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골적인 진보·여성·외국인 혐오… “진보 비방이 재미있어 보수 자처”

2013.06.02 22:34 입력 2013.06.04 17:34 수정

동의하면 ‘추천’, 동의하지 않으면 ‘민주화’ 버튼을 눌러라? 2010년 ‘민주화’라는 용어를 ‘비추천’, ‘반대’ 등의 의미로 사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등장했다. 민주화 수가 적고 추천 수가 많으면 해당 게시물은 ‘일간베스트’ 코너로 옮겨진다. 반대로 ‘민주화’ 수가 많으면 조롱 대상이 된다.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라는 이름의 이 사이트는 ‘민주화’ 논란에도 2년 만에 일일 평균 게시물 조회수가 129만회에 달하는 사이트로 성장했다.

(1) ‘베츙이’ ‘병신’ 스스로를 비하

‘베츙이’는 일베 회원들이 ‘병신’과 함께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말이다. 그 반대는 ‘X선비’로 ‘옳은 소리는 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름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일베 회원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은 이런 이중성에 대한 조롱으로 읽힌다.

일베 회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활동을 살펴봐야 한다. 대표적인 용어가 ‘민주화’이다. 이들은 이를 ‘하향평준화’ ‘획일화’ ‘몰락’ 등의 의미로 사용한다. ‘김치녀’(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 ‘노운지’(투신자살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비하하는 표현), ‘전땅크’(전두환 전 대통령을 미화하는 표현) 등도 이들이 만든 용어들이다.

일베 회원들은 2012년 대선 기간에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를 ‘문죄인’이라 부르며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게시물을 쏟아냈다. 국제 해커그룹 어나니머스가 북한의 대남선전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해킹해 회원 명단을 공개하자 이들의 ‘신상털이’에 나섰다. 지난달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를 ‘홍어(호남 주민들을 비하하는 표현)택배’ 등으로 모욕하는 글을 올렸다. 초등학교 교사인 일베 회원이 자신의 신분을 인증하며 어린이를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로린이’(로리타+어린이의 합성어)란 표현을 사용한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리틀 싸이’ 황민우군의 베트남 출신 어머니를 비하한 게시물도 올렸다.

[‘일베 현상’에서 한국 사회를 본다]노골적인 진보·여성·외국인 혐오… “진보 비방이 재미있어 보수 자처”

(2) 활동따라 계급 부여해 ‘경쟁 유도’

일베는 국내 최대의 커뮤니티 사이트 ‘디시인사이드’(디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디시는 1999년 디지털카메라 정보 제공 사이트로 출발했다. ‘사진’과 ‘텍스트’를 결합한 게시물에 댓글로 반응을 보이는 독특한 문화가 디시에서 첫선을 보였다. 디시는 특정 주제별로 사진을 올리는 다양한 갤러리로 분화됐다. 디시의 각 갤러리에서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삭제되는 게시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2010년 일베가 만들어졌다. 특히 야구갤러리, 정치사회갤러리, 코미디프로그램갤러리의 영향력이 강했다.

이들은 ‘게이’(게시판 이용자)라고 부르며 서로 반말을 한다. 일베 회원들은 활동에 따라 등급을 부여받는데, 이는 선정적 게시물을 경쟁적으로 올리는 데 일조했다. 지난달 대구 홈플러스 매장 컴퓨터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코알라 사진을 합성한 ‘노알라 사진’을 올린 직원은 경찰 조사에서 “일간베스트 코너에 가고 싶어 그랬다”고 답했다. 일베는 진보 혐오·여성 혐오·외국인 혐오 등의 행보 때문에 ‘보수극우 사이트’로 불리기도 한다. 일베 회원은 10대 학생이 많고, 20~40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전문직 종사자도 다수 있고 운영자는 현직 의사로 알려져 있다.

(3) ‘홍어’ ‘민주화’로 호남·진보 조롱

일베에서 사용해 문제가 됐던 ‘홍어’ ‘민주화’ 등은 원래 디시에서 발생한 용어다. ‘홍어’는 야구갤러리(야갤)에서 KIA 타이거즈 팬들을 조롱할 때 사용하는 용어였다. LG를 ‘꼴지’, 롯데를 ‘꼴데’, 한화를 ‘치킨’, SK를 ‘슼충’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보수 성향인 정치사회갤러리(정사갤)에서 이 용어에 정치색을 덧씌웠다. 정사갤은 한때 디시에서도 대표적인 진보성향 갤러리였다. 한나라당이 주된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었고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에도 참석했다. 정사갤에서는 같은 해 6월 전여옥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을 초청해 ‘맞짱토론’을 벌였는데, 게시판에서는 비판과 조롱을 일삼던 논객들이 전 대변인의 논리적이고 차분한 대응에 제대로 반격을 하지 못했다. 다수 정사갤 이용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진보성향 이용자들에게 등을 돌렸다.

