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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새월화극 ‘기황후’ 왜곡 논란, 역사학자들도 "잘못"

2013.08.29 20:16 입력 2013.08.30 10:53 수정

MBC가 드라마 <기황후>의 역사 왜곡 논란(경향신문 28일자 22면)에도 불구, 촬영을 강행할 방침이다.

<기황후>는 10월로 방송 예정인 하지원·주진모 주연의 50부작 사극이다. 모국인 고려를 농단한 기황후와 새어머니를 겁탈한 고려 충혜왕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MBC 관계자는 28일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며 “역사에 나온 한 줄을 갖고도 드라마·영화는 만들어 질 수 있다. 이미 지난 주말 촬영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그것을 다르게 보는 관점도 있다. 두 일간지 인터넷 판에 실린 ‘서울대 이강한 교수’의 주장을 읽어보라”고 말했다.

기황후 영정                  /타이페이 고궁박물관

기황후 영정 /타이페이 고궁박물관

이들 신문은 이 교수의 논문 내용이라면서 “기황후 때 원나라 공녀 징발이 없어졌고 고려 입성론(고려를 원나라로 편입 시키려는 시도)도 사라졌다”고 썼다. 이 교수는 또 “기황후에 대해 서술한 원자료인 원사와 고려사는 모두 기황후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며 “전부 봉건적인 유학의 관점에서 씌어진 것으로 여성의 정치 참여를 부정적으로 보는 유학의 입장에서는 기황후를 부정적으로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어 “충혜왕이 흔히 알려져 왜곡된 이미지의 주색에만 빠져 사는 왕이었다면, 고려의 경제가 다시 활발해지고 고려를 원나라의 한 행성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음모를 막을 수 있었을까”라고 했다.

기황후 영정                    /행주기씨대종중

기황후 영정 /행주기씨대종중

하지만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정책실장으로 재직중인 이강한 교수는 이 같은 견해를 부인했다. 이 교수는 스포츠경향과 전화통화에서 “기황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또 “충혜왕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궁궐 내 방직 공장을 차려서 여종을 끌고 와서 말 안들으면 때려 죽였다”고 말했다. 그는 기황후와 충혜왕을 긍정적으로 봤다는 자신의 논문 관련 보도에 “내 논문에 그런 평가 없다. 그 사람들 내 논문을 읽어보기는 했다는 거냐”고 되물었다.

실제 고려사절요에는 기황후와 기씨 일가, 충혜왕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려사절요 27권에 1363년 기황후는 국왕(고려 공민왕)을 원망해 모함하여 폐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세울 것을 꾀했다고 돼 있다. 또 “그래도 노여움이 다 풀리지 않아 이공수에게 덕흥군을 받들어 동으로 돌아가라 했다”고 적었다.

고려사절요 사진 온라인캡처

고려사절요 사진 온라인캡처

고려사절요 25권에는 충혜왕이 부왕의 후처인 수비(壽妃) 권(權)씨, 부왕 후처인 경화공주 몸을 겁탈했다고 썼고, 내시 전자유(田子由)의 집에 행차해서 아내 이씨(李氏)를 강간하는 바람에 이들 부부가 야반도주했다고 썼다.

또 고려사절요 25~26권에 기삼만, 기주, 기철 등이 “일찍이 세력을 믿고 포악한 행동을 함부로 했다”, “임금을 능가하는 위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법도를 흔들었다”고 돼 있다.

다른 역사학자들도 드라마 주인공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고려사를 전공한 도현철 연세대 교수는 이날 스포츠경향과 통화에서 “충혜왕과 기황후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부정적”이라며 “한국사 연구에 반대되는 입장으로 드라마 작가가 제작하는 듯 하다. 세계에 진출하려는 것은 알겠는데 사실 왜곡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도 “이완용이 일본 사람과 싸운다고 독립투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고려·원을 갈라놓고 권문세족인 기씨 일파와 갈등했다고 충혜왕이 잘한 왕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기황후에 개인적 연민을 가질 수는 있지만 원 간섭기라는 시대 상황에서 평가할 때 고려 기준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숙인 교수는 “고려 때 기황후를 모델로 해 공녀가 더 늘었다”며 “기황후가 당시 권력 기반을 위해 더 많은 고려 사람들을 원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결과 원나라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고려 공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아주대 이상국 교수는 “역사는 사실과 해석”이라며 “당시 고려가 안고 있는 내·외적 문제(기씨일가·원나라) 모두에 기황후가 관여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사실’이다. 고려 말기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외세 개입을 받은 민감한 시기인 점을 생각하면 제작진은 ‘해석’에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2005년 사극 <신돈>에서 묘사한 기황후를 연기한 김혜리.

