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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가 태어난 곳, 지금은 갈 수 없는 땅 ‘연암협’ 찾았다

2022.09.11 14:11 입력 2022.10.19 16:12 수정

휴전선 판문점에서 정북 쪽으로 불과 13㎞ 떨어진 곳에 위치

구글 위성지도로 본 연암협의 모습. W로 보이는 사미천의 왼쪽 움푹 들어간 지점이 연암협(빨간 동그라미 표시)이다. 북쪽으로 뒷산이 보이고 10여호가 위치해 있다. 마을의 왼쪽과 오른쪽이 야산으로 감싸고 있는데, 오른쪽이 제비바위(연암)이다. 마을 앞에는 연암이 ‘엄화계’로 부른 사미천이 보인다. 지도의 왼쪽이 상류이고 오른쪽이 하류이다.  연암은 연암협이 ‘화장산의 동쪽’에 있다고 했는데, 위성지도의 왼쪽 윗부분이 화장산 정상 쪽이다. / 구글 위성지도

구글 위성지도로 본 연암협의 모습. W로 보이는 사미천의 왼쪽 움푹 들어간 지점이 연암협(빨간 동그라미 표시)이다. 북쪽으로 뒷산이 보이고 10여호가 위치해 있다. 마을의 왼쪽과 오른쪽이 야산으로 감싸고 있는데, 오른쪽이 제비바위(연암)이다. 마을 앞에는 연암이 ‘엄화계’로 부른 사미천이 보인다. 지도의 왼쪽이 상류이고 오른쪽이 하류이다. 연암은 연암협이 ‘화장산의 동쪽’에 있다고 했는데, 위성지도의 왼쪽 윗부분이 화장산 정상 쪽이다. / 구글 위성지도

조선 최고의 기행문 <열하일기>는 황해도의 깊은 산골 ‘연암협’에서 태어났다. 동네 앞에 ‘제비바위(연암·燕巖)’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산골짜기 마을. 연암 박지원이 처음 발견하고 너무 좋아 자신의 거처로 삼았던 곳이다. 박지원의 호(號) ‘연암’은 이곳에서 따왔다. 연행에 나선 연암은 북경에서 열하로 가던 도중 아홉개 하천을 건너면서 연암협을 흐르는 시내를 떠올렸다. 그리고 담헌 홍대용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험하고 동떨어진 곳이지만 마음속으로 한 번 이곳을 좋아하게 되자 어떤 곳과도 바꿀 수가 없게 됐다”고 표현했다. 연암이 연암협이라는 곳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연암은 중국 북경을 떠나기 전 이곳에 살았고, 연행에서 돌아온 뒤에는 이곳에서 <열하일기>라는 불후의 문장을 남겼다. 조선시대 농업정책을 논한 <과농소초>도 이곳에서 썼다. 연암이 이곳에 거처한 기간은 약 10년을 헤아린다. 하지만 38선 분단 이후 북한에 속하게 된 이곳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연암협은 과연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옛 기록과 북한자료, 고지도, 구글 위성지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연암협의 구체적인 위치를 찾아냈다. 휴전선 판문점에서 정북 쪽으로 불과 13㎞ 떨어진 곳에 있다. 연암은 이곳을 황해도 금천 연암협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황해북도 장풍군 장풍읍 소속으로 정확하게는 장풍읍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지점이다. 사미천(沙尾川·임진강의 지류) 주변에 10여호 농가가 있고 논밭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연암이 농사를 짓고 살았던 연암협이다. 개성에서 동북 방향으로 15㎞ 떨어진 지점이다. 개성에서 평양으로 갈 때 넘어야 하는 화장고개의 오른쪽에 있다. 서울과는 60㎞ 떨어져 있다.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왼쪽). 구글 위성지도를 통해 마을 뒷산 쪽에서 남쪽을 향해 보는 연암협 풍경. 10여호의 촌락 왼쪽 편이 제비바위(연암)이고, 앞에 사미천이 흘러나간다. 상류 쪽인 오른쪽 윗부분에 산 벼랑이 보이고 그 아래 시내 바닥에 흰바위들이 보인다. 오른쪽 윗부분에 굽이쳐 내려오는 물줄기도 볼 수 있다. 제비바위 인근에는 연암 박지원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세칸 집의 지붕이 보인다. / 위키백과·구글 위성지도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왼쪽). 구글 위성지도를 통해 마을 뒷산 쪽에서 남쪽을 향해 보는 연암협 풍경. 10여호의 촌락 왼쪽 편이 제비바위(연암)이고, 앞에 사미천이 흘러나간다. 상류 쪽인 오른쪽 윗부분에 산 벼랑이 보이고 그 아래 시내 바닥에 흰바위들이 보인다. 오른쪽 윗부분에 굽이쳐 내려오는 물줄기도 볼 수 있다. 제비바위 인근에는 연암 박지원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세칸 집의 지붕이 보인다. / 위키백과·구글 위성지도

