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독재헌법에도 빨갱이 마구 죽일 조항 없었다”

2018.07.22 09:47
글·원희복 선임기자

반헌법행위자열전 책임편집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우철훈 선임기자

반헌법행위자열전 책임편집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우철훈 선임기자

제70주년 제헌절을 맞아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7월 1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반(反)헌법행위자열전> 1차 보고회가 그것이다. 2015년 제헌절을 맞아 반헌법행위자를 역사의 재판정에 세우겠다며 시작한 이 사업은 지난해 7월 집중검토 대상자 405명을 발표하고 이번에 1차로 115명을 선정한 것이다. 이 반헌법행위자열전 책임편집인이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60)다.

“나도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활동했지만 가해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우리 현대사에서 권력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죽은 피해자가 수백 명이 넘는다. 그런데 진상조사를 했음에도 때린 사람, 죽인 가해자가 없다. 모두 …(말 없음표)다. 과거사 청산작업이 해원 즉 원한을 푸는 작업이라 하는데, 누구에게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데 해원이 되겠는가. 그들을 현실적으로 처벌하고 감옥에 보내지 못하지만 역사의 법정에는 세워야 한다. 역사의 공소장에 ‘…’로 남길 수 없는 것 아닌가. 우리는 그 ‘…’에 이름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 정부는 관심 없어

권위주의 정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까지 갔던 피해 당사자 김대중·노무현도 그들을 처벌·단죄하지 못했다. 흔히 역사에는 공소시효가 없다고 하지만 이들의 이름조차 적시하지 못했다. 사실 이 작업은 정부 차원에서 할 일이다. 지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하면 딱 맞다. 그러나 정부는 관심이 없다. 이 작업에는 강창일·김종대·노회찬·신경민·심상정·원혜영·이종걸·전해철·천정배·최경환 의원 등 정치인이 함께하고 있다. 정치인이 참여한다고 인물 선정에서 정치적 고려는 없다.

-반헌법행위자 판단·선정에 여야의 정치적 기준이 개입하나.

“우리는 잣대가 분명하다. 이승만은 물론 박정희 유신독재 시대에도 헌법이 존재했다. 이승만 제1공화국 헌법 어디에도 ‘빨갱이’를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는 조항이 없다. 유신헌법이 아무리 독소조항이 많아도 아무나 잡아다 고문하도록 하지 않았다. 독재·민주 구분은 편 가르기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당시 헌법을 기준으로 삼으니 논쟁이 있을 수 없다.”

-선정 대상자가 ‘대한민국의 공직자 또는 공권력 위임을 받아 일정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돼 있다. 제주 4·3에서 악명이 높았던 서북청년단 등은 포함되는 것인가.

“서북청년단의 경우 구체적으로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 특정하기 힘들다. 단장 문봉제는 올라가 있는데 제주 4·3에 관여한 김 모는 구체적 근거가 나오지 않아 특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서북청년단 출신이 당시 경찰·검찰·특무대·육사 등으로 많이 들어갔다. 서북청년단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포함됐다.”

-처음 대상으로 선정한 405명에서 이번에 115명을 발표했다. 나머지 사람은 빠지는 것인가.

“아니다. 일단 조사를 마친 115명을 발표한 것이다. 405명 중 구체적 근거가 없으면 빠지기도 하겠지만, 추가되는 사람, 아마 서너 명이 추가될 것이다. 과거 <친일인명사전> 제작 때 하도 소송을 많이 당해 신중하게 확실한 근거를 찾고 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안 했다, 억울하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작업에는 현대사 전문가 상임 10여명, 비상임까지 합하면 20여명이 매달리고 있다. 대상을 넓히고 싶어도 ‘비용’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이 연구인력으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초 1년에 150명 정도를 선정할 계획을 했지만 ‘비용’ 때문에 조금 늦어져 100명 정도를 확인하고 있다. 그는 후원금 계좌(국민은행 006001-04-198120·(사)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좀 꼭 써달라고 요청했다.

이번 대상자 발표에서 관심을 끈 것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다. 최근 사법농단 문건이 나오면서 관심이 더 높아졌다. 그러나 편찬위는 이미 지난해 2월 현직 양 대법원장을 반헌법행위자로 지목했다.

“지난해 2월 당시 현직 대통령과 대통령 권한대행, 거기에 양승태까지 넣는 것은 사실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양승태는 뺄 사안이 아니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긴급조치 사건은 제외하고 간첩조작 사건만 봤다. 양승태는 간첩조작 사건 판결에 6건(1·2심)이나 관여했다. 양승태는 판사 시절에도 ‘재판거래’에 능했던 인물이다.”

한홍구 교수와 20여명의 연구원이 이곳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작업을 하고 있다./우철훈 선임기자

한홍구 교수와 20여명의 연구원이 이곳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작업을 하고 있다./우철훈 선임기자

진상조사 주력, 서훈 취소 운동도
한 교수는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해 ‘과거 청산 없는 민주화가 가져온 패악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독립성이 강한 대법원을 만들었는데, 사법부 과거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독재에 부역한 판사들이 사법부를 장악,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했다는 것이다.

-이번 인물 발표에서 가장 고심했거나 특이했던 인물은 누구인가

“양승태에 가려 부각되지 못한 인물이 3명 있다. 친일 경찰 출신인 한경록은 경북도경국장을 하면서 6·25 때 부역자 학살, 전남도경국장을 하면서 빨치산 토벌로 민간인을 대거 학살한 인물이다. 지금까지 잘 안 알려져 있었다. 미국 <라이프>

지에 학살한 사람 목을 베어 들고 있는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또 한 사람은 이승만 비서인 박찬일이다. 이승만 시대 국정농단의 주인공 격인데 지금까지 언급이 안됐다. 조봉암 살해의 배후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양두언으로 동베를린 사건 때 독일참사관, 그 후 주미공사를 했는데 양국에서 모두 추방됐다. 하지만 김형욱·신직수 중정부장 아들 뒤를 봐준 대가로 승승장구했다. <동아일보> 광고탄압과 코리아게이트를 일으킨 주역이기도 하다.”

