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아동 15명 트라우마… “종일 안 먹거나, 두세 그릇씩 막 먹어요” 거식·폭식에 고통

2012.09.04 22:06 입력 2012.09.04 23:25 수정

주변에 ‘알려질까’ 불안… 정서·행동적 이상 증세, 남성 혐오·결혼 부정까지

“우리 사회 그릇된 시선이 피해자 자책하게 만들어”

성폭력 피해를 당한 아동들은 시간이 지나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이 아이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주위의 시선과 죄책감 역시 성폭력만큼이나 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신기숙 전 광주해바라기아동센터 소장은 피해아동들과의 면담에서 드러난 이런 심리를 박사논문 <성폭력 피해아동의 피해경험>에 정리했다. 연구에는 아동성폭력전담센터 3곳과 성폭력피해자 보호시설 1곳에서 만난 피해아동 15명이 참여했다. 아이들이 성폭행을 당한 최초 연령은 8~14세였으며, 면담 시기는 피해를 당한 지 6개월~2년이 지난 후였다. 아이들 중 8명은 친족으로부터, 7명은 친족 외의 사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b>친구의 빈자리</b> 4일 오후 전남 나주 초등생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 ㄱ양(7)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그네를 타고 있다. 사건 이후 ㄱ양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말수가 줄어들고 밥을 먹지 않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 연합뉴스

친구의 빈자리 4일 오후 전남 나주 초등생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 ㄱ양(7)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그네를 타고 있다. 사건 이후 ㄱ양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말수가 줄어들고 밥을 먹지 않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 연합뉴스

■ 잊히지 않는 악몽

피해아동들은 면담에서 정서적·행동적 이상을 호소했다. 시시때때로 슬퍼지고, 살고 싶은 의욕이 사라지며, 항상 불안감을 느낀다고 공통적으로 얘기했다. 아이들은 당시를 잊고 싶은데 잊히지 않아 짜증이 나고, 일상적으로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난다는 아이도 있었다.

친아버지로부터 8개월간 성폭행을 당한 ㄷ양(14·첫 피해 당시 13세)은 폭식증세를 보였다. 배가 부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계속 음식을 입에 넣었다.

의붓아버지에게 9개월 동안 성폭행을 당한 ㄹ양(15·당시 14세)은 폭식과 거식 증상을 번갈아 보였다. ㄹ양은 “안 먹을 때는 하루 종일 안 먹고, 먹을 때는 두세 그릇씩도 먹고, 먹고 또 먹고 낑낑댔다”고 말했다.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사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ㅁ양(13)은 행동 통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ㅁ양은 “옛날에는 애들이 건드려도, 시끄럽게 해도 그냥 웃으며 받아줬는데 지금은 옆에서 조금이라도 떠들면 괜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화를 낸다”고 말했다. 감정이 극히 예민해진 것이다.

아이들은 당시 상황이 불쑥불쑥 떠올라 견디기 힘들다고 괴로움을 호소했다. 드라마나 영화 속 남녀의 신체접촉 장면만 봐도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가만히 있을 때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친아버지와 삼촌으로부터 2년간 성폭행을 당한 ㅂ양(15·당시 12세)은 수업시간에도 당시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ㅂ양은 “공부를 하다 멍하게 있으면 그날의 생각이 났다”며 “칠판 위로 가해자랑 했던 당시의 영상이 떠올랐다”고 했다.

■ 고통을 더하는 사회의 시선

피해아동들이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피해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이었다. 또래 관계를 중시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친구로부터 받는 평가는 절대적이다. 사실이 알려졌든, 그렇지 않든 피해아동들은 주변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ㅅ양(13)은 교문을 들어설 때 아이들이 쳐다보는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이들이 뒤에서 수군거리고 손가락질한다고 생각했다. 신기숙 전 소장은 “피해아동들은 소문이 퍼지거나 퍼지지 않은 경우 모두 대부분 전학을 선택하고, 중퇴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남성을 모두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을 갖기도 한다. 자연스러운 성적 행동을 ‘더럽고 무서운 것’으로 보는 인식도 생겨났다. 학교 선배 3명으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한 ㄴ양은 “남자는 무조건 다 성관계를 원하는 것같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ㄹ양은 “더럽다는 생각이 자꾸 드니까 (성적 행동만 보면) 헛구역질이 나왔다”고 했다.

결혼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혼을 하면 가해남성들이 찾아와 ‘내가 성폭행했던 애’라고 말할 것 같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신 전 소장은 “보호받아야 할 성폭행 피해아동이 ‘당한 내가 잘못’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데는 한국 사회의 잘못된 인식도 한몫한다”고 말했다. 신 전 소장은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면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설명해야 하고, 설명을 못하면 피해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한국 사회의 기본적인 인식이 아이들을 힘들게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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