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된 ‘찰칵’···베르나르 포콩, 기억을 소환하다

2018.12.13 14:08 입력 2018.12.14 17:42 수정

향연 le banquet, 1978 ⓒBernard Faucon / 공근혜 갤러리 제공

향연 le banquet, 1978 ⓒBernard Faucon / 공근혜 갤러리 제공

아침 7시, 어머니가 부른다, ‘베르나르’.

잠에서 깨어 단호하게 큰소리로 두세 번 ‘예’ 하고 대답하다가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베르나르’하는 소리와 그 음색을 줄곧 내 안에 간직해왔었던 것처럼 기억한다.

경고하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비난하는 어감이 전혀 없다. 침대에서 뒹구는 아이에게 하는 꾸지람 같은 것이 아니다. 다정하지도 상냥하지도 않다. 그저 짤막하게 부르는 ‘베르나르 일어나’, 삶에서 나를 가르치고, 나에게 꿋꿋함과 긍지를 심어주고 나의 인성을 만들어준 말.(베르나르 포콩 회고 사진집 <나의 길>)

Route magique, France 2018 ⓒ Bernard Faucon /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Route magique, France 2018 ⓒ Bernard Faucon /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기억의 매체는 청각일까, 후각일까, 아니면 시각일까?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입에 넣는 순간 잃어버린 유년의 시간을 찾았다. 같은 나라 사진작가 베르나르 포콩의 유년은 어머니의 부름으로 깨어난다. ‘베르나르’, 어머니만이 소리내어 부를 수 있는 그 유일무이한 음색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와 같은 것. 그리스 신화 속에서 미궁에 빠진 테세우스를 바깥세상으로 인도한 것이 연인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였다면, 유년의 세계로 베르나르 포콩을 초대한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베르나르 일어나.’ 잠자던 유년의 세계가 깨어났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장소는 분명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다. 아담한 모교의 운동장은 초등학생이던 나에게는 광활한 벌판 같았다. 유년의 세계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했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일까? 미셸 푸코는 어린이들이 실재하지 않는 유토피아(u-topia)가 아닌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 즉 헤테로토피아를 완벽히 알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 - 목요일 오후 - 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바로 이 커다란 침대에서 아이들은 대양을 발견한다. 거기서는 침대보 사이로 헤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침대는 하늘이기도 하다. 스프링 위에서 뛰어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숲이다. 거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밤이다. 거기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침내 쾌락이다. 부모가 돌아오면 혼날 것이기 때문이다.”(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헤테로토피아는 다른(hetero) 공간이다.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는 일종의 ‘반(反)공간(contre-espces)’, 그곳은 우리가 사는 일상적인 공간에 신화적이고 실제적인 이의를 제기한다. 그래서 침대의 공간은 아이들에게 하늘이며 숲이 될 수 있다. 시간도 뉴턴의 법칙에 따라 흐르지 않는다. 일상의 리듬을 벗어난 이질적 시간 ‘헤테로크로니아(hetero-chronie)’의 세계다. 그렇게 다른 시공간에 머물던 베르나르 포콩의 헤테로토피아는 어머니의 부름으로 호출된 것이다.

일본 인형극 ‘오! 미키 (Oh! Mickey)’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oyIf6Amb_0M

일본 인형극 ‘오! 미키 (Oh! Mickey)’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oyIf6Amb_0M

유년의 헤테로토피아로 여행을 떠나보자. 싸구려 오픈카 시트로앵 메하리에는 사진작가의 친구들이 동승했다. 밀랍인형, 마네킹 소년들이다. 혼자가 아니라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동차 오디오에서는 어떤 노래가 흘러 나왔을까? 경쾌한 샹송? 다람쥐 쳇바퀴 돌듯 카세트테이프가 돌아가고 있었겠지. 돌고 도는 인생, 유년의 세계로 돌아간다. 부모님의 집, 리우의 교회 마당, 생 사튀르냉의 수영장, 카마라그의 습지대와 해변…. 세트장에 내린 소년들을 사진 찍는 베르나르 포콩…. 그리스 신화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떠오른다. 그는 자신이 만든 조각상이 살아 있다고 믿었다. 베르나르 포콩의 마네킹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마네킹 소년들의 ‘여름방학(Les Grandes Vacances, Summer Camp 1976~1981)’ 연작이다.

