화 따위를 상영하던 작은 극장으로 뵈레아빌딩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교적 젊은 몇몇의 기억은 달랐다. 그들의 과거 속 뵈레아빌딩은 잘 나가던 미술학원이 몰려있던 건물이었다. 학원비가 비쌌던 탓에 그 건물에 있던 학원 대신 외진 곳의 허름한 학원을 다녔다는 이야기, 또 당시 그 건물의 한 학원에서 데생을 가르치던 여대생이 얼마 전 파리에서 죽은 유명화가라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 오갔다. 시끌벅적하던 참에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왔다. 뒤늦게 도착한 김 이사가 먼저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건물의 주인이 사장의 새로운 아내라고, 알고들 있으라는 듯 뇌까렸다. 갑자기 좁은 엘리베이터 내부에 여자의 향수냄새 같은 것이 나는 것도 같았다.

내가 보기엔 그 건물이 애초 극장이나 미술학원을 위해서 지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바닥의 패턴부터, 조명의 위치, 계단의 각도 같은 것들을 비롯해서 건물의 많은 부분들이 흔히 보는 익숙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 건물은 뭐랄까, 어떤 사람의 개인저택 같은 인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건물이 처음 들어서던 때의 용도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척이나 느린 엘리베이터는 4층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다. 4층은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천장이 훨씬 더 높았을 뿐 아니라 넓이 또한 짐작을 웃돌았다. 4층에서 5층으로 가는 계단은 안과 바깥 두 군데에 있었다. 내부의 계단에는 온갖 박스들이 뒹굴고 있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 둘 때까지도 그 통로는 늘 그렇게 지저분했다. 5층으로 가는 바깥계단 역시 특이하게 널찍해서 나는 그 계단의 난간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곤 했다.

일러스트 | 최수진작가·<베트남그림여행> 저자

일러스트 | 최수진작가·<베트남그림여행> 저자

회사는 내게 두 번째 직장이었다. 지방의 2년제 대학에서 그래픽 작업에 소용되는 컴퓨터 기술을 배웠고, 졸업 후엔 프리랜서로 일하는 선배 밑에서 꼬박 2년 동안 일을 거들며 푼돈을 받았다. 그러다 제대로 취업을 한 곳이 그 회사였다. 광고회사인지라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오전 열한 시는 넘어야 대부분이 출근했고, 대신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퇴근들을 했다. 하긴 선배와 일을 할 때도 딱히 출퇴근 시간이란 게 없긴 했었다. 어쨌건 알량한 자유로움은 기꺼이 누릴 수 있었지만 조직에서의 일상이 주는 중압감이 나를 무척이나 피곤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회사의 일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광고주로부터 직접 발주를 받아 스스로 광고를 만드는 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대형 광고대행사로부터 컴퓨터그래픽 작업을 도급받아 말 그대로 ‘그림’만을 만드는 일이었다. 회사의 주된 일은 후자였다. 나는 그저 그림을 발주한 광고대행사 소속 아트디렉터의 지시를 받고 충실하게 이행하면 그만이었다. 때로는 파일로 전달된 광고카피들을 그림 위에다 배치하는 것까지가 나의 일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옮겨내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작업을 하다말고 나는 문득문득, 징그럽게 생긴 약을 어쩔 수 없이 삼키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때로 위로가 되는 건 이미지들을 변형하고 조작하면서 느끼는, 창조자의 조수가 된 것만 같은 쾌감이었다. 유명한 여자배우의 얼굴을 성형하고 세계적인 가수의 키를 키우는 사이 그럭저럭 5년이 지났고, 회사가 규모를 넓혀 이전하는 대열에 나도 끼게 된 것이었다.

카피가 인쇄된 서너 장의 종이, 하얀 키들과 투명한 틀로 만들어진 키보드… . 타이핑을 시작하자마자 카피들은 모두 거짓말이 된다. 카피를 고친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고쳐낼 뿐, 연주자가 악보를 확인하듯 카피의 문장부호에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자음, 모음, 대문자, 소문자, 한 자, 한 자, 또박, 또박, 키를 누른다. 시프트 키를 누르고 기호를 친다. 마침내 종이에 인쇄된 문자들을 한 자도 빠짐없이 모니터 속으로 옮겨 넣는다. 다시 타이핑 ……. 그러다 나는 그만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클라이맥스에 타건(打鍵)을 하듯 스페이스 바를 깊이 누른다. 상체가 리듬을 타고 멜로디의 흐름에 반응한다. 수십 개의 모니터와 수십 개의 컴퓨터들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가 역겨워진다. 창을 열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저 창을 쳐다볼 뿐이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면 모니터는 푸른 바다를 펼쳐 보인다. 나는 정말 피아노를 연주한 셈이 된다.