보수화된 정사갤에서는 한나라당 대신 열린우리당과 노무현·김대중 정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빨갱이 낙인 찍기’ ‘지역주의 조장’ 등 진보 진영에서 금기시된 행동이 인기를 얻었다. 이들은 ‘홍어’와 ‘민주화’ 용어를 수입해 민주당 정권과 지지자들을 비판하는 데 사용했다. 일베는 여기서 더 나아가 ‘민주화 버튼’을 통해 ‘민주화’를 ‘비추천’ ‘획일화’란 반어적 의미로 만들었다.

(4) ‘5·18 폄훼’ 등 막장배설 문화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의 시신 사진을 유머 소재로 삼는 등의 행태는 디시 코미디프로그램갤러리(코갤)의 유산이다. 본래 코미디프로그램 리뷰를 올리는 곳이었으나, TV 개그프로그램 <무한도전> 팬들과 반(反)<무한도전> 팬들이 반목하면서 공격적 성향으로 변했다. 여기에 막장사건사고갤러리 이용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치정극, 성폭행 등의 사건사고도 ‘코미디’로 인정하고 조롱하며 노는 문화가 생겨났다. 하급 유머를 의미하는 ‘드립문화’를 만들어낸 것도 코갤 이용자들이었다. 코미디프로그램에서 순간적으로 구사한 유머가 재미가 없고 썰렁하기만 할 때 사용하는 ‘개드립’(개 같은 애드리브)이라는 표현에서 시작돼 ‘패드립’(패륜 애드리브)과 ‘고인드립’(고인을 모욕하는 애드리브)이 나왔다. “참병신이 되자”는 구호로 일상은 물론 넷상에서도 존재하는 도덕과 금기를 희화화하는 것이 코갤의 콘셉트이다. 학교폭력 피해자에게 ‘빵셔틀’이란 이름을 붙이거나, ‘부모의 생명과 300억 중 나라면 300억을 택한다’는 게시글 등이 대표적이다. 개똥녀, 루저녀 등 각종 사건사고에 등장하는 여성에게 ‘○○녀’라는 이름을 붙이고 신상을 캐는 ‘신상털이’ 문화도 여기서 주도했다.

(5) ‘광우병 촛불’ 기점 보수로 결집

일베는 기본적으로 ‘유머’를 공유하는 사이트다. 진보를 비난하는 것도 같은 이유로 풀이하는 사람이 많다. “보수이기 때문에 진보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를 비방하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에 보수를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광우병 촛불집회’가 기점이었다. ‘아고라’에서 통용되던 ‘쥐명박’ ‘쥐박이’ 등의 표현에 염증을 느낀 누리꾼들이 ‘보수’라는 이름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광우병은 물, 공기로도 전파된다’는 등의 소문도 진보 진영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2010년 천안함·연평도 사건도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더해 디시에서 만들어낸 ‘홍어’, 일베가 재창조한 ‘민주화’ 등의 신조어를 사용하는 것이 ‘재밌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홍어’ ‘민주화’를 사용하면서 ‘호남’과 ‘진보 진영’이 공격 대상이 됐다.

일베에서 쓰는 또 다른 주요 용어인 ‘선비질’은 자신들의 재미 찾기에 제약을 가하는 일체의 담론을 거부하는 반지성주의 문화가 극단화된 형태라 볼 수 있다. 일베는 여성주의, 민주주의, 인권 등의 논리를 모두 ‘선비질’로 몰아붙이며, ‘김치녀’ ‘노운지’ 등의 유머를 구사한다. ‘선비질’만 하지 않으면 사이트 내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6) 불완전한 민주주의의 역반응

일베를 보는 대중의 시선은 곱지 않다. 지난 1월에는 축구 커뮤니티 ‘아이러브사커’를 중심으로 진보성향 유머사이트 ‘오늘의 유머’, 여성커뮤니티 ‘베스티즈’ 등이 합심해 “일베를 ‘농업화’(일베가 쓰는 산업화라는 용어를 빗대 황폐화나 몰락의 뜻을 담고 있음)하자”며 공격한 적도 있다. 하지만 한 아이돌 가수가 ‘민주화’ 발언을 해 논란이 된 것처럼 일베식 유머는 일베를 이용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도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지난해 5월에는 가수 김진표씨가 ‘운지’를 단순히 ‘떨어진다’는 의미인 줄 알고 방송에서 사용했다 본뜻을 알고 사과한 일도 있었다.

문화비평가 최태섭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386세대가 민주화를 사유하고 사회경제적으로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확산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역반응”이라고 평했다. 평화연구자 임재성씨는 1999년 군가산점 제도 폐지 논란 당시 이화여대 총학생회를 남성들이 공격했던 일을 거론하며 “(일베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오래 존재하던 여성 혐오 등의 정서가 표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베 이용자들을 보수라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디씨>의 저자인 인터넷하위문화연구자 이길호씨는 “초창기 일베는 ‘보수’라는 이름을 스스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언론 등에서 ‘보수’라는 이름으로 추인됐다. 지금도 정체성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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