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공익위원도 해고당해 봐야 노동법 존재 이유 알 것”

2015.07.13 22:09 입력 2015.07.13 22:47 수정
강진구 노동전문기자(공인노무사)

‘부당해고 구제신청’ 중인 김세곤 전직 지방노동위원장

▲ 폴리텍 학장 임명 후
학교 측, 정년 이유로 미리 사직서 받아

‘부당 노동계약’ 구제신청
행정·사법기관과 2년간 싸우고 있지만
모두 사용자 손 들어줘

▲ 지노위가 잘못 끼운 첫 단추
대법서도 고쳐지지 않아
노동 관료들의 ‘관성’ 체감

“노동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노동위원회는 그렇다쳐도 법원 판사들까지 노동법 기본을 무시한 채 판결하는 걸 보고는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김세곤 전 한국폴리텍 강릉캠퍼스 학장(62·행시 27회)은 지난 10일 “해고노동자 신세가 되어 보니 노동부에 있을 때 미처 몰랐던 게 많이 보인다”고 말했다. 전남지방노동위원장을 끝으로 고용노동부에서 25년의 공직생활을 마친 그는 2011년 9월 임기 3년의 강릉대학장에 임명됐으나 1년10개월 만에 면직됐다. 임명될 때 60세가 되는 날 그만두기로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폴리텍에서는 ‘정년이 60세이니 임기와 상관 없이 60세가 되는 날짜로 사직서를 써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6개월 후 보니 60세가 넘어 임명되는 사람도 있더군요. 정년이 없었던 겁니다.”

전남지방노동위원장을 지낸 김세곤 전 폴리텍 강릉대학장이 지난 9일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회관 앞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해고노동자로 2년간 노동위원회와 법원을 다녀보면서 노동부에서 근무할 때 미처 몰랐던 것을 많이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전남지방노동위원장을 지낸 김세곤 전 폴리텍 강릉대학장이 지난 9일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회관 앞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해고노동자로 2년간 노동위원회와 법원을 다녀보면서 노동부에서 근무할 때 미처 몰랐던 것을 많이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김 전 학장은 정년을 60세로 믿게 해서 사직서를 미리 제출받은 것은 부당한 노동계약이라 판단하고 2013년 7월 서울지노위에 구제신청을 했다. 전직 지노위원장이 ‘해고노동자’가 돼 나타난 것이다.

“다른 부처도 아니고 노동부 소속기관에서 노동법을 위반한 사안입니다. 폴리텍은 ‘60세 이전에 임명되면 60세에 그만둬야 하고 60세 넘어서 임명되면 임기 3년을 다 채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차별적 정년 관행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공익위원들은 ‘60세까지 해먹었으면 되지 않았느냐’는 식이에요. 처음부터 제대로 심문할 생각은 없었던 거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서울지노위는 ‘지역대학장은 노동자로 볼 수 없다’며 각하결정을 내렸다.

“뻔하죠. 노동부 눈치 봐야 하는 공익위원들이 (노동부가) 잘못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지역대학장은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각하해버리면 빠져나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앞서 순천 대학장 부당징계 사건에서 중노위가 ‘지역대학장은 노동자’라고 결론을 내렸거든요. ‘결정례가 있다’고 했는데 조사관은 보고서에도 적지 않고 깔아뭉갠 거죠.”

그는 중앙노동위에 재심을 신청했다. 노동자성은 인정받았지만 그뿐이었다. 폴리텍 측은 지역대학장 정년에 대해 말을 바꿨고 공익위원들은 다시 사용자 손을 들어줬다.

“공익위원이 폴리텍 이사에게 ‘지역대학장은 정년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1급 상당 직원으로 간주해 정년이 60세’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60세가 넘어 임명된 사람은 뭐냐’고 하니까 ‘특별한 공로가 있는 분들’이라고 해요. ‘정년이 60세라면 처음부터 60세에 맞춰 임명장을 주면 되지 왜 미리 사직서를 받았느냐’고 하니 ‘대외적으로 임기 3년이 보장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상식 밖 답변에 공익위원도 짜증을 냈는데 결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 이긴 겁니다.”

행정소송이 시작되고 나서 폴리텍은 지역대학장의 정년에 대해 또말을 바꿨다. 지역대학장은 ‘60세 정년 적용자’(1유형)와 ‘60세 이후에도 근무할 수 있는 자’(2유형)로 나눠 정년을 운영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취업규칙에는 폴리텍 주장을 뒷받침할 아무런 규정이 없었다. 하지만 중노위 재심취소 소송을 맡은 대전지법은 ‘취업규칙상 정년 규정과 관계없이 공무원 출신의 경우(1유형) 60세까지만 근무하도록 하는 관행이 있었고 원고는 관행을 알고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라며 폴리텍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다. 판사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노동법 원칙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절감한 순간이었다.

“나는 정년이 60세로 알고 있었을 뿐이에요. 취업규칙에 정년이 없는 줄 알았다면 사직서를 쓸 이유가 없지요. 더구나 사직서를 제출받아 60세에 그만두게 하는 것은 위법한 관행입니다. 그런데 판사는 폴리텍 이 취업규칙에도 명시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정년을 2가지로 운영하며 공무원 출신만 차별적으로 60세 정년을 적용한 관행을 인정한 거죠.”

김 전 학장은 임기 3년을 한 달 반 정도 앞둔 지난해 7월 항소했다. 하지만 이번엔 판사가 선고 날짜를 한 차례 연기한 후 임기가 만료된 후인 지난해 10월 말 ‘구제 실익이 없다’며 각하결정을 내렸다. 행정소송 중 계약기간이 지나면 부당해고 주장은 무조건 각하될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의 설움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상고심을 앞두고 KBS 정연주 전 사장 사례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대법원은 2012년 정 전 사장 사건에서 ‘임기만료로 지위를 회복할 수 없더라도 보수 지급을 구할 수 있는 경우 구제 실익이 있다’고 판단한 바 있다. 김 전 학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도 재판받을 권리에서 차별을 받을 이유가 없다’며 상고장을 제출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심리불속행 결정을 내렸다. 상고 이유를 들여다볼 가치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남은 것은 민사소송뿐이었다. 하지만 지난 3월 서울서부지법은 또다시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취업규칙에 정년조항이 없으면 정년에 제한이 없다’고 한 대법원 판례도 무시됐고, 앞서 사직서를 제출받아 60세에 그만두게 한 사례는 딱 1차례 있었는데도 이를 ‘관행’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취업규칙에 정년이 없어도 관행으로 미리 사직서를 제출받아 60세에 그만두게 할 수 있다면 노동부가 구태여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요건을 완화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을 것”이라며 어이없어 했다.

2년간 행정·사법기관을 거치며 받은 판정 결과는 어느덧 ‘6 대 0’. 그는 지방노동위원회에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노동사건은 중앙노동위를 거쳐 대법원까지 가도 ‘관성’이 붙어 쉽게 고쳐지기 힘든 것임을 노동관료 출신으로서 생생히 체감했다고 했다. 지난 5월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하고 변호사 없이 ‘나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그는 노동법과 정의의 의미에 대해 다시 공부하고 있다.

“판사나 공익위원들도 해고노동자 입장이 되어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노동법이 누굴 위해서 존재하는 법인지 고민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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