5층에는 사장의 방만 있었다. 회의실 하나 정도 있을 법 했지만 널찍한 사장의 방이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5층에는 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사장은 회사에 머무는 날이 드물었다. 회사가 이전한 후 사장은 출근하는 날보다 그렇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소문대로라면 한 보수정당의 아랫자락을 기웃거리는가 보았다. 대부분의 일처리는 사장의 오랜 친구인 김 이사가 맡고 있었고 그런 까닭에 김 이사만이 사장을 만나기 위해 종종 5층을 드나들었다. 다른 직원들이 5층을 드나들 일은 거의 없었다. 나 또한 담배를 피우기 위해 드나들던 바깥 계단에서 5층의 내부를 가끔 쳐다볼 뿐이었다.

5층에 사장의 방 말고도 방 하나가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회사가 이전한 지 한 달은 지나서였을 것이다. 그때는 그곳을 그저 잡다한 물건들을 넣어두는 창고쯤으로 생각했다. 문 때문이었다. 얼핏 보아도 건물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문이었다. 그 문은 내부가 창고라 하더라도 참 보잘 것이 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조그만 여닫이문이었다. 빛바랜 페인트가 너덜너덜하고 장석은 전체가 녹이 슬어 버려진 쪽문처럼 못나 보였다. 내가 그 문을 열어볼 이유는 없었다.

그 문을 열어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초저녁이면 언덕 아래에서 훈풍이 불어오곤 했으니 이전한 지 서너 달 정도가 지난 초여름이었다. 체온이 느껴지는 그런 바람은 마음 깊은 곳까지 설레게 만들게 마련이어서 일거리가 잔뜩 쌓여있었지만 기분만은 썩 좋았던 기억이 난다. 아주 늦은 밤 나는 담배를 피우다말고 그 바람을 느끼기 위해 5층까지 올라가 있었고, 그날따라 문득 그 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내 관심이란, ‘저 쪽문은 뭐지?’, ‘저 창고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하는 정도였다. 굳게 잠겨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 문은 놀랍게도, 손잡이를 당기자마자 열려 버렸다.

그곳은 누군가를 위한 연습실인지도 몰랐다. 퍼뜩 그런 생각이 스쳤다.

피아노는 광목으로 덮여있었다.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긴 했지만 광목의 실루엣은 인상적이었고 나는 그것이 틀림없는 콘서트용 그랜드피아노임을 기억해냈다. 피아노는 동쪽의 창을 등지고 있었는데 피아노와 창 사이에는 낡은 나무의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거리의 가로등이 눅눅한 오렌지 빛으로 하얀 광목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천을 벗겨냈다. 그것은 스타인웨이였다.

검게 빛났다. 자욱하게 먼지가 날렸지만 나는 그것이 스스럼없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와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떨고 있었을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피아노가 빛나는 바람에 섣불리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만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어림잡을 수 없었다. 껌벅대던 가로등이 꺼져버렸고, 가로등 뒤로 낡은 네온사인들이 색 바랜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는 왠지 을씨년스러워 라이터를 켠 채 방을 둘러보았다. 라이터를 껐다 켜기를 몇 차례 반복하는 사이 사물들이 서서히 제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는 전구를 떼어낸 흔적이 남아있었고 그 흔적 옆으로 전선 같은 것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그곳은 제법 넓은 곳이었다. 콘서트용 피아노 한 대가 있고도 텅 빈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북쪽 벽에는 10호 크기의 유화 한 점이 액자도 없이 캔버스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림은 온통 흰색 물감으로 덮여 있었다. 추상화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갔을 땐 함박눈이 내린 작은 마을을 볼 수 있었다. 마을의 집들은 눈에 덮여있고 오직 근경의 굴뚝 하나가 치솟아 있었다. 그 굴뚝이 작은 마을을 이국적인 느낌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동쪽의 창은 그 방의 유일한 창이었다. 오래된 교회에나 있을 법한 모양새를 지닌 쇠로 만든 아주 작은 창이었다. 그 창의 창틀 역시 그 방의 문에 달린 장석처럼 심하게 녹이 슬어 손이 닿기만 해도 시큼한 느낌이 들었다. 얇긴 했지만 유리는 멀쩡했다. 손잡이를 젖혀서 밀어 올렸더니 훈훈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틀에서 벗겨진 페인트 조각이 툭 툭 떨어졌다. 창밖 아래로 쓰레기 더미가 쌓인 좁은 골목이 내려다보였다.