■연암협의 위치는

이곳의 모습은 구글 위성지도가 그대로 보여준다. 2015년 12월에 찍은 위성지도를 보면 북위 38도 4분 2초, 동경 126도 41분 13초 지점에 연암협(빨간 동그라미 표시)이 펼쳐진다. 사미천이 W자처럼 휘어 도는 지점이다. 겨울에 찍은 위성지도라 사미천은 하얀 선으로 나타난다. 연암협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주는 지형적 특성은 시냇물이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본 위성지도에서 사미천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간다. 그후 북쪽 장풍읍 쪽에서 흘러나오는 와룡천과 합쳐져 남한의 고량포 쪽 임진강 본류로 합류한다. 남쪽에서 연암협을 보면 왼쪽과 오른쪽 야산에 둘러싸여 있고, 10여호의 농가가 보인다. 오른쪽 야산이 제비바위가 있는 곳이다. 연암이 살던 마을에서 보면 왼쪽이다. 연암은 홍대용에게 보낸 편지에서 “집 앞 왼편으로 깎아지른 듯 푸른 벼랑이 병풍처럼 서 있고, 깊숙한 바위틈 사이가 동굴 같다. 그 속에 제비가 둥지를 틀었으니 연암, 즉 제비바위라고 부른다”고 표현했다. 위성지도에서 제비바위는 제비꼬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모양만 봐도 제비바위 이름의 유래를 색다르게 해석해볼 수 있다.

연암협을 비정(比定)한 첫 단서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총독부 1대 5만 지형도’(총독부 지도)다. 1910~1930년대에 걸쳐 만들어진 조선 전역 지도로, 당시의 행정구역과 지명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한때 연암의 이름을 따서 연암동으로 불렀는데 이 지명이 정밀지도에 등장한다. 이 지도는 국토지리정보원의 홈페이지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지도를 보면 사미천의 W자 지점에 연암동이라는 지명이 나타나 있다. 지도가 만들어진 시점에 연암협은 경기도 장단군 소남면에 속해 있었다. 이 지도에 나타난 물줄기와 구글 위성지도에 나타난 물줄기를 비교하면 연암동의 현재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각종 북한지도에 ‘연암동’이라는 지명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극히 일부 지도에 표기돼 있긴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거나, 아니면 잘못 표기돼 있다. 총독부 지도는 이 오류를 정확하게 잡아준다. 국토지리정보원의 한 관계자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수탈의 목적으로 오랜 기간 우리나라 전역을 대상으로 제작한 지도”라고 설명했다. 총독부 지도가 오랫동안 잊혔던 연암동의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낸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선총독부 1대 5만 지형도에 나온 연암동 지점. W자의 왼쪽 움푹 들어간 지점에 표기가 돼 있다. 구글 위성지도와 비교하면 현재 연암협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연암동 지도에는 현재처럼 시냇물과 길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고 사람들이 사는 촌락, 제비바위가 표현돼 있다.  지도에는 또 연암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신수동과 유덕리라는 마을의 표기가 있다. / 국토지리정보원

