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을 쪼개 다시 모으니 그야말로 ‘요지경 속이다’

2018.12.27 14:07 입력 2018.12.27 14:12 수정

A projecting praxinoscope, 1882. / 퍼블릭 도메인

A projecting praxinoscope, 1882. / 퍼블릭 도메인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산다’며 노래하던 가수는 가짜가 판치는 세상을 요지경이라 한탄했다. 하지만 요지경은 원래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신화에 등장하는 환상의 세계가 요지경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중국 서쪽의 곤륜산에 ‘서왕모’라는 여신이 살고 있었다. 서왕모는 먹으면 불로장생하는 복숭아의 주인. 여신의 궁전은 신선을 꿈꾸는 사람들이 바친 금은보화가 넘쳐났다. 궁궐 안에 있는 연못의 이름도 보석(瑤)으로 가득 찬 연못(池), 요지(瑤池)다. 신화에 등장하는 연못이라 가짜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신기하고 아름답고 진귀한 풍경을 요지경(景)이라 말했다. 극장이 없던 시절 확대경을 통해 여러 가지 사진을 돌려 볼 수 있는 장치도 요지경(鏡)이라 불렀다. 알쏭달쏭 신기하고 재밌게 돌아가는 세상이 요지경이었다.

뤼미에르 형제, ‘라 시오타역에 도착하는 기차’ / 유튜브

뤼미에르 형제, ‘라 시오타역에 도착하는 기차’ / 유튜브

123년 전 오늘의 요지경이다.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가 술렁이고 있었다. 어두컴컴했던 카페의 벽면에서 불쑥 나타난 기차 한 대가 관람객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혼비백산해 자리를 박차고 도망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최초의 상업 영화 <라 시오타역에 도착하는 기차>를 관람하던 진풍경이었다. 영화 전문가들은 1895년 12월28일을 영화의 탄생일로 기록했다.

‘시네마(cinema)’는 활동사진 영사기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어로 ‘빛’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했다. 형제의 발명품은 초당 16장의 연속 사진을 스크린에 영사했다. 16분의 1초라는 빠른 시간차를 구분할 수 없는 관람객의 두뇌는 연속된 정지 영상을 움직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시각잔상 효과 때문이다. 인간의 두뇌는 망막에 맺힌 사물의 상을 지연시켜 보존한다. 일종의 착각이다.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만든 페나키스토스코프 원판, 1893. / 퍼블릭 도메인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만든 페나키스토스코프 원판, 1893. / 퍼블릭 도메인

1824년 영국의 내과의사 피터 마크 로제가 굴러가는 마차 바퀴를 관찰하면서 시각잔상 효과를 설명했다. ‘수직 구경을 통해 보이는 바퀴살 형태의 착시 설명’이라는 논문이다. 직선의 방사형 바퀴살은 회전할 때 휘어져 보인다. 축의 거리에 따라 회전 속도가 달라 잔상의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설명이 좀 어렵다면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던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휠 모양은 실제의 속도보다 더 느리게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때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역마차 바퀴 현상’이라 불리는 착시현상이다.

쥘 마레가 만든 열 마리의 갈매기 모형이 담긴 조트로프, 1887. / 퍼블릭 도메인

쥘 마레가 만든 열 마리의 갈매기 모형이 담긴 조트로프, 1887. / 퍼블릭 도메인

착시 현상에 대한 호기심은 움직임을 재현하는 요지경 장치들을 발명하게 된 원동력이었다. 그리스어로 ‘요술 회전’을 뜻하는 ‘소마트로프(thaumatrope)’는 둥근 원판 양 끝에 끈을 매달아 회전시키는 시각적인 장난감이다. 가령 꽃과 꽃병을 앞면과 뒷면에 따로 그려 넣은 원판을 빠르게 회전시키면 꽃병에 꽃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1832년 벨기에 과학자 조세프 플라토는 구멍을 통해 원통 안의 그림들을 들여다보는 ‘페나키스티스코프(phenakistiscope)’를 만들었다. 사람이나 동물의 연속 동작을 그려 넣은 원판을 회전시키면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2년 후에는 영국의 수학자 윌리엄 호너가 원통 내부에 그림을 그려 넣은 ‘조트로프(zoetrope)’를 발명했다. 장치는 좀 더 섬세해졌지만 원리는 동일하다. 정지된 그림을 빨리 회전시키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시각잔상 효과를 이용한 요지경들이다.