나는 창문을 고정시킨 후 가만히 선 채 피아노를 쳐다보았다. 피아노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대해 곱씹어보려 했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피아노는, 다만 아름다웠다. 나는 피아노로 다가가 건반덮개를 열어 보려 했다. 하지만 손을 대는 순간, 그 경외감이란 ……. 무언가 내 머리부터, 어깨를, 팔을, 손목을, 손가락의 끝을 짓누르는 것만 같은 감정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 방을 나오고 말았다.

이튿날 이른 아침, 그 방에는 작은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피아노의 번쩍이는 검정빛에 휘둘려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찬찬히 피아노를 살펴보았다. 피아노는 꽤 오랫동안 방치된 듯했다. 곰팡이 같은 것들이 피아노의 다리며 발에 슬어있었다. 하지만 50년대에 생산된 피아노치고는 번듯한 편이었다. 피아노의 명판에는 모델명이 선명했다. CD318이었다. 문득 굴드의 피아노가 떠올랐다. 하지만 굴드의 318은 -제작번호가 174번이었던 그 318은- 1957년, 연주회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트럭에서 떨어져 망가져버렸다는 사실이 겹쳐 떠올랐다. 나는 준비해간 수건으로 피아노의 건반덮개를 닦았다. 그리고 살며시 덮개를 들어 올렸다. 여든 여덟 개의 건반이 눈앞에 펼쳐졌다. 건반은 티 없이 깨끗했다. 조심스럽게 건반 하나를 오른쪽 엄지로 눌러보았다. C음이 높은 천장을 돌아 넓은 방을 휘감았다.

내친김에 나는 나무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삐걱대고 있었다. 나는 평균율(The Well-tempered Clavier)의 유명한 프렐류드를 치기 시작했다. 음계가 삐걱대고 있었다. 엉망이었다. 피아노는 조율이 안 되어 있었고, 내 손가락들은 너무나 굳어버려서 음에 맞는 건반을 누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손의 기억을 빌려, 막 배우기 시작한 걸음마처럼 한 음씩 내디뎌 평균율의 제1곡을 푸가(Fuga)까지 연주하고 말았다. 아름다운 소리였지만 스타인웨이답지 않은 무거운 음색이었다. 나는 다시 스카를라티의 짧은 소나타를 연주해보았다. 스타인웨이는 조금씩 무거움을 덜어내며 빛나는 소리로 바뀌어갔다. 아침 해가 구름에 가린 것인지 온 방안이 석양처럼 붉어졌다. 보면대에 비친 태양이 눈에 부실 듯 말 듯 시야를 괴롭히는 바람에 나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그제야 그 스타인웨이의 건반이 마치 굴드의 318처럼 아주 가볍게 세팅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굴드처럼 어깨를 구부리고 팔은 들어 올린 채 건반을 두드려 보았다. 황홀했다. 손가락 끝이 닿자마자 건반은 가볍게 해머를 움직였고 해머는 현을 내려쳤다. 연주를 할수록 피아노의 기계적인 부분들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페달도 문제없었다. 현 하나가 끊어져 있었지만 그다지 대수롭지 않았다. 그 방은 왠지 슈만과 잘 어울릴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다시 바흐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내 눈이 악보를 읽으면 음의 가치가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뇌는 다시 내 양손으로 음가를 옮겨낸다. 낮은 성부와 높은 성부, 내 두 손은 명징한 소리를 기도하며 건반을 누른다. 해머가 현을 때린다. 현의 떨림은 공기에 파장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주파수들이 내 귀를 통해 다시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다시 나의 몸과 마음을 자극한다. 내 마음과 내 머리와 내 손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다. 공기 속으로 음들은 자유롭게 순회하고 있다. 순회하는 음들은 모두 내 것이다.