조선총독부 1대 5만 지형도에 나온 연암동 지점. W자의 왼쪽 움푹 들어간 지점에 표기가 돼 있다. 구글 위성지도와 비교하면 현재 연암협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연암동 지도에는 현재처럼 시냇물과 길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고 사람들이 사는 촌락, 제비바위가 표현돼 있다. 지도에는 또 연암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신수동과 유덕리라는 마을의 표기가 있다. / 국토지리정보원

■북한의 작가와 기자들이 찾아갔다

연암협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단서는 또 있다. 북한의 작가와 기자들이 분단 이후 연암협을 찾아간 기록이다. 북한의 신문과 잡지 등을 살펴본 결과 모두 5건의 연암협 방문 기사를 찾아냈다. 처음 연암협을 찾아간 이는 월북 문학평론가인 윤세평(월북전 이름 윤규섭)이다. 그는 1955년 겨울과 1956년 5월에 두 번 연암협을 찾아갔다. 두 번째로 찾아갈 때는 한설야와 동행했다는 이야기도 나와 있다. 그의 1955년 방문은 1956년 12월 문학신문에, 5월 방문은 그해 7월 ‘민주조선’에 실렸다.

윤세평은 개성-화장고개-장풍읍을 거쳐 개울 인근에 나 있는 길을 따라 연암협을 찾아들어간다. 그는 “장풍에서 10리 남쪽 산골로 들어가 자리 잡은 연암협을 손쉽게 찾았다”고 기록했다. 그는 “지금은 개울을 건너기도 하여 평탄한 길은 아닐망정 자동차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다”며 연암이 개성에서 30릿길을 걸어들어간 ‘연암협 가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 장풍읍에서 와룡천(임진강 지류)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다 다른 줄기인 사미천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코스다. 이 길 도중에 ‘신수동’, ‘유덕리’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지도를 보면 이 지명이 보인다. ‘신수동’을 지나 ‘유덕리’를 거쳐 연암협에 이르게 된다. 개울을 따라가던 길은 연암동에 이르러 갈라지고, 지도에는 제비바위에 해당하는 마을 초입이 보인다. 마을 초입은 기사에서 동구로 나타나 있다. 연암은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니, 산기슭이 모두 숨겨져 있더니 갑자기 면세가 바뀌어 언덕이 평평해지고 기슭이 예쁘장했으며, 흙이 희고 모래가 밝아 훤하게 트여 있다. (…) 산이 돌아들고 물길이 겹쳐지는데 사방으로 마을과는 끊어져 있다”라고 썼다. 그 표현처럼 물길이 겹쳐지는 그곳에 연암협이 있다. 이 위치를 확인한 것에 대해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잊힌 연암의 자취를 확인하고 특히 연암 형수의 묘지명과 ‘일야구도하기’ 등 명문의 현장을 밝힘으로써 남북교류 활성화 이후 북한의 문화공간을 재조명할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40년 넘게 연암을 연구한 김명호 전 서울대 교수는 “연암협은 연암 박지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장소”라며 “이곳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북한 기사를 보면 제비바위에 ‘소엄화계’라는 글자가 지금도 남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엄화’는 채색이 아름다운 그림을 뜻하는데, 소동파의 시에서 유래한다. 연암의 ‘기린협으로 가는 백영숙에게 주는 글’을 보면 영숙 백동수가 금천 연암협의 집을 잡아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인적도 없는 이곳에 집을 지은 연암은 앞의 시내를 엄화계로 부르고, 연암협을 ‘그림처럼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의미에서 ‘소엄화계’로 칭했다. 윤세평을 비롯한 기사 작성자들은 바위에 새겨진 이 글이 바로 연암의 필적임을 알리고 있다. ‘동백꽃 피는 연암협’이라는 노동신문 1963년 3월 기사와 ‘연암동을 찾아서’라는 문학신문 1959년 3월 기사에는 제비바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실려 있다. 당시의 조악한 인쇄상태 때문에 제비바위의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연암동을 찾아서’라는 기사에는 ‘소엄화계’라는 연암의 글을 찍은 사진이 나와 있지만, 이 역시 제대로 윤곽조차 확인할 수 없다.

