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서구 대 이슬람 문명 충돌 예견…세계 정치의 새 패러다임 제시

2016.10.18 20:22 입력 2016.10.18 23:13 수정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문명사적 관점에서 국제질서의 변화를 예견한 <문명의 충돌>을 펴낸 미국의 비교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베트남 전쟁 당시 ‘전략촌’ 정책을 수립하고, 지미 카터 정부 때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안보기획조정관을 지내는 등 현실정치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문명사적 관점에서 국제질서의 변화를 예견한 <문명의 충돌>을 펴낸 미국의 비교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베트남 전쟁 당시 ‘전략촌’ 정책을 수립하고, 지미 카터 정부 때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안보기획조정관을 지내는 등 현실정치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전후 70년의 세계적 차원의 사회변동을 이끌어온 힘은 무엇일까. 자본일까, 권력일까, 아니면 이념일까.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이념 대립을 기반으로 한 냉전은 전후 세계정치의 기본 구도를 형성했다. 이 냉전이 1980년대 후반 종언을 고하기 시작한 후 1993년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1927~2008)은 ‘문명의 충돌’이란 논문을 발표해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문의 핵심은 간단하면서도 분명하다. 1980년대까지 이념 대립으로 억눌려온 문명 갈등이 수면 위로 나타나고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었다. 냉전의 종식이 문명의 부상과 이로 인한 문명의 충돌을 가져온다는 헌팅턴의 논리는 신선하면서도 논쟁적이었다. 헌팅턴의 테제는 한편으로 ‘역사의 종언’을 주장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논리를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론 제도에 맞서 문화를 중시하는 논리를 적극 내세웠다.

1996년 헌팅턴은 논문 ‘문명의 충돌’을 바탕으로 한 저작 <문명의 충돌(원제: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을 발표했다. 논문에 이어 이 저작에 대한 찬반 역시 뜨거웠다. 특히 진보적 사회과학자들은 헌팅턴의 논리에 담긴 이원론, 문화중심주의,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했다. 하지만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 <문명의 충돌>은 이 사건을 예견한 탁월한 저작으로 재조명받았고, 다시 한 번 뜨거운 논쟁을 점화시켰다.

새뮤얼 헌팅턴의 대표저작 <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의 대표저작 <문명의 충돌>

■문명의 충돌이란 무엇인가

“새롭게 태동하는 세계 정치 구도에서 핵심적이고 가장 위험한 변수는 상이한 문명을 가진 집단들 사이의 갈등이 될 것이다.” 이 구절은 논문 ‘문명의 충돌’을 관통하는 핵심 아이디어다. 헌팅턴은 냉전 이후의 세계 정치 변화를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기 위해 저작 <문명의 충돌>을 썼다고 밝힌다.

헌팅턴에게 탈냉전 세계에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념·정치·경제가 아니라 문화다. 사람들은 문명이라는 문화적 집단에 자신을 귀속시키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에 따르면, 문명은 가장 광범위한 문화적 실체다. 이 문명은 언어·역사·종교·관습·제도 같은 객관적 요소와 사람들의 주관적 귀속감 모두에 의해 정의된다. 그는 이러한 문명이 ‘우리’와 ‘그들’을 구별하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헌팅턴은 종교에 주목해 세계 주요 문명을 여덟 개로 구분한다. 중화, 일본, 힌두, 이슬람, 정교, 서구,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문명이 그것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논문의 ‘유교 문명’을 저작에선 ‘중화(Sinic) 문명’으로 수정하고, 일본 문명을 독자적 문명으로 설정한다는 점이다.

헌팅턴이 문명을 주목한 까닭은 탈냉전 시대의 세계 정치가 ‘문명의 정치학’으로 특징지어진다는 데 있다. 세계 정치의 중심축이 서구 문명과 비서구 문명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가장 위험한 분쟁이 문명과 문명이 만나는 단층선에서 발생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 저작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미래의 문명 충돌이다. “미래의 가장 위험한 충돌은 서구의 오만함, 이슬람의 편협함, 중화의 자존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할 것”이라는 그의 예측은 널리 알려진 유명한 언명이다.

헌팅턴은 서구와 이슬람권 간의 분쟁에서 비롯된 문명의 전쟁 가능성을 예견한다. 더불어 21세기에 들어서 중국의 도전이 거셀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래의 문명 전쟁을 방지하려면 핵심국들이 다른 문명 내부의 분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고, 핵심국들 간의 타협을 강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충고다.