그해 여름, 나는 해가 뜰 무렵부터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는 열 시 무렵까지 그 방에 있곤 했다. 가끔은 늦은 밤도 좋았다. 하루는 콘서트 무대에 선 양 용기를 내어 피아노 몸체의 덮개를 열고 연주를 해 보았다. 페달을 밟고 코드를 누르는 순간 아주 큰 소리가 났지만 극장의 전력(前歷)으로 어느 정도 방음이 되고 있었던 탓이었을까, 그 방의 문을 두드리거나 열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번의 우스꽝스러운 예외가 있긴 했다. 그 예외란, 늦은 밤 기획팀의 대리 하나가 여자 부장의 가슴을 움켜진 채 그 방의 문을 밀치며 뛰어든 일이었다. 어둡지 않았다면 그들은 바로 나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길거리의 네온 조명만 비치고 있던 그 방에서 그들은 서로의 몸을 만져가며 쉬지 않고 입맞춤을 나눌 뿐이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라이터를 켜는 소리에 놀란 그들은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다음,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취한 발걸음을 돌려 방을 나가고 말았다.

그 여름의 막바지 온 세상이 더위에 휩싸인 어느 날 ‘행복해진 나를 발견했다’라고 일기장에 써 넣었다. 스타인웨이라는 값비싸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피아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방에 들어서면 마치 수백 명의 관객이 들어찬 명성 높은 콘서트홀의 무대에 올라선 것만 같았다. 가끔 스타인웨이와 나란히 무대 위에 서서 청중의 표정을 여유롭게 돌아보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연주는 점차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바흐를 연주하고 나면 청중은 어김없이 브라보를 외쳐댔다. 커튼콜을 받은 나는, 골드베르크변주곡의 아리아를 한 음, 또 한 음 느릿느릿 정성들여 연주하곤 했다. 그런 상상 속에서 나는 그 시절을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나의 어린 피아니스트 시절 말이다.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시작했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그만두었다. 나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는 아니었다. 연습에 매진하는 쪽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한 연습 덕분인지 누구에게나 칭찬을 들었고 언론에도 오르내렸다. 그만 둘 무렵에는 국내 최고의 선생으로부터 레슨을 받으며 유학을 앞두고 있었다. 국내에 한정되긴 했지만 크고 작은 몇 개의 콩쿠르에서 우승해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공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나는 콩쿠르에 참여했던 다른 신동들과 달리 점점 더 피아노가 좋아지고 있었다.

나를 피아니스트로 만든 건 아버지의 레코드들이었다. 내가 피아노를 그만두기 직전까지도 아버지는 퇴근길에 중고레코드를 한아름 사오시곤 했다. 그 이름도 찬란한 아르투르 베네디티 미켈란젤리,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밀 길렐스, 클라라 하스킬,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글렌 굴드 ……, 모두 빛나는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내가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은 레코드는 대부분 굴드의 것들이었다. 유학이 결정되던 날엔, 어쩌면 굴드를 직접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내가 굴드를 특히 좋아했던 건 아주 어릴 적 들었던 그의 연주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내가 막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는 이따금 서재의 책상머리에 놓인 카세트레코더로 음악을 들으셨다. 헨리 맨시니나 폴 모리아가 지휘하는 관현악곡들이 많았을 테지만, 한잔 하시는 날엔 어김없이 빛나는 피아노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굴드와 스타인웨이가 빚어내는 소리였다. 그때 이미 굴드만의 독특한 스타카토의 묘미에 익숙해져 버린 건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골드베르크변주곡의 스물다섯 번째 변주를 예닐곱 번씩 반복해서 듣곤 하셨다. 그 멜로디를 잊을 수 있을까.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클리셰 같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내 방에 놓인 피아노와 거실에 있던 오디오에 빨간 딱지가 붙었다. 나는 집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날은 레슨이 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에도 나는 레슨을 받으러 가지 않았다. 레슨을 해주던 선생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피아노가 없는 집은 좀 어색했지만 내가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쫓기듯 이삿짐을 싸기 전까지 나는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나뒹구는 악보들을 넘겨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피아노를 포기해야 했던 것은 물론이었고, 한동안 그 누구의 연주든 모든 피아노소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견딜 수가 없었다. 골목 어귀에서 흘러나오는 서투른 솜씨의 피아노소리를 듣는 것조차 힘겨운 때가 있었다. 피아노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건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지방의 학교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통학버스에서였다. 나이 지긋한 운전기사가 슈만을 들려주었다. 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버스에서 마지막 학생이 내릴 때까지 미켈란젤리의 피아노소리를 들었다. 기사는 미켈란젤리의 팬이었나 보았다.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기사는 미켈란젤리의 슈만과 드뷔시를 들려주었다. 며칠 뒤 나는 휴대용 CD플레이어와 굴드의 골드베르크변주곡 CD를 살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스무 살 남짓까지의 내게, 음악은 보이지 않는 뼈를 가진 물 같은 것이었다.