쥘 마레(Etienne-Jules Marey, 1830-1904), 말 동작의 동체사진술 연구, 1886. / 퍼블릭 도메인

쥘 마레(Etienne-Jules Marey, 1830-1904), 말 동작의 동체사진술 연구, 1886. / 퍼블릭 도메인

유니콘인가? 달려가는 백마의 모습이 몽환적으로 담긴 사진이다. 1886년 프랑스 생리학자 에티엔 쥘 마레가 동물의 움직임을 연구하기 위해 찍었다. 과학자의 사진이라 그럴듯한 제목도 없는 사진이다. 하지만 사진은 몽환적이며 초현실적이다. 그것은 당대 예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계문명의 운동성과 속도감에 심취한 미래주의 화가들은 이 과학자의 실험용 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들을 그렸다. 자코모 발라의 ‘줄에 매인 개의 움직임’(1912)이 대표적인 그림. 지금 한국에서 전시 중인 프랑스 예술가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넘버 2’(1887)도 쥘 마레의 사진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견해도 있다.

쥘 마레의 사진술은 ‘크로노포토그래피(chronophotography)’ 기법이다. 영문으로는 ‘시간(chrono)’이 강조됐지만, ‘동체사진술’이라 번역됐다. 주로 움직이는 피사체를 찍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장의 사진에 여러 장면을 겹쳐 만든 일종의 다중촬영이다. 지금은 웬만한 카메라에 내장된 기능이지만 당시에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하던 초현실적인 이미지였다. 그것을 찍어내는 카메라의 생김새는 괴상망측했다. 이웃 사람들이 그를 미치광이로 취급했다. 왜냐하면 사진을 찍는다는 사람이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과학잡지 네이처(La Nature)에 수록된 크로노그래픽 건 삽화, 1882. / 퍼블릭 도메인

프랑스 과학잡지 네이처(La Nature)에 수록된 크로노그래픽 건 삽화, 1882. / 퍼블릭 도메인

“그것은 구석기시대 툰드라 지역 사냥꾼의 태곳적 수렵의 몸짓이다. 다만 사진사는 넓은 초원이 아니라 문화대상의 덤불 속에서 추적하고 있고, 그가 덫을 놓은 길은 문화라는 인공적인 타이가(Tigar)로 형성되어 있다.”

빌렘 플루서가 쥘 마레의 카메라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 사유했던 사진 찍기의 동작은 쥘 마레의 모습 그 자체였다. 다만 쥘 마레는 문화대상의 덤불이 아니라 과학의 덤불 속에서 피사체를 추적했다.

쥘 마레의 카메라는 구식 자동소총을 닮았다. ‘크로노포토그래픽 건(gun)’이라 불리는 카메라다. 방아쇠를 당기면 12장의 사진이 연속으로 찍혔다. 하늘을 나는 펠리컨, 질주하는 백마, 장애물을 뛰어넘는 사람 등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둥근 탄창 모양의 매거진에 포획됐다. 탄창을 뜻하는 영어 매거진은 필름 밀폐 용기를 말하기도 한다. 명칭이 크로노포토그래피 건에서 유래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쓰임새는 동일하다. 소총의 탄창에는 표적을 관통하는 총알이 들어 있고, 필름 매거진에는 피사체를 포착해내는 필름이 담겨 있다.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1830-1904), 개구리 점프하는 소년, 1887. / 퍼블릭 도메인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1830-1904), 개구리 점프하는 소년, 1887. / 퍼블릭 도메인

카메라가 총이라는 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쥘 마레처럼 움직임에 탐닉했던 동년배 미국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는 실재의 총을 격발시켰다. 표적은 아내의 정부. 아내가 낳은 아들이 다른 사람의 자식이라고 확신한 마이브리지는 권총을 품에 넣고 외간 남자의 집을 찾아갔다.

‘좋은 아침이군. 내 이름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라네. 여기 당신이 내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 있네!’

