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밝혀진 체부동 염상섭 생가터… 그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2013.10.20 21:57 입력 2013.10.22 18:51 수정

염상섭 문학제 마지막 행사

“지금 여러분이 서 계신 자리가 어딘지 아세요? 체부동 106의 1번지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이죠. 예전에는 이곳 체부동·필운동·내자동·적선동 일대를 통틀어 필운방이라 불렀습니다.”

19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종로구 체부동. 배우 이대연씨가 미리 준비한 대사를 읊었다. 갈색 양복에 중절모와 뿔테 안경을 쓴 이씨는 ‘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의 작가인 횡보 염상섭(1897~1963)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작가의 50주기를 맞아 경향신문과 한국작가회의 한국문학유산사업추진단(단장 정우영·시인)이 공동 주최한 ‘2013 염상섭 문학제’의 마지막 행사인 문학기행 ‘횡보와 함께 걷는 하루’가 열린 날이었다.

“횡보라는 제 호는 ‘옆으로 걸으며 온 세상을 돌아다닌다’는 ‘횡행천하(橫行天下)’에서 따온 것인데요. 술을 먹고 옆으로 걷는다는 뜻도 있고 세상을 삐딱하게 본다는 뜻도 있어요. 어찌보면 제가 평생 삐딱한 시선으로 삐딱하게 걸어왔다고 할 수 있으니 나름 걸맞은 호라고 생각합니다.”

사후 50년 만에 환생한 작가 염상섭으로 분한 연극배우 이대연씨(오른쪽)가 서울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있는 염상섭 묘소에서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일인극을 하고 있다.

사후 50년 만에 환생한 작가 염상섭으로 분한 연극배우 이대연씨(오른쪽)가 서울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있는 염상섭 묘소에서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일인극을 하고 있다.

작가의 생애를 따라가는 문학기행은 체부동 생가터에서 출발해 염상섭의 모교인 보성중학교가 있던 조계사 경내, 동상이 세워진 삼청공원으로 이어졌다.

이날 행사에는 원로 문학평론가 임헌영씨(민족문제연구소장), 아동문학가 김이구씨 등을 비롯해 30여명의 문인·시민·학생이 참가했다.

염상섭의 생가터를 확인한 것은 이번 문학기행의 가장 큰 수확이다. 횡보의 생가는 ‘서울 종로구 필운동 야조현 고가나무골’이라고만 알려져 있었을 뿐 정확한 위치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문학유산사업추진단의 고영직 문학평론가, 이민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오창은 중앙대 교수 등이 기초 자료 조사 및 두 차례 답사로 얻은 정보를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서울 고지도와 비교해 횡보의 생가터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체부동 106의 1번지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정우영 단장은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사실”이라며 “오늘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곳에는 빌라가 들어서 있다.

염상섭은 11세 때 관립 사범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친일적인 학풍에 반발해 2년 만에 자퇴하고 보성소학교로 전학한다. 이곳을 졸업하고 보성중학교로 진학했다. 염상섭이 교토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다녔던 보성중은 현재 조계사(서울 종로구 견지동) 내 불교중앙박물관 자리다. 기행단은 이곳을 거쳐 삼청공원 동상 앞에서 점심 식사를 한 뒤 서울 중구 소공동으로 이동했다.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옆 골목은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낸 염상섭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공간이다. 그가 일하던 시절 경향신문 사옥은 일제 말 조선은행 지폐를 인쇄하던 근택인쇄소의 후신인 조선정판사 건물이었다. 1946년 5월 정판사가 조선공산당 위폐 사건에 휘말려 문을 닫은 뒤, 그해 10월 천주교 서울교구가 경향신문을 발행하면서부터 경향신문 사옥으로 사용됐다. 이 건물은 1974년 경향신문이 중구 정동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한일은행 사옥으로 사용되다 1980년 주변 일대가 서울시 재개발사업지구에 편입되면서 철거됐다. 염상섭은 해방 후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시기에 정파성을 지양하는 중도 노선과 공명정대한 사실보도를 강조했다.

이 시기 횡보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살았다. 고영직 평론가는 “해방 후 극심한 주택난으로 사대문 안에 집을 구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돈암초등학교 앞 동소문동 주택가다. 이곳을 거쳐 문학기행은 오후 5시쯤 염상섭의 묘가 있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서 마무리됐다. 염상섭은 1963년 3월14일 직장암으로 별세했다.

염상섭은 수주 변영로(1897~1961), 공초 오상순(1894~1963) 등과 함께 당대 문단의 ‘주선(酒仙)’으로 불릴 만큼 술을 좋아했다. 죽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도 아내가 숟가락에 떠준 소주를 받아 마신 것이었다. 소설가 전영택(1894~1968)은 당시 장례식에서 읽은 조사에서 “비록 만년이나마 너무 가난에 시달리지 않고 어느 정도 안락한 생활을 하시도록 했어야 할 것인데 불행히 그의 숙환의 몸을 늦게야 메디컬센터로 옮기며 치료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작고하셨다는 점은 참으로 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후배 문인들은 묘석 앞에 소략한 제사상을 차려 술을 따르고 절을 올렸다. 횡보로 분한 배우 이대연씨의 마지막 대사는 기행 참가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오늘 아주 좋은 날씨에 여러분 덕분에 가을 소풍을 나왔다가 갑니다. 제 후배 문인 중 천상병이라는 시인이 인생을 소풍에 비유하면서 ‘내 생애 소풍 끝나는 날 웃으면서 잘 놀다간다’고 얘길 했다지만 저도 마찬가지네요. 한 세상 잘 살고 갑니다. 이만 작별할 시간입니다.”

이날 문학기행은 문인 유산 보존에 대한 아쉬움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자리였다. 서일대 문예창작학과 1학년 김민수씨(20)는 “염상섭의 흔적이 제대로 보존된 곳이 없어 솔직히 그의 존재가 가슴에 크게 다가오진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생가터는 이번에야 밝혀졌고, 돈암동 집터는 위치조차 불명확하다. 1996년 만들어져 2009년 삼청공원으로 옮겨진 염상섭 동상 표지석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가터 부근에 이 상을 세운다”고 했으나 엉뚱한 자리에 있다. 평론가 임헌영씨(72)는 “횡보의 장남(작고)과 함께 언론사 생활을 했던 인연이 있다”면서 “염상섭 선생님이 더 오래 살아 있었더라면 1960년대 한국문단이 그렇게 어용으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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