일러스트 | 최수진작가·<베트남그림여행> 저자

일러스트 | 최수진작가·<베트남그림여행> 저자

스타인웨이가 사라졌다.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악보를 가득 안고서 그 방의 문을 열었을 때 스타인웨이는 없었다. 스타인웨이가 있던 자리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먼지가 깔려 있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그 방에서 바흐의 푸가들을 연주했고, 오후에는 집근처 한 신학대학의 구내에 있는 음악전문서점에서 바흐의 악보들을 골랐다.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냥 집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스타인웨이가 사라졌다.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오히려 그 크고 무거운 피아노를 어떻게 가져갔을까 하는 의문부터 들었다. 꿈에서 봤던 곳을 꿈에서 깨어나 다시 둘러보는 것만 같았다. 피아노는 어떻게 그 방을 들고 날 수 있었을까? 그 방의 출입문은 터무니없이 작았고 창 또한 아주 작았다. 피아노를 발견했을 땐 그런 의문조차 들지 않았던 것도 이상했다. 그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글렌 굴드와 그의 조율사가 분해를 해서 들고난 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짐작을 해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때 내가 그 이상한 사건에 대해서 얼마간의 여유가 있었던 건, 왠지 모르게 피아노가 그 방으로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희망부터 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로부터 며칠 동안을 줄곧 굴드가 연주한 레코드들을 들었다. 어찌됐든 스타인웨이를 계속 즐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5층의 그 스타인웨이가 그리운 것은 당연했다.

피아노가 사라진 후 그 방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아노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물론, 누군가 사라진 피아노에 대해 말을 꺼낸다든가 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아노는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아침저녁, 그리고 시시때때로 그 방을 찾아 피아노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피아노가 사라지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건물의 관리인과 1층 화방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피아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또 그동안 피아노를 치워버리진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에 혼자서만 간직했던 피아노의 존재를 김 이사에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는 5층에 방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5층에 방이 또 하나 있었어? …… 아, 그 창고? 난 안 들어가 봤는데? 거기 뭐가 있었다고?”

굴드의 예민함에 비견될 만한, 그의 연주에 대한 청중들의 집요하리만큼 민감한 반응은 그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모든 기간 지속되었다. 토론토 외곽 작은 마을의 눈 덮인 작은 집을 떠나 그만의 피아니즘을 세상에 처음으로 내보였을 때는 물론이고,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예가 자신이 살던 도시의 명성을 넘어섰을 때, 또 노년에 CBS의 스튜디오로 돌아와 골드베르크변주곡(Goldberg Variations)을 다시 레코딩 해 추억의 스펙트럼을 진일보시켰을 때에도 사람들은 변함없이 그의 피아니즘에 긴 박수를 보냈다. 게다가 광적인 부류의 팬들은 그의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벌써 그의 연주를 목말라하기도 했다.

굴드는 두 번의 은퇴를 했다. 첫 번째 은퇴는 콘서트무대에서의 은퇴였다. 굴드는 단호하게 콘서트 무대를 버렸다. 그것은, 청중의 열렬한 호응에 일곱 번의 커튼콜을 받고서도 더 이상의 연주는 정중하게 거절하고야마는 그의 완고한 제스처와 비슷했다. 굴드의 두 번째 은퇴는 북아메리카에 백년만의 추위가 올 것이라 떠들어대던 해의 어느 가을날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콘서트를 그만두는 것에 이어 레코딩마저 그만두는 죽음으로써의 은퇴였다. 완전한 은퇴였을까? 그것은 실패였다. 그의 죽음은 그의 명성을 북미와 유럽을 넘어 남미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까지 알린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때 스타인웨이의 명성도 함께 바다와 산맥을 넘었다.

요컨대 글렌 허버트 굴드(Glenn Herbert Gould)는 1932년 9월25일 태어나, 1982년 북아메리카의 역사적 추위로 기록된 겨울이 닥쳐오기 전인 10월4일 세상을 떠났다.