베르나르 포콩의 사진은 ‘찍었다’는 말보다는 ‘만들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보이는 그대로를 찍는 ‘테이킹 포토(Taking Photo)’가 아니라 장면을 연출해서 찍는 ‘메이킹 포토(Making Photo)’다. 연출사진, 구성사진 등으로 부를 수도 있으나 프랑스 사진작가인 만큼 미장센 사진으로 적는다.

프랑스어 미장센(Mise-en-Scene)은 영화 혹은 연극의 무대 속에 무엇인가를 놓아 연출한다는 뜻이다. 영화의 스틸 컷을 떠올리게 하는 ‘여름방학’의 주인공 캐스팅에 대한 사연을 베르나르 포콩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사진과 마네킹의 등가성에 대한 생각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움직이지 않는 마네킹은 사진을 닮았다. 사진은 움직이는 영화(movie)가 아니다. 사진기는 언제나 모든 것을 얼음처럼 얼어붙게 만든다. 설사 타임머신을 타고 실재의 유년의 세계로 돌아가 사진을 찍어도 움직이던 소년들은 마네킹처럼 굳어 있을 것이다. 프랑스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그것을 유령이라고 말했고, 베르나르 포콩에게는 마네킹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베르나르 포콩의 주인공 캐스팅은 대성공이었다. 다른 사진작가들도 그를 따라 마네킹을 찍었다. ‘인형파’, 그를 추종하는 마네킹 사진작가들을 부르는 말이다. 로봇광의 나라 일본 사람들도 베르나르 포콩의 사진에 열광했다. 일본에 사는 미국인 가족 이야기를 담은 마네킹 인형극 <오 미키(Oh! Mikey)>는 ‘포콩 가족(The Fuccons)’이라 불린다.

향연 le banquet, 1978 ⓒBernard Faucon / 공근혜갤러리제공

향연 le banquet, 1978 ⓒBernard Faucon / 공근혜갤러리제공

마네킹 소년들의 ‘향연(Le banquet, 1978)’이 펼쳐지고 있다. 레코드판과 술병들이 나뒹굴고, 담장 너머에서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나무에 옮겨 붙지는 않을까?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키 작은 소년,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아이…. 축음기를 바라보고 있는 제법 나이 들어 보이는 한 소년만을 제외하고 모두가 당황스러운 몸짓이다. 하긴, 어린것들이 술 먹는 장소에서 불이 났으니 큰일이긴 큰일이다.

불의 향연에 어쩔 줄 모르는 소년들은 꼬마 프로메테우스다. 프랑스 문학비평가 가스통 바슐라르는 벽난로의 잉걸불을 바라보며 몽상에 빠져들었다. 일렁이는 불의 움직임은 최면술사의 손에 매달려 흔들리는 시계. 불의 몽상에 젖어든 바슐라르는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의 금기 위반을 떠올렸다.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주지 말라는 금기를 만들었다. 인간들의 아버지도 마찬가지. 본능적으로 불에 다가가는 어린아이들을 아버지는 혼낸다. 물이나 흙은 만져보고 인식되는 것이나 불에 대한 인식은 몸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로부터 그것이 위험하다는 지식을 전수받는 것이다. 그래서 불은 최초의 ‘사회적’ 금기다. 하지만 금기는 위반해야 제맛이다. 불장난은 어른들 몰래 저지르는 어린이들의 첫 번째 범죄. 어른들이 초대받지 못한 어린이들의 카니발에서 꼬마 프로메테우스들의 금기 위반 축제가 펼쳐진다.

알코올, 술 또한 소년들의 금기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에 대한 상상력은 술에 대한 몽상으로 이어진다. 술은 몸을 덥게 한다는 점에서 불과 같은 물질적 속성을 갖고 있다. 또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점도 술은 불과 비슷하다. 깜박이는 깜부기불을 살려내면서도 집을 태우지 않을 정도의 불을 다룰 줄 아는 기술은 어른들의 것이다. 어린이들의 불장난이 위험한 것은 불을 다룰 줄 모르기 때문. 마찬가지로 소년들은 자기 주량도 모른다. 어른들 몰래 마시는 음주의 첫 기억이 크고 작은 사고와 이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술은 물에 섞은 불인 것이다.