이곳에서는 연암 시대와는 달리 제비바위 옆에 큰 잣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는 사실이 기사를 통해 나타난다. 아마 연암이 이 잣나무를 옮겨왔으리라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다른 기사에서는 전나무로 표기돼 있다. 이 잣나무 밑에 연암이 살았던 세칸 집이 있었다고 한다. 연암은 홍대용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갈밭 몇뙤기에 초가삼간을 지어놓았을 뿐이다”, “남쪽으로 집을 얽어매었는데, 그 얽어맨 것이 매우 작지만 어정거리면서 쉴 수 있는 장소였다”라고 썼는데, 이 집은 없어졌다. 한 기사에는 전쟁 때 폭격으로 없어졌다는 내용이 있다. 다른 기사에는 “정전 후 연암을 기념해 지어놓은 세칸 집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와지붕에 회백칠까지 하여 한 옛날 연암이 손수 지었던 집과는 판이한 것이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노동신문 1963년 3월 4일 4면에 실린 ‘동백꽃 피는 연암협’ 기사. 이 기사의 위쪽에 연암(제비바위)의 모습이 보인다. /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노동신문 1963년 3월 4일 4면에 실린 ‘동백꽃 피는 연암협’ 기사. 이 기사의 위쪽에 연암(제비바위)의 모습이 보인다. /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가장 정확하게 추론할 수 있는 단서

연암동의 위치를 가장 정확하게 추론할 수 있는 단서는 신문에 소개된 촌락과 주민들이다. 북한 기사는 이곳에 10여호의 가구가 있다고 표현해놓았다. 구글 위성지도로 확인해보면 15가구가량 된다. 윤세평의 기사에서는 ‘연암협동조합’에 속한 가구가 18호라고 기록돼 있어 위성지도에서 내려본 가구수와 거의 비슷하다. 연암동에 연암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점은 북한 신문이 빠지지 않고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다. 지금 살고 있는 후손의 부친이 불과 1년 전(1954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후손 한명이 연암이 살던 곳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후손들이 연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연암의 정신이 이곳에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연암의 직계 후손들이 대부분 서울에서 살았다는 점으로 미뤄 이들은 직계 후손이 아니라 방계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

엄화계의 현재 모습은 어떠할까. 시내의 일부 바닥은 바위라는 것이 위성지도에서도 드러난다. 연암이 “개울을 따라 흰 바위가 평평하게 펼쳐져 있어 마치 먹줄을 쳐서 잘라놓은 듯하다”고 표현한 부분이 위성지도에서 보인다. 시내는 <열하일기>에 이렇게 표현돼 있다. “산중의 내 집 문 앞에도 큰 시내가 있어 매양 여름철이 되어 큰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항상 우렛소리, 말 달리는 소리, 대포 소리, 북 소리를 듣게 되어 결국은 귀에 젖어 버렸다”라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시내가 너무 작게 보인다. 과연 <열하일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이곳을 방문한 윤세평 역시 이런 의문을 가졌다. 그는 <조선문학>이란 잡지의 1957년 3월호 ‘박연암 탄생 220주년 기념 특집’에 ‘연암과 사실주의의 힘’이라는 글에 이런 내용을 실었다. “내가 연암동을 찾아간 것은 늦은 가을과 봄철이었기 때문에 물도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원체 시내가 크지 못한 데다가 바윗돌들이 여기저기 노출돼 개울 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윤세평은 동네 사람들에게 비가 오면 어느 정도로 물이 차오르는지 물어본다. 동네 노인은 장마라도 지면 큰물이 지고 돌이 함께 굴러 내리고 바위에 부딪쳐 이 소리가 아주 무섭다고 말해 <열하일기> 속 엄화계가 바로 이곳 연암협의 사미천임을 증명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나는 또 우리 산중으로 돌아가 다시 앞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이것을 증험해보고자 한다”고 쓴 바 있다. 1780년 연행에서 돌아온 후 과연 연암은 연암협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서울을 오가며 <열하일기>를 썼다. 김명호 전 서울대 교수는 “연암의 두 명작인 <열하일기>와 <과농소초>가 연암협 은둔 시절에 쓰였기 때문에 연암협은 연암에게 있어 창작의 산실”이라고 말했다. 연암이 늦은 나이 벼슬에 오르기 전까지 한가롭고 여유롭던 연암협 시절에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의 기사에서는 연암이 연암협에 머물렀던 시기를 정조대 세도가인 홍국영을 피해 연암협으로 은거했던 1778년부터 1780년까지를 포함해 모두 10년으로 표현하고 있다. 김 전 교수는 “1777년부터 1786년 말단 벼슬을 하는 바람에 연암협을 나오는 시기까지 계산하면 9년은 연암협에서 머무른 셈”이라고 말했다.