■<문명의 충돌>을 둘러싼 논쟁

<문명의 충돌>이 지속적으로 화제를 모은 까닭은 이 저작이 발표된 이후 세계사회의 흐름에 있었다. 2001년 9·11 테러는 문명의 충돌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헌팅턴의 예견이 옳았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이슬람국가(IS)와 난민 문제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충돌은 21세기 벽두를 뒤흔들어온 것처럼 보였다. 영국의 브렉시트(Brexit)와 같은 포퓰리즘 부상도 문명의 충돌로부터 그 원인의 하나를 찾을 수 있다.문명 충돌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독일 정치학자 하랄트 뮐러의 <문명의 공존>은 대표적인 비판서였다. 이 저작은 1996년 독일 내 미국문화원에서 뮐러가 헌팅턴과 진행한 토론을 바탕으로 해 출간한 것이었다. 뮐러의 논리는 두 가지였다. 문명 충돌론이 ‘자유세계 대 공산세계’를 ‘서구문명 대 비서구문명’으로 대체한 이분법에 불과하다는 게 하나라면, 문명 간 교류와 문명 내 주류·비주류의 분화를 주목하지 않는다는 게 다른 하나였다. 문명은 충돌한다기보다 공존한다는 게 뮐러의 주장이었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의 비판 또한 경청할 만했다. 성일권이 편집한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에 실린 사이드의 글들을 보면, 문명 충돌론의 중대한 약점은 서구와 이슬람에 대한 과도한 단순화에 있다. 문명 충돌론은 문명에 내재된 다양성과 역동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이면에 비서구사회에 대한 서구사회의 우월의식을 감추고 있다는 게 사이드의 주장이었다. 문명 또는 문화는 인문·사회과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온 주제다. 경제결정론이 제도를 중시하는 시각을 대변한다면, 문화결정론은 의식을 중시하는 시각을 대변한다. 문명 충돌론은 1990년대 문화주의적 접근의 부활을 알린 대표적인 이론틀이다. 국제정치의 측면에서 헌팅턴의 이론에는 미국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사회변동의 측면에서 21세기 미래에 문명의 충돌이 미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 이들에게 문명 충돌론은 한번쯤 진지하게 검토하고 고민해봐야 할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어판 저작은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은 전문번역가인 이희재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뮐러의 <문명의 공존>과 함께 읽어보는 게 좋다. <문명의 공존>은 독문학자인 이영희에 의해 번역됐다.

■한국사회, 저성장·불평등 해결과 지역주의 정치·이기주의 문화 혁신 ‘이중과제’

2000년 새뮤얼 헌팅턴은 로렌스 해리슨과 <문화가 중요하다(Culture Matters)>라는 책을 펴내 <문명의 충돌>에 이어 다시 한 번 세계적 이목을 끌었다. 이 책은 하버드대 국제지역연구학회가 1999년 연 심포지엄 ‘문화적 가치와 인류 발전 프로젝트’에 발표한 논문들을 묶어 출간한 것이다.

사회발전에서 제도가 중요한가, 문화가 중요한가는 오랜 논쟁의 주제였다.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라는 제도를 중시했다면, 막스 베버는 종교를 포함한 문화를 주목했다. 둘 다 중요하다는 절충론이 설득력은 높아 보이지만, 그 강조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는 이론적으로 흥미로우면서도 정책적으로 함의가 큰 이슈다.

헌팅턴은 <문화가 중요하다> 서문에서 문화를 한 사회 내에서 우세하게 발현하는 가치·태도·신념·지향·전제조건으로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사회과학에서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연구, 로버트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 연구, 그리고 헌팅턴 자신의 문명의 충돌 연구는 대표적인 업적들이었다.

<문화가 중요하다>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두 가지였다. 문화가 어느 정도까지 경제·정치 발전에 기여하는지가 하나였다면, 경제·정치 발전을 가로막는 문화적 요인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가 다른 하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이 저작은 ‘문화와 경제발전’(데이비드 랜디스, 마이클 E 포터, 제프리 삭스 등), ‘문화와 정치 발전’(로널드 잉글하트, 프랜시스 후쿠야마, 시모어 마틴 립셋·개브리얼 샐먼 렌즈)을 위시해 ‘인류학적 논쟁’, ‘문화와 젠더’, ‘문화 그리고 미국의 소수 집단들’, ‘아시아의 위기’, ‘변화의 추진’이라는 일곱 개의 주제를 다뤘다.

헌팅턴도 서문에서 지적했듯, 한국 경제발전에서 교육 등 문화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는 점은 서구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널리 공유된 견해였다. 그리고 정치발전에서 집단주의와 권위주의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성장을 가로막아 왔다는 점 또한 꾸준히 제시돼온 주장이었다.

분명한 것은 현재 한국사회에 부여된 혁신의 과제가 이중적이라는 점이다. 저성장과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 혁신은 물론 지역주의 정치와 이기주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문화 혁신이 동시에 요구된다. 이 이중과제를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에 한국사회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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