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사태

주요 쟁점 (1) 상하이차로의 매각

2013.01.23 22:10 입력 2013.01.23 22:57 수정

흑자기업 왜 팔았나, 고의 파산시켰나, 정리해고 문제 없었나

1954년 ‘하동환자동차제작소’로 출범한 쌍용자동차는 회사 주인이 7번이나 바뀌는 부침을 겪었다. 주인이 바뀔 때마다 크고 작은 논란이 있었지만 오늘날 쌍용차 사태의 시작점으로 가장 많이 지적되는 문제는 2004년 중국 상하이기차공업총공사(상하이차)의 쌍용차 인수다.

쌍용차는 상하이차에 매각되기 전 쌍용그룹이 부실해지면서 1996년 매물로 나왔다. 이후 대우가 1998년 1월 전격 인수해 대우그룹에 편입됐다. 대우그룹에 편입된 뒤 쌍용차는 대우자동차 판매망을 활용하며 판매량을 크게 늘렸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쌍용차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대우그룹이 몰락하면서 쌍용차는 1999년 12월부터 기업 회생절차인 재무구조 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여러 차례 매각 대상 기업을 물색하다 2004년부터 매각작업이 급물살을 탔다. 쌍용차의 실적이 크게 개선된 덕분이었다.

<b>쌍용차 생산라인</b> 경기 평택에 있는 쌍용자동차 코란도C 생산라인에서 지난 10일 직원들이 차량 조립과 검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쌍용차 생산라인 경기 평택에 있는 쌍용자동차 코란도C 생산라인에서 지난 10일 직원들이 차량 조립과 검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쌍용차는 2003년에 3조4173억원의 매출과 2890여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2001년 이후 3년째 흑자행진을 이어갔다. 대형차 체어맨과 스포츠유틸리티차량 코란도가 인기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실적이 개선되자 당시 노무현 정권과 채권단은 매각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2004년 진행된 쌍용차에 대한 첫 인수의향서 모집에 GM과 르노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중국의 란싱그룹, 상하이차 등 8개 업체가 몰렸다. 가장 높은 금액을 써낸 란싱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지만 란싱 측이 이후 협상과정에서 인수가격을 깎자고 나서면서 협상이 무산됐다. 결국 재입찰에 뛰어든 상하이차가 5900억원에 쌍용차를 인수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국내 자동차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당시 상하이차에 쌍용차를 매각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당시 상하이차가 판매량 증대와 차종 다변화를 위해 스포츠유틸리티차량 기술 확보에 혈안이 돼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며 “기술 유출은 물론 향후 ‘먹튀’까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임에도 매각이 되는 걸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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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쌍용차 노조는 기업 매각을 강력 반대했다. 외국 기업에 인수될 경우 고용안정을 보장할 수 없고 기술 유출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독자적인 경영방안을 만들어 채권단에 제시하고 파업도 해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하이차에 인수된 후 쌍용차는 판매 부진과 부실경영이 계속됐고 상하이차마저 철수하면서 다시 파산 직전에까지 몰리게 된다. 노동자 2646명에 대한 대규모 정리해고안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상하이차가 제공한 셈이다.

자동차산업이 갖는 특수성과 기술의 중요도를 고려해 매각 대신 국책은행 등을 통해 정부가 쌍용차에 투자를 했다면 충분히 자체 회생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런 예는 많다. 쌍용차와 같이 대우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대우건설의 경우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인수해 현재 국내 건설업계 3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당시 쌍용차는 자금 여력도 충분했고 유동성 문제도 없었다는 지적이 많다. 한시적으로 공기업화나 국유화가 이뤄졌다면 지금의 쌍용차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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