미친 듯 두드리다가 다시 흐느끼듯 흘러내리는 내 두 손과, 그 손들을 제어하는 내 이성을 통해 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내 삶을 드러낸다. 그것이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 내 눈앞에는 삶의 의미가 어른거린다. 나, 나의 손, 피아노 건반, 피아노 줄, 소리, 그리고 동향의 공간. 방의 모든 사물은 시간을 틈타 서로를 탐하고 있다. 아! 그런데 나와 세계의 매개가 사라졌다. 내가 표현되는 방식은 상상으로 그칠지라도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

내가 기도했던 연주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나는 나를 둘러싼 일상 속에 머물러 있었으면 될 뿐이었을지도 몰랐다. 어디를 둘러봐도 구원 따위는 없다는 것을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 삶의 손에 잡히는 형체, 다만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내게 분명했던 것은 오직, 내가 사는 방식이 점점 더 내게 익숙하게 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피아노가 사라졌다는 것, 그것이 반드시 불운한 것은 아니었다. 나빠진 것은 없었다. 나는 감상적인 고민에 빠진 것만 같았다.

며칠 간의 짧은 휴가를 내고 좁은 내 아파트로 돌아왔지만 재미없는 TV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거나 이불을 뒤집어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전히 회사로 달려가 스타인웨이의 부재를 다시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심심치 않게 찾아들었을 뿐이었다. 휴가를 하루 남겨 둔 날 정오쯤, 끈질긴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 말이다. 옛 여자 친구였다. 수화기를 든 나는 그 길로 그녀와 길고 긴 잡담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가끔 기중기로 굴드의 피아노를 들어 올려 비행기의 조종석에 집어넣는 장면을 상상한다. 검정색 스타인웨이가 삐걱대는 목조 기중기에 매달리면, 머리가 뭉툭한 거대한 여객기는 전투기인 양 조종석 덮개를 열어젖힌다. 인간의 뇌에 손톱만한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듯, 기중기는 여객기의 머리에 스타인웨이를 안착시킨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글렌 굴드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것은 내가 본 그의 사진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굴드는 하얀 눈밭에 서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그것뿐이었지만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굴드 뒤로 보이는 광활한 눈밭에 눈이 빨간 토끼들이 뛰어다니는 장면이 눈에 그려지곤 했다. 굴드는 사진처럼 충분히 고독했다. 그래서 슬펐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서른다섯 해 동안 지녔던 그런 슬픔과는 달랐다. 하기는 굴드가 연주한 모차르트는 늘 악평에 시달렸다. 평론가들은 굴드만의 곡 해석과 타건이 오직 바흐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을 말하자면, 굴드는 모차르트식의 슬픔과 대면할 필요가 없었다. 굴드 또한 모차르트처럼 음표 뒤로 무엇인가를 감추었지만 그것은 슬픔을 넘어서는 다른 성질의 무엇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굴드는 골드베르크변주곡을 제외하고는 같은 곡을 두 번 이상 레코딩하지 않았다. 굴드는 그런 식으로 연주를 하는 자신의 개성을 깊이 존중했다. 그와 더불어 자신의 연주를 표현해주는 스타인웨이의 개성 또한 존중했다. 나아가 두 개의 중첩된 개성을 받아들이는 청중의 개성까지도 굴드는 존중했다. 그리고 굴드는, 자신 역시 한 명의 청중이었으므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연주를 사랑했다. 그에게 있어 연주는 자신이 살아가는 삶 자체였고, 그 소리를 만드는 과정은 자신이 살아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적어도 굴드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방식 가운데 하나임에 분명했다. 말하자면 그의 예술은 그의 삶에 불과했다.

피아노가 사라지고 해가 바뀌어 다시 초여름이 되었을 무렵, 나는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 방을 얻어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내 방 안에는 풀지 못한 이삿짐이 박스째로 가득했는데 그 속에 악보 따위는 없었다. 악보들을 어디에다 둔 건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해가 무척이나 드셌던 그 즈음의 어느 날 아침, 나는 우연히 그리고 오랜만에 5층의 그 방 앞을 지나게 되었다. 무심코 걸음을 옮기던 나는 그 방의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았고 누군가 그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척이나 놀랐지만 걸음을 돌려 문 앞으로 다가간 나는, 스타인웨이가 있던 그 자리에 머리가 벗겨진 한 노인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도 늙어버려 겨우 얼굴을 알아 볼 만한 글렌 굴드였다.

* 이 소설에 등장하는 글렌 굴드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들은 굴드를 중심으로 미켈란젤리, 호로비츠 등 20세기 중후반을 풍미한 피아니스트들의 일화들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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