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한 성기훈보다 유혹 못 이긴 해롱이가 ‘중독의 본모습’

2022.06.10 15:54 입력 2022.06.10 16:04 수정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우리 사회는 ‘중독의 위험성’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나

우리 사회는 중독의 위험성이 높은 사물이나 행위에 지나치게 관대하다.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이정재)은 도박 빚 때문에 목숨을 건 게임에 뛰어들고(왼쪽 사진),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유한양(이규형)은 출소 직후 또 마약에 손을 대 체포됐다. 넷플릭스·tvN 제공

우리 사회는 중독의 위험성이 높은 사물이나 행위에 지나치게 관대하다.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이정재)은 도박 빚 때문에 목숨을 건 게임에 뛰어들고(왼쪽 사진),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유한양(이규형)은 출소 직후 또 마약에 손을 대 체포됐다. 넷플릭스·tvN 제공

지난해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의 주인공 성기훈(이정재)은 도박 빚 때문에 목숨을 건 게임에 뛰어든다. <오징어 게임>을 본 한 친구는 진저리를 쳤다. “나는 저렇게 도박 중독자가 ‘그래도 본성은 선량한’ 인물로 그려지는 게 싫어. 중독은 그런 게 아니야. 최소한의 인간성이나 판단력까지 앗아간다고.” 친구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도박 중독으로 크게 고생했다. 펀드매니저 조상우(박해수)는 고객의 돈까지 끌어들여 투자했다가 실패하면서 거액의 빚을 졌다. 성기훈과 조상우는 종목만 다를 뿐 ‘큰 한 방’을 좇았다는 점, 도박으로 진 빚을 데스게임이라는 도박으로 갚으려 한다는 점에서 도박 중독자다. 드라마는 두 사람의 서사와 캐릭터에 집중하지만, 정작 이들이 양산한 피해자나 중독의 위험성은 가볍게 뭉개고 지나간다. 게임에서 승리한 성기훈은, 정말 결말에서처럼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일생일대의 ‘빅 윈(big win, 도박에서 돈을 크게 따는 것)’을 경험했는데? 큰돈을 따는 것은 도박 중독의 조건이고, 중독은 개인의 의지로 영차 영차 해서 벗어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도박 중독자의 가족>은 이하진 작가가 카카오 웹툰에 연재 중인 화제작이다. 중독의 본질과 위험성을 본격적으로 다루며, 제목 그대로 도박 중독자의 가족 관점에서 중독이 어떻게 당사자의 주변까지 파멸케 하는지 그려낸다. 실화 바탕 픽션이며, 처음에는 작가의 네이버 블로그에 올라오다가 정식 연재로 바뀌었다. 주인공인 ‘나’는 남편의 형제가 주식에 빠지면서 비극에 휘말린다. 안 하면 바보 취급받는 재테크로 인식되는 주식이 도박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언뜻 낯설게 들린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목이냐가 아니다. 모든 중독자는 같은 쾌감을 좇는다는 사실이다. 큰돈을 따는 순간 뇌에서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나오고, 여기에 중독되면 중독자는 자기합리화와 갖은 핑계로 중독 행위를 지속하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의 머릿속에서는 그 선택이 ‘가장 합리적’이다. 중독 행위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중독 행위에서 발생한 손실을 메꿀 수 있다고 믿으며, 설득이나 절제는 무의미하다. 도박 중독은 충동조절장애다. 아픔을 통제할 수 없듯, 중독 행위를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 가족이 죽어도, 누군가 힘겹게 마련한 돈을 손에 쥐게 되면 곧장 중독 행위에 뛰어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독자에게, “어떻게 ~한 상황에서/ 다시는 안 한다고 약속했으면서 그럴 수가 있어!”라고 말하는 부분은 섬찟하다.

가족 도박 경험한 친구가 말했다
“중독자가 선량하게 그려지다니
인간성·판단력 다 앗아가는데…”
그래서 애교 많은 해롱이 결말이
충격이지만 비현실적이지 않다

음주와 같은 중독성 높은 행위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관대
마약 떡볶이·마약 옥수수…
‘마약’이란 아주 위험한 단어를
긍정적으로 무감각하게 쓰기도

중독은 질병이고 국가의 과제다

‘나’는 자신을 포함한 도박 중독자의 가족 역시 병에 걸렸다고 진단한다. 병명은 ‘공동의존증(Codependent)’. 처음에는 당사자가 중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족이니까’ ‘도와야지’라는 마음으로 의기투합한다. 만화에 따르면 끝없는 의심과 경제적인 압박 속에서도 서로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질병이 바로 ‘공동의존증’이다. 공동의존증에는 총 5가지 유형이 있으며, 만화는 이를 각각 ‘순교자적 유형’ ‘박해자적 유형’ ‘공모자 유형’ ‘친구 유형’ ‘냉담한 유형’으로 설명한다. 꼭 도박이 아니라도 중독자 주변인이라면 폭넓게 적용할 수 있다. 대부분의 도박 중독자가 남성인 실태(여성은 도박에 빠지면 금방 가족에게 버림받는다고 한다), 가족 간의 유대를 강조하는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죄책감과 맞서 싸우며 중독자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는지 등이 처절할 정도로 잘 재현되어 있으니 꼭 만화 보기를 추천한다.

