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기고 (5) 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2012.01.11 21:19 입력 2012.01.12 00:40 수정
엄기호 |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천재 한 명이 수십만을 먹여 살린다’는 망령부터 추방하라

왕따와 학교폭력에 대한 모든 대책은 하나로 귀결된다. 피해자가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으면 교사건 부모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용기를 내고 말을 하는 것이 해결의 시작점이다,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청소년들이 생각하기에는 청소년들의 세계가 전부인 것 같지만 그 세계는 의외로 작고 힘이 없다, 어른들이 개입한다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피해자들에게 말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무고한 죽음이 있고 나면 ‘고민을 말했더라면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운 소리가 나온다.

[10대가 아프다]릴레이 기고 (5) 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그러나 이 말은 사태를 완전히 뒤집어 놓고 있다.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그 절실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초점은 왜 말을 할 수가 없었는가에 맞춰져야 한다. 말을 해봤자 해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따져보자. 과연 피해자가 말을 하면 해결될 수 있었을까? 사실은 반대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번 대구 중학생 사건을 보며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그 학생이 학교에 고통을 호소했더라도 학교는 결코 해결해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아마 별일 아니라고 치부하거나 명확한 증거와 피해 사실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과장이 아니다. 주변의 한 초등학생이 친구들에게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발견한 학부모가 담임에게 사실을 알리고 상담을 요청했을 때 담임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이 바로 그 말이었다.

학교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의 가장 큰 기능은 최선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가장 좋은 교사와 학생은 학교라는 시스템에서 체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최선은 각자의 기량과 노력에 따라 만들어진다. 반면 시스템은 ‘평균’의 질과 수준을 보장해야 한다. 학교는 그 누가 담임을 하더라도 최악의 사고를 예방하고 학생들을 돌보고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학교를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문제는 이 시스템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해 아무도 믿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한마디로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0에 가까운 사회다.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0인 사회에서 사람은 결코 시스템을 향해 호소하지 않는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거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이번 대구에서 학교폭력에 의해 희생된 학생의 유서에 이것이 뼈저리게 나타난다. 그는 유서에서 아빠, 엄마, 형, 교사, 그리고 친구들을 일일이 부르며 ‘내가 그런 이유는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앞에서 밝혔으니 전 이제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제가 진실을 말해서 우리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었지만 제가 진실을 말해서 억울함과 우리가족 간의 오해와 다툼이 없어진 대신, 제 인생 아니 제 모든 것들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무고함이라는 ‘진실’이다.

자신의 무고함과 진실을 죽음으로만 드러낼 수 있는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공론화가 시작되는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아니, 우리는 아직 이 죽음에 대한 공론화를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더더욱 사회가 아니다. 한 소년의 죽음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 사회에 시스템이 없다. 시스템이 없는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우리는 ‘그라운드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무엇보다 최선을 좇는 것이 아니라 평균의 질과 수준을 보장하는 것에 시스템의 목표를 맞춰야 한다. 학교의 명성과 위신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서울대에 보냈는가에 맞춰져 있는 한 학교는 언제나 그 에너지의 절대다수를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대신 나머지 아이들은 방치되거나 혹은 사고나 치지 않도록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고 만다. 반대가 되어야 한다. 이 나머지 학생들이야말로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이들의 안전과 성장을 중심에 놓고 학교에 누가 있어야 하고 어떤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는지를 토론하자. 학교를 이들이 ‘사는 곳, 살 만한 곳’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천재 한 명이 수십만을 먹여 살린다’며 한 명만 돌보고 수십만을 내팽개치고 있는 수월성 교육이라는 망령부터 당장 추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이 죽음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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