연암의 친구인 정철조가 그렸다는 그림. 이가원 선생의 <연암소설연구>에 수록된 것이다. 문화재청 인터넷홈페이지 정철조 소개란에서 이 사진을 볼 수 있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

연암의 친구인 정철조가 그렸다는 그림. 이가원 선생의 <연암소설연구>에 수록된 것이다. 문화재청 인터넷홈페이지 정철조 소개란에서 이 사진을 볼 수 있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

■조대는 그대로 있을까?

연암이 언급한 연암협의 조대는 그대로 있을까. 연암은 “집 앞 백여보에 평평한 대가 있어 모두 층층 바위가 포개어져 이루어져 있다. 그 개울이 굽어 도는 곳이 조대(釣臺)다”라고 표현했다. 위성지도에서 마을의 오른쪽 앞산과 절벽의 모습에서 이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연암이 말했던 것처럼 개울이 굽어도는 모습도 보인다. 사미천 상류에 연암은 연못을 파고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연암이 “어떤 곳은 평평한 호수가 되고 어떤 곳은 맑은 소가 된다. 노니는 물고기들이 많다. 서산의 석양이 비치면 그 그림자가 바위 위에까지 어린다. 이곳이 엄화계다”라고 표현했다. 연암의 손자인 박규수는 ‘이호산장도가(梨湖山莊圖歌)’에 고반정이라는 집을 세우고, 연못 북쪽에 하당과 죽각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문학신문 기사는 어귀 강변에 ‘계정(溪亭)’이라는 전각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북한 기사를 보면 이 정자는 1930년대에 아쉽게도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 그곳에 주춧돌, 기왓장, 문짝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연암은 친구인 정철조로 하여금 연암협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고 하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연암소설연구>(이가원)에 수록된 흐릿한 그림뿐이다.

북한 기사를 보면 연암협에는 연암 형수의 묘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또 다른 기사는 연암이 사용했던 우물이 지금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연암터 논’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고 한다. 연암협에 연암기념관을 지었다는 기사도 있다.

북한 기사에서는 연암이 낙엽과 가랑잎을 썩힌 ‘약토’로 조 수확량을 대폭 늘렸다는 이야기와 ‘풍구’라는 농기구로 곡식의 까끄라기와 검불을 쉽게 날렸다는 이야기가 주민들 사이에 전해오고 있다고 말한다.

북한 신문에서 유독 도드라진 부분은 연암협의 과일나무에 대한 표현이다. 뽕나무, 배나무, 살구나무, 밤나무가 우거졌다는 것이다. 흔히 생강나무꽃으로 불리는 노란 동백꽃도 연암협에 많이 피었다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오리, 돼지, 닭 등의 가금뿐만 아니라 꿀벌통이 등장한다. 형수의 묘비명인 ‘백수 공인 이씨의 묘지명’에 쓴 연암의 글을 떠올리게 한다. “담장 둘레 천그루 뽕나무를 심고 집 뒤에 천그루 밤나무를 심으며, 문 앞에 천그루 배나무를 접을 붙이며, 개울에는 천그루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를 심겠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못을 파고 한말 물고기 새끼를 풀겠습니다. 바위벼랑에는 백통의 벌을 치고 울타리 사이에는 소 세마리를 묶어두겠습니다.” 북한의 신문은 이 글처럼 연암이 꿈꾼 엄화계가 북한에서 사회주의 지상낙원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최근 구글 위성지도에서는 기사 내용만큼 나무가 우거져 있지 않고 황량한 모습을 보인다. 아마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며 이들 과수나무도 수난을 겪었으리라 짐작된다.

