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의 ‘여판사’가 2016년의 당신에게 묻습니다 “여성들 삶, 정말 나아졌나요”

2016.06.06 21:28 입력 2016.06.06 21:44 수정

한국영화 두번째 여감독 작품…서울여성영화제 상영 ‘여판사’

영화 <여판사> 속 허진숙의 변론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대안적 변론을 펼치는 배우 한예리.

영화 <여판사> 속 허진숙의 변론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대안적 변론을 펼치는 배우 한예리.

단정한 옷차림의 배우 한예리가 관객 앞에서 변론을 이어갔다. “여성들은 지난 수천년간 폭력과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입니다.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착취당하면서도 약자들에 대한 연대의 정신을 발휘하기를 멈춘 적 없습니다. 피고인은 무죄입니다. 그의 죄라면 억압당하고 희생을 강요당했던 이 땅의 여성으로 태어난 것뿐입니다.”

5일 저녁 서울 신촌 메가박스에서 열린 제1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여판사> 상영장. 1962년작 <여판사>는 한국 영화사에서 두 번째 여성 감독으로 기록된 홍은원 감독(1922~1999)의 작품이다. 그동안 유실된 채 존재만 알려져 있다가 지난해 극적으로 발굴·복원됐다. 극중 허진숙은 판사라는 높은 사회적 신분을 갖고 있지만,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그런 진숙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위대한 여판사님” 운운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힌 남편은 외도까지 일삼는다. 시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사건을 두고 시어머니가 살인 혐의를 받자, 진숙은 판사직을 그만둔 뒤 시어머니의 변호를 맡는다.

상영이 끝나고 마련된 한예리의 변론은 극중 허진숙의 변론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영화 속 허진숙은 “사람의 본성이 악할 수 없다는 믿음”에 근거해 시어머니를 변호하지만, 현대의 법정에서 그런 변론이 통할 리 없다. 5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나타난 허진숙을 자처한 한예리는 호주제 폐지 등 여성의 지위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진전을 언급하면서도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해 온전한 인간으로서 차별의 굴레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변론 전 한예리는 관객에게 말했다. “좋은 세상 살고 계십니다. 하지만 정말 여성들의 삶이 나아졌습니까?”

제 1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영화 <여판사>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김선아 집행위원장, 임순례 감독, 배우 한예리, 정연순 변호사, 이연진 판사(왼쪽부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제 1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영화 <여판사>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김선아 집행위원장, 임순례 감독, 배우 한예리, 정연순 변호사, 이연진 판사(왼쪽부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한예리의 변론 후에는 관객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공연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 대안 변론을 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최초의 여성 회장인 정연순 변호사, 이연진 판사, 여성영화제 김선아 집행위원장이 함께했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영화계와 법조계는 여전히 남성이 대다수인 영역이다. 1996년 데뷔한 임순례 감독은 차별에 대한 몇 가지 사례를 들었다. “여자는 기계 만지면 안된다”는 선입견으로 영화학교와 현장에서 여성 영화인을 경원시하거나, 격한 술자리 속 성적인 농담으로 여성을 곤란하게 하는 일도 잦았다. 임 감독은 “남자들이 주류가 된 집단에 들어갔을 때 여자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유사 남성이 되거나 여성성을 거세하는 것”이라며 “남성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일부러 눈을 부릅뜨고 술을 마시거나 ‘선데이 서울’을 보며 더 야한 농담을 연구해 역공하는 여성 영화인도 있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임 감독은 “요즘엔 눈에 드러나는 제도적 차별은 없지만 투자자, 배우, 프로듀서 같은 남자들끼리의 네트워킹에서 소외된다는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예리 역시 “남자 배우와 감독이 담배를 피우면서 영화 얘기를 계속하기에, 나도 옆에서 계속 간접흡연을 하며 그들의 대화에 끼려고 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사적이고 은밀한) 술자리가 많이 있지만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여배우들끼리 만나면 그런 자리의 불편한 점, 기분 나쁜 스킨십을 털어놓곤 한다”고 말한 뒤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법원 내 젠더법 연구회에 소속돼 있는 이연진 판사는 “여성 회원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간혹 남성 판사가 한 명이라도 모임에 오면 크게 존중하고 환영한다”며 “남성 판사와의 연대를 통해 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한 남성 관객은 영화 속 상황과 이날 행사가 영화인, 법조인 등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위에 오른 여성의 이야기일 뿐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정연순 변호사는 “억압과 차별을 극복하는 과정에는 앞장서 용기를 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라며 “이런 여성은 ‘높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왜 여성은 남성과 똑같은 삶을 누리지 못하는가’라고 더 떠드는 사람이라고 봐주면 좋겠다”고 했다. 김선아 위원장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판사라고, 집행위원장이라고 안 죽이는 것 아니다”라고 답했다. 임순례 감독은 “여성을 주인공, 주제로 삼은 영화가 안 나오는 현상은 여성 제작자, 프로듀서가 많아져야만 자연스럽게 해소된다”고 말했다.

<여판사> 속 시어머니는 사소한 꼬투리로 며느리 허진숙을 구박하곤 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인식을 증명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시어머니 역시 결혼 전 낳은 아들을 숨겨야 하는 아픔이 있는 처지였다. 정연순 변호사는 “허진숙이 시어머니의 차별받고 피해 입은 삶을 이해하면서 진정한 연대가 이뤄진다”며 “이런 인식을 공유하는 이들이 연대해 룸살롱 문화, 음주 문화를 깨는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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