기차놀이 Rond de soir, 1978 / 공근혜갤러리 제공

기차놀이 Rond de soir, 1978 / 공근혜갤러리 제공

물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반영됐을까? ‘기차놀이(Rond de soir, 1978)’를 하는 소년들의 모습이 수영장의 맑은 물에 반영됐다. 맑은 물은 투명하면서 동시에 반영한다. ‘투명’과 ‘반영’은 시각적이다. 즉 맑은 물에 대한 상상의 물질적 속성은 ‘보는 것’이다. 미소년 나르키소스도 맑은 물에 반영된 자신에게 반해버렸다. 그런데 기차놀이를 하고 있는 베르나르 포콩의 소년들은 거울같이 맑게 반영된 자신들의 모습에는 관심이 없다. 자기보다는 아직 친구들이 더 좋은 나이였을까? 친구들과 수영장 위를 걷는 소년들의 모습은 <물과 꿈>(문예출판사)에 적힌 가스통 바슐라르의 유년 시절과 비슷하다.

“나의 즐거움은 아직도 시냇물과 동무가 되어 둑을 따라 바른 방향, 즉 인생을 어딘가 다른 곳, 말하자면 이웃 마을 쪽으로 인도하는 물의 흐름을 따라 걷는 것이다. 나의 ‘다른 곳’은 그렇게 멀리 가지 않는다.”

소년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콘크리트로 만든 네모난 수영장의 물은 갇힌 물이다. 하지만 소년들의 몸짓은 시냇물의 흐름을 닮았다. ‘졸, 졸, 졸’ 대신 ‘칙칙, 폭폭’ 소리가 들려온다. 시냇물 대신 소년들이 탄 기차가 수평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수평은 수직을 만나 정방형이 된다. 베르나르 포콩의 ‘여름방학’은 모두 정방형 프레임에 담겼다. 동일한 길이의 가로와 세로가 수직 교차하는 정사각형 프레임은 완벽하게 균형 잡힌 세계다. 물과 불의 균형이다. 불은 하늘을 향해 타오르고, 물은 대지를 따라 흘러간다. 불의 힘은 수직이고, 물의 평온함은 수평인 것이다.

물, 불, 공기와 흙은 고대 연금술사들이 믿었던 이 세상을 이루는 4원소다. 물론 연금술사들의 믿음은 과학의 영역에서 폐기됐다. 하지만 상상의 세계는 아직도 연금술사들이 지배한다. 가스통 바슐라르도 상상력의 물질적 기반을 4원소에서 찾았다. 베르나르 포콩도 마찬가지. 정방형 세계의 조물주인 베르나르 포콩은 흙에 물을 섞은 반죽으로 소년들의 형상을 만들고 콧구멍에 공기를 불어넣는다.

Mane, France 2018 ⓒ Bernard Faucon / 공근혜갤러리 제공

Mane, France 2018 ⓒ Bernard Faucon / 공근혜갤러리 제공

곧 겨울방학이다. 잠꾸러기 나의 초등학생 딸은 일어나라는 엄마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 이불 속을 뒹굴 것이다. 내 작은 존재의 헤테로토피아. 녀석은 가끔 이런 말로 부모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이불에서 엄마 아빠 냄새가 나.”

먼 훗날 성인이 된 내 딸의 기억은 후각에서 시작되려나. 부모가 하는 일은 아이들의 추억이 되어 주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베르나르 포콩의 최신작을 선보이는 <나의 길 Mes Routes>이 오는 2019년 1월 10일부터 2월 24일까지 서울 삼청동 공근혜갤러리에서 열린다. 70세를 앞둔 작가의 회고적 자서전 <나의 길> 한국어 출판과 3편의 단편 영상물, 그리고 영상의 배경이 된 프랑스, 페루, 태국, 볼리비아의 아름다운 길을 담은 30여 점의 사진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초기 작품이자 대표작인 <여름방학> 연작 중 빈티지 인화작품 ‘향연 Le banquet, (1978)’도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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