연암에 대한 북한의 입장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1950년대 말 북한에서도 연암 박지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조선시대 지배계급을 비판하는 역사적 관점과 맞추기 위해 사대부들의 고루함을 풍자한 연암의 문학을 끌고 왔다. 연암 탄생 220주년인 1957년은 연암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다. 이즈음 개성 은덕동 황토고개 아래에서 연암의 무덤을 발견해 단장했다고 한다. 이곳은 연암협에서 그리 멀지 않다. 연암의 아들인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는 “장단의 대세현 남향에 자리한 어머니 묘에 합장했다”고 나와 있다. 이곳이 은덕동 황토고개와 일치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박종채가 언급한 아버지의 묫자리가 반남박씨 조상들이 묻혀 있던 언덕임을 감안하면 북한에서 말하고 있는 연암 묘의 위치는 신뢰성이 조금 떨어진다. 월북 문학가 윤세평이 1960년대 초 숙청을 당해 문단에서 사라졌을 때쯤 연암 박지원에 대한 고양 분위기도 북한에서는 사라지는 듯했다. 연암협에 대한 기록도 이때 사라졌다. 아마 1960년대 주체사상의 강화가 연암협의 퇴장과 맞물렸는지도 모른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 / 서울대 규장각 소장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 / 서울대 규장각 소장

■연암협의 존재가 그리운 이유

연암 애호가들은 1780년 연암의 연행길인 압록강에서 청나라 북경, 열하에 이르는 먼 길을 따라 가보았지만 정작 연암이 우리나라에 남긴 흔적을 찾을 길은 없었다. 이종묵 교수는 “비록 연암이 연암협에 형수 묘를 쓰긴 했지만, 연고가 없는 땅이 돼 버렸고 외진 곳으로 여겨졌다”면서 “사람들은 연암의 사상에만 관심을 가졌지 그와 인연이 있는 땅에 대해서는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연암이 태어나 살았던 서울은 곳곳이 이미 개발돼 그 형체조차 알 수 없게 됐다. 김명호 전 교수는 “서울에서 태어난 문인에게는 불행하게도 창작의 산실이 남아 있지 않다”며 대문호인 연암의 서울 유적이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그가 벼슬살이를 했던 안의(경남 함양군) 등지의 관련 유적도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다. 연암협의 존재가 그리운 이유다. 김 전 교수는 “연암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곳인데 연암협에 있는 엄화계가 연암이 살았던 시절처럼 지금도 아름답게 흐르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남북 관계가 개선돼 예전의 개성 성균관처럼 연암협이 북한 여행 코스에 포함되기를 연암 애호가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을까. 그곳을 찾아가 연암이 즐겼던 ‘소엄화계’의 풍경을 볼 날이 곧 다가오길 바란다.

참고 구글 위성지도(2015년 12월 촬영) | 조선총독부 1대 5만 지형도 | ‘박 연암과 연암동에 대한 수기’, 문학신문, 1956년 12월 13일, 3면(윤세평) | ‘연암협을 찾아서’, ‘민주조선’, 1956년 7월 21일, 3∼4면(윤세평) | ‘연암동을 찾아서’, 문학신문, 1959년 3월 5일, 4면 | ‘동백꽃 피는 연암협’, 노동신문, 1963년 3월 4일, 4면 | ‘꽃피는 연암협’, 문학신문, 1965년 10월 1일, 1면 | ‘연암과 사실주의의 힘’, <조선문학>, 1957년 3월호, ‘박연암 탄생 220주년 기념 특집’(윤세평) | ‘은거의 땅 연암협, 실학의 땅 안의’, <문헌과 해석>, 2005년 가을 통권 제32호(이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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