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아동 대부분 “저항 못한 내 잘못” 자책감 시달린다

2012.09.04 22:10 입력 2012.09.05 00:49 수정

성폭행 피해 15명 면접… 1~2년 뒤에도 극심한 트라우마

ㄱ양(13)은 평소 누군가 자신을 욕하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 “너, 내 욕 했지”라고 묻는 때도 있다. 친구는 당연히 “안 했다”고 하지만 ㄱ양은 믿지 못한다.

입양아인 ㄱ양은 8살 때부터 6년간 양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자신이 성폭행당한 사실을 남들이 욕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ㄱ양에게는 문득문득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냥 잠시 멍하게 있으면 오래전 기억과 생각들이 머릿속에 막 지나가요. 아무 생각 없이 있으면 휙 지나가고, 휙 지나가고 그래요.”

그렇게 한번 떠오른 기억은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 반복돼 지금도 ㄱ양을 괴롭힌다.

<b>“아이들을 지켜주세요”</b> 아동 성폭력 추방을 위한 모임인 ‘발자국’의 한 회원이 4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아동 성폭행 추방을 위한 촛불집회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참석자들은 아동 성범죄자들의 처벌을 강화해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것을 요구했다. | 연합뉴스

“아이들을 지켜주세요” 아동 성폭력 추방을 위한 모임인 ‘발자국’의 한 회원이 4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아동 성폭행 추방을 위한 촛불집회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참석자들은 아동 성범죄자들의 처벌을 강화해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것을 요구했다. | 연합뉴스

ㄱ양은 “한번 생각이 나면 머리에 남아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간다. 마음속으로는 멈추고 싶은데 머릿속에서는 계속 영상이 떠오른다”며 “마음과 머릿속이 반대로 움직인다”고 했다.

그냥 눈물이 나면 울고, 울다 보면 또 답답해져서 창문을 열어놓고 멍하니 밖을 쳐다본다. 흉기로 자해를 하기도 한다.

ㄱ양은 “피를 볼 때마다 뭔가 나쁜 것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성폭력을 당한 아동들은 1~2년이 지난 뒤에도 극심한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기숙 전 광주해바라기아동센터 소장은 박사논문 <성폭력 피해아동의 피해경험>에 이 같은 실태를 공개했다. 신 전 소장은 10년 이상 성폭력 전문상담원으로 일하며 광주해바라기아동센터 소장을 지냈다.

신 전 소장이 면담한 ㄴ양(14)은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결혼도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1년 전 당한 사건 때문이다.

ㄴ양은 학교 선배 3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친구에게 또다시 성폭행을 당했다. ㄴ양은 그 모든 사건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ㄴ양은 “그때 뿌리치지 못하고 무서워서 당한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엄마 몰래 밤에 나가 놀다 벌을 받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성폭행 피해아동 중에는 한꺼번에 폭식하거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거식증세를 보인 사례도 있다.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거나 악몽·불면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평소 무기력감을 호소하거나 순결 상실감에 고통받고 있다는 아동도 있었다.

성 지식이 없는 피해아동은 자신이 피해자인데도 오히려 자책하면서 주변의 눈치를 봤다. 아이들은 사건 발생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가해자의 성행동이 더럽고, 비정상적이며, 그 상황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공통적으로 하고 있었다.

신 전 소장은 “성폭력 피해아동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에 의존하거나 가출, 자해 등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신체적인 상처는 치유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신적인 트라우마는 오랫동안 이들을 괴롭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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