2018년 종영한 <슬기로운 감빵생활>(tvN)에서 상습적인 마약 복용자 유한양(이규형 분) 캐릭터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해롱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런 해롱이가 출소 직후 다시 마약에 손을 대는 바람에 함정 수사에 걸려 체포되는 장면은 많은 시청자에게 충격을 안겼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마약을 끊으려고 노력하는 장면을 보며 진심으로 응원하고 지지하는 마음이 배신당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말은 해롱이라는 개인의 매력과 별개로, 마약 사범의 재범률이 높은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마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중독은 질병이고, 질병은 ‘의지’를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중독을 뇌 질환으로 규정한다. “중독은 다른 만성질환인 당뇨나 고혈압처럼, 완치가 어렵고 평생 치료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재발은 중독의 이러한 만성적인 특성 때문에 자주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중독의 위험성이 높은 사물이나 행위에 지나치게 관대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음주. 술을 마시고 범죄를 저지르면 감형해주고, 회식 자리에서 술을 강요하는 것은 오랜 기업문화였으며, 미디어에서는 음주를 한껏 매력적이고 흥겹게 연출한다. 술을 마시고 기억이 끊기는 ‘블랙아웃’ 현상은 하도 많이 흔하게 볼 수 있어서 귀여운 해프닝으로 여겨지지만, 중독 증상 중 하나다. 기쿠치 마리코의 <취하면 괴물이 되는 아빠가 싫다>(미우·대원씨아이)는 알코올 중독 아버지 밑에서 힘겹게 생존한 작가의 자전적 만화다. 책의 띠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술을 ‘즐긴다고 믿는’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한다.” 중독 위험이 있는 것에 무분별하게 노출되는 환경 또한 문제다. SBS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는 2021년 11월 방송된 ‘설계의 늪, 어린 ‘꾼’들의 위험한 베팅’에서 청소년을 끌어들이는 온라인 불법도박을 보도했다. 온라인 불법도박 역시 사다리타기나 OX 게임처럼 쉽고 직관적인 탈을 쓰고 있기에, 사용자가 도박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렵다. 주로 불법웹툰을 볼 수 있는 사이트를 만들고, 광고창 클릭으로 사용자를 끌어들인다. 무료쿠폰이나 친구추가 같은 수법으로 순식간에 또래집단에 뿌리내린다. 온라인 불법도박에 중독되어 11억원이라는 거액의 빚을 진 청소년도 있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2021년 10월 방송한 ‘나비약과 뼈말라족’은 식욕억제제의 부작용과 오·남용 실태를 추적한다. 식욕억제제는 부작용과 중독성이 있는 약물이다. 병원에서 처방받아야만 구할 수 있는 약은 온라인을 통해 ‘뼈말라’ 몸무게를 원하는 10대 여성들에게로 흘러들어간다. 16세 미만에게 처방되지 않지만, 마약류 관리 제도의 사각지대에서는 누구나 이 약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미끄럼틀처럼 순식간에 중독에 빠지게 된다.

여기까지도 남의 일 같은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는 소셜미디어 중독의 메커니즘을 고발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의 소셜미디어 기업은 지속해서 콘텐츠를 보게 하고자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비롯한 이용패턴을 수집한다. 잘 설계된 맞춤형 알고리즘, 심리적인 보상체계, 불특정 다수와의 상호작용, 푸시 알림 등. 다큐멘터리는 사람들을 중독시키려고 일부러 디자인된 장치가 도박 산업의 많은 장치와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원하는 정보가 나올 때까지 새로고침을 반복하는 행위는 심리학에서 ‘간헐적 정적 강화’라고도 불리며, 슬롯머신의 원리와 일치한다. 슈퍼컴퓨터와 거대한 데이터 앞에서 개인이 현혹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중독은 국가적 차원에서, 의료적 지원을 통해 관리해야 한다. 그러자면 중독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노력으로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비난하거나 쉬쉬해서는 안 된다. 일상적 차원에서도 예방과 교육이 필요하다. 특히 위험한 소재를 다루는 태도에 경각심이 필요하다. 최근 ‘마약 떡볶이? 어른들 반성해야… 진짜 마약 쫓는 이 사람’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온라인상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김대규 경남경찰청 마약범죄수사계장의 인터뷰를 토대로, 현재 우리 사회에 마약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무분별하게 퍼져 있는지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 중 ‘마약 떡볶이’ ‘마약 옥수수’ 등 일상에서 사용하는 표현 때문에 아이들에게 마약이 ‘맛있는 음식’처럼 인식된다며 이런 용어를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 요 몇 년 사이, 자극적인 판촉 문구가 유행하면서 음식뿐 아니라 온갖 ‘좋은 것’에 마약이 붙는 실정이다. 편안한 베개를 ‘마약 베개’라고 부를 때, 마약이라는 단어는 쉽게 긍정적인 느낌과 결합한다. 위험한 것은 위험하게 다루어야 한다. 한편 중독이 넘쳐나는 사회는 그만큼 ‘진통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죽음의 진통제>는 의료 민영화와 거대 제약기업의 탐욕으로, 환자들이 근본적 치료보다 잠깐의 고통을 잊게 하는 아편계 진통제에 중독된 현실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다. 개인이 고통과 위험, 강도 높은 압박을 오롯이 혼자 감내하다 중독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적 안전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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