답장은 총알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사진가의 살인 행위에 대한 법정 판결이다. 배심원은 그의 행동이 정당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마이브리지의 이야기는 <사진가(The Photographer)>라는 제목의 오페라로 제작됐고, 최근에는 영화(<에드워드(Eadweard)>, 2015)로도 만들어졌다.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손에 카메라를 들게 된 사연은 정말 영화 같다. 그는 원래 책을 팔던 사람이었는데, 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심한 마차 충돌사고를 당했다. 무료한 요양생활을 하던 중 그는 사진술을 배웠다. 의사의 권유였다. 심한 두통과 사물이 겹쳐 보이는 복시증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마이브리지는 사진을 향한 열정을 불태웠다. 양안 시차의 원리로 한 장면을 조금씩 다르게 두 장을 찍는 입체 사진은 복시증을 닮았다. 마이브리지가 집중했던 사진술도 복시증과 비슷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입체사진술이었다. 주된 피사체는 건축물들과 자연의 풍경이었다. 손수 제작한 암실 장비를 짊어지고 찍은 요세미티 풍경사진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사진에 태양신 ‘헬리오(Hellio)’라는 필명을 새겨 넣었다.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말의 움직임. 1878. / 퍼블릭 도메인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말의 움직임. 1878. / 퍼블릭 도메인

마이브리지가 빛의 움직임에 천착하게 된 계기도 흥미롭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스탠퍼드는 시간차를 이용한(타임 랩스 기법) 건축 과정을 찍던 마이브리지에게 매우 빠른 사진을 주문했다. 질주하는 말의 사진이다. 스탠퍼드는 달리는 말의 네 발이 동시에 공중에 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1872년 처음 시도했던 일렬로 늘어놓은 12대의 카메라로 찍은 달리는 말의 사진은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 성공했다. 아직은 미숙한 사진술 때문이기도 했지만 앞서 소개한 부인의 외도 사건이 시간을 끌게 만들었다.

1878년 발행된 과학잡지(Scientific America)에 실린 마이브리지의 사진은 세상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12장의 사진에는 달리는 말의 세밀한 움직임이 그대로 포착돼 있었다. 네 발이 공중에 동시에 떠 있을 것이라는 주지사의 믿음은 맞았다. 하지만 앞뒤 발을 쭉 뻗은 채 공중에 떠 있는 말의 모습을 그린 화가들의 그림은 틀렸다. 말의 네 발이 공중에 떠 있을 때는 앞뒤 발이 몸 안쪽으로 모여 있는 순간이었다.

움직이는 말 사진으로 주가를 높인 마이브리지는 그의 사진술을 강연하기 위해 유럽을 여행했다. 프랑스를 방문한 1881년에는 자신처럼 움직임에 탐닉하던 과학자 쥘 마레를 만났다. 두 사람이 달랐던 점은 한 가지뿐이다. 쥘 마레는 한 장의 사진에 모든 움직임을 담으려 했고,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는 낱개의 사진을 롤 필름처럼 연속으로 나열한 것이다. 마이브리지는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환등기의 원리를 이용해 연속 사진을 영사하는 ‘주프락시스코프(zoopraxiscope)’를 개발했다. 1882년 고향인 영국으로 금의환향한 마이브리지는 에드워드 7세를 비롯한 영국의 왕족들에게 자신의 동영상 기계를 자랑했다. 이듬해에 열린 시카고 박람회에서도 그의 주프락시스코프는 인기였다. 박람회장에 마련된 마이브리지의 상영관(zoopraxogra phy hall)은 유료 관객이 동영상을 관람한 최초의 극장으로 기록됐다.

매트릭스 (The Matrix, 1999)

매트릭스 (The Matrix, 1999)

영화 <매트릭스>의 잊지 못할 옥상 결투신이다. 주인공 네오가 등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몸을 뒤로 젖히며 스미스 요원의 총알 세례를 피하고 있다. 카메라는 네오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의 모습을 360도로 회전하며 보여준다. 네오를 동그랗게 둘러싼 120대의 스틸 카메라가 찍은 사진을 연결한 장면이다. ‘타임 슬라이스 포토그래피’ 기법인데, ‘불릿 타임 숏(bullet time shot)’이라고도 불린다. 총알이 날아가는 짧은 순간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란한 영상이지만 최첨단 기법은 아니다. 마이브리지의 연속 촬영기법과 원리가 동일하다. 일렬로 늘어놓은 스틸카메라를 원형으로 배치해 촬영했을 뿐이다.

움직이는 영화는 움직임을 포착해내는 스틸 사진에서 출발했다. 초당 24컷 지나가는 스틸 사진을 인간의 눈은 움직이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어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착시현상을 꼬치꼬치 캐묻겠는가? 영화는 기꺼이 즐겁게 속아 넘어가는 환상으로의 여행, 요지경 세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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