-이들의 이름을 적시해 역사법정에 세우는 작업 외에 할 일은 무엇인가.

“이들의 만행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 간첩조작 등을 통해 서훈을 받았다면 당연히 국가는 이를 취소해야 한다. 우리는 진상조사에 주력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서훈 취소 운동을 벌일 것이다.”

-본인이나 유족의 반론권도 충분히 보장하나.

“사전 검토, 반론 제기 기회를 줄 것이다. 자료상태에서 하려고 했는데 오해 소지가 있어 원고가 마무리된 상태에서 할 것이다. 반론을 받아 반영할 것은 반영할 것이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이 나올 때 친일파 대부분이 사망한 뒤였다. 그래서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이들이 생존하고 있을 때 역사의 법정에 세워야 하지 않을까.

“계획대로 작업하면 책은 4~5년 후 나올 것이다. 400명 정도를 10권에서 12권 정도 분량으로 만들 것이다. 책의 편집을 어떻게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한 교수는 1959년 서울 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놀라울 정도로 ‘좋은’ 가문이다. 조선시대 <동국지리지>를 쓴 역사학자 한백겸이 14대 할아버지이고, 할아버지 한기악은 <동아일보> 창립멤버이자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다. 부친은 유명한 역사·법률출판사인 <일조각>을 운영했다. 외할아버지는 한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이고, 이모부는 박정희 정부 시절 박동진 외교부 장관이다. 이밖에 형제·사촌에 서울대 교수가 수두룩하다. 아마 그가 보통의 역사학자가 됐으면 서울대 교수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골치 아픈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특히 김일성 연구를 하는 바람에 대학교수 자리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연구가 자유로운 성공회대에 그가 자리를 잡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좌파학자’와 ‘보수학자’란 평가 혼재
사실 그의 성장배경은 매우 보수적이다. 그러나 1978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한 그는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접한다. 그는 “광주항쟁이 내 인생을 지배할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랬던 것 같다”면서 “누구는 광주도청을 지켰는데 나는?이라는 죄의식이 우리 세대에 있다”고 고백했다. 그가 현대사 특히 공산주의 운동사를 공부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그때부터다. 대학원 석사과정인 1986년 번역한 것이 미국 스칼라피노 교수와 하와이대 이정식 교수가 쓴 <한국공산주의운동사>다.

-최근 개정판이 나왔지만 이 책은 김창순·김준엽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와 함께 지금껏 공산주의 연구서로 쌍벽을 이루고 있다.

“당시 현대사로 박사학위를 하는 사람이 없어 석사과정을 8학기나 했다. 출판사를 하는 선배가 번역해 보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이 평생 공부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해 일일이 영문·일문·한글 원전을 찾아가며 번역했다. 내가 좋아서 했으니 그렇게 했지 번역료 받아 생활하기 위해서였다면 그렇게 정성껏 못했을 것이다.”

-미국 워싱턴대에서 ‘30년대 김일성 항일투쟁 민생단 사건’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김일성 연구는 대단한 파격 아니었을까. 왜 공산주의 연구에 관심을 가졌나.

“진보적 근·현대사를 복원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농반진반으로 나는 20대부터 원로사학자를 자처하며 강연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연을 다닐 때 1·2번째 질문은 꼭 ‘북 김일성은 진짜냐, 가쨔냐’가 나온다.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공산주의, 특히 김일성 연구는 일종의 지명방어전 같았다.”

-그 질문은 일종의 ‘북한 바로알기’ 아닐까. 그 질문은 지금도 계속 유효한 것 같다.

“그렇다. 북한 붕괴론의 아버지는 북한 괴뢰론이고 그것은 ‘김일성은 가짜다, 소련의 꼭두각시다’라는 가짜론에 근거한다. 북한 붕괴론·가짜론·괴뢰론 모두 북의 역사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을 모르니 북·중관계도 이해하지 못한다. 모택동의 아들이 한국전쟁에서 죽었다는 것은 알지만, 김일성 바로 아래 동생이 중국 혁명 과정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북은 중국 동북해방전쟁의 일등공신이다. 우리가 한·미관계를 혈맹이라 말하지만 북·중관계는 그 이상이다.”

한 교수는 역사학자 E. H. 카가 말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정의에 공감한다. 그는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개인을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보인다”면서 “또 역사를 알면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극복할 믿음과 용기를 얻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좌파학자’라는 평가와 정반대 ‘보수학자’라는 평가가 혼재돼 있는 것을 알고 본인도 수긍한다고 말했다. 그는 “함석헌 선생은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했고, 리영희 선생과 문익환 목사도 좌·우 대립기에 미군 통역장교를 했다. 백낙청 선생도 하버드대학 다니다 군대에 가려고 귀국한 사람”이라며 “그런데 지금 이런 분들이 종북좌빨의 수괴로 취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보수는 사회에서 일종의 주인 격인데 우리 보수는 주인을 해보지 않고 친일파 앞잡이를 하던 세력”이라며 “우리 보수는 사회에 대한 책임보다 사익을 취하기 위해 힘센 놈을 쫓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고 일갈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공동체를 위해 책임질 보수로 초대 부통령 이시영, 일부 논란이 있지만 김성수, 그리고 일관된 의회주의자이면서 반독재 저항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보수의 가치를 지킨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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