2005년 사극 <신돈>에서 묘사한 기황후를 연기한 김혜리.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드라마 제작을 멈추야 한다”는 의견이 늘고 있다. 누리꾼 lwhs**** “충혜왕이 로맨티스트? 이제 곧 매국노 이완용도 재해석한 드라마도 나오겠구나?”라고 썼다. 누리꾼 dlwn***은 “광해는 광해군일기 중초본이 나와 새롭게 조명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기황후는 다르나”라며 “요새 아이들이 책이 아닌 드라마를 보고 역사를 배우기 때문에 추측으로 사극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cess***도 “음행(강간)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데 이런 주장은 여러 사료 및 역사서 기록에 대한 하나의 반대 가능성을 제시한 것일 뿐 조작됐다는 증거가 없다”며 “기황후 드라마 제작은 취소 되어야 한다”고 적었다.

집필을 맡은 정경순 작가는 “2010년 이전부터 드라마를 기획하면서 고려사 원사·고려사절요 뿐 아니라 기존 논문 및 반대되는 시각의 논문과 책 등을 보니 의문점이 많이 들었고, 이를 토대로 집필했다”며 “근거 자료 없이 역사를 극화시키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논란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자료 준비 과정에서 인물들이 충분히 재평가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남편인 장영철 작가는 다시 전화를 걸어와 “기황후가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 정치권력들과 싸우는 등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극화해 그릴 것이고 충혜왕에 대해 역사서에 나온 부분도 다른 방식으로 극화해 표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래는 기황후와 충혜왕의 악행을 기록한 문헌 내용

■충혜왕 악행 : 고려사절요 25권

1339년 5월 : 부왕의 후처인 수비(壽妃) 권(權)씨와 간통.

1339년 7월 : 부왕 후처인 경화공주를 강간. 송명리(宋明理)의 무리로 공주의 몸을 붙들어서 꼼짝할 수 없게 하고 입을 틀어막아 말을 못하게 하여 그를 간음.

1339년 8월 : 남씨는 본래 양반의 아내였는데 폐신(嬖臣) 최안도(崔安道)ㆍ김지경(金之鏡)도 그와 간통하였다. 충혜왕도 그와 관계하고서 얼마 후에 영서(英瑞)에게 주고는, 또 그 집에 자주 다니며 사통.

1341년 11월 : 왕이 내시 전자유(田子由)의 집에 행차해서 그의 아내 이씨(李氏)를 덮쳐 강간. 얼마 되지 않아 자유는 그의 아내와 함께 달아남. 기륜의 집으로 행차하여 마파를 잡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불량배를 보내어 또 마파를 기륜의 집에서 수색하게 함

1341년 12월 : 왕이 폐인(嬖人) 호첩목아(胡帖木兒)에게 곤장을 치고, 그 혀를 불로 지지며, 그 음낭을 불로 지지고는 섬에 귀양보냄.

■기황후 고려 침공 : 고려사절요 27궐

1362년 12월 : 서북면 만호 정찬(丁贊)이 원 나라에 덕흥군(德興君 충선왕의 셋째아들)를 국왕으로 세운다고 보고

1363년 3월 : 황후(기황후)가 국왕(고려 공민왕)을 원망. 국왕을 모함하여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울 것을 꾀함

1363년 3월 : 황후는 그래도 노여움이 다 풀리지 않아 이공수에게 덕흥군을 받들어 동으로 돌아가라 함.

1363년 12월 : 덕흥군 요동에 둔을 치고 척후기병(斥候騎兵)이 여러 번 압록강에 이름.

■기황후 일가 악행 기록 : 고려사절요 25~26권

1347년 3월 : 기황후 집안 동생인 기삼만(奇三萬)이 세력을 믿고 남의 토지를 빼앗고 불법을 자행.

1347년 4월 : 기황후의 친족인 기주(奇柱)는 일찍이 세력을 믿고 포악한 행동을 함부로 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그에게 고통을 당함.

1356년 3월 : 기씨(奇氏) 일족이 황후의 세력을 믿고 횡포하였는데, 어떤 자가 밀고하기를 기철(奇轍)이 쌍성의 반란민과 통하여 당을 만들고 역모를 꾸밈.

1356년 5월 : 기철 등이 세력을 믿고 임금을 업신여기며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여 백성을 한없이 해침. 원 나라 황실과 혼인 관계가 있어 한결같이 모두 따라줌.

1356년 5월 : 기철 등이 빼앗아 가진 인구와 토지에 대하여는, 빼앗긴 사람에게 고발하는 것을 허락하여 각각 원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함.

1356년 6월 : 기철 등이 임금을 능가하는 위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법도를 흔듬. 관리의 임명은 그들의 희노(喜怒)에 좌우. 남이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빼앗았으며, 남이 노비를 가지고 있어도 빼앗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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