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만의 무죄, 지연된 정의도 정의다

2019.03.24 09:08 입력 2019.03.24 09:20 수정
이하늬 기자

현우룡 할아버지(97)가 3월 19일 제주도 자택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하늬 기자

현우룡 할아버지(97)가 3월 19일 제주도 자택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하늬 기자

2017년 4월 19일, 현우룡 할아버지(97)가 제주지방법원을 찾았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였다. 제주지법 앞에는 현 할아버지뿐 아니라 다른 ‘할망’ ‘할아방’도 많았다. 이들 옆에 선 젊은 남성은 ‘4·3 당시 군법회의 재심청구서’라고 쓰인 종이가 붙은 봉투를 들었다. 이들은 “더 늦기 전에 재판을 해서 이겨야지. 우리 4·3 사람들도 사람이다.” 제주 4·3 수형인들과 변호인단이었다.

2019년 1월 17일, 현 할아버지가 또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제주지법을 찾았다. 1년 9개월 전과는 달리 부푼 마음이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는 각 그 ‘공소제기의 절차가 법률의 규정을 위반하여 무효인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7조 제2호에 의하여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를 모두 기각한다”고 밝혔다. 현 할아버지는 법원 앞에서 양팔을 들고 “만세”를 수차례 외쳤다.

제주에서는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 차례 군법회의가 열렸다. 수형인 명부로 확인된 인원만 2530명이다. 수형인 명부에 따르면 384명에게 사형, 305명에게 무기징역, 97명에게 징역 20년, 570명에게 징역 15년, 706명에게 징역 7년, 235명에게 징역 5년, 29명에게 징역 3년, 202명에게 징역 1년이 각각 선고됐다. 현 할아버지는 15년형을 선고받고 7년 6개월을 복역했다.

“씨를 볶아버리겠다”던 순경

“우리는 윗동네(중산간)인데 아랫동네(해안가)하고 사이가 안 좋았어. 콜레라가 돌았는데 아랫동네는 죽고 여기는 안 죽었거든. 그래서 우리가 아랫부락 사람들을 우리 동네에 못들어오게 했어. 그래서 집단으로 싸움을 하게 됐지. 나중에는 싸움이 커져서 미군부대까지 왔어. 순경이 하는 말이 ‘씨를 볶아버리겠다’고 해. 사람 종자를 끊어버린다는 뜻이야.”

젊은 청년은 기침만 해도 ‘폭도’로 몰릴 때였다. 그럴 때 패싸움을 했으니 화를 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해 중산간 마을 청년들이 단체로 산에 올랐다. 하산하면 죄를 용서해주겠다는 소문에 마을로 내려왔지만 역시나 폭도로 몰렸다. 유치장에서 온몸이 멍들어 시커멓게 될 때까지 맞았다. 그는 “하도 맞으니 몸이 나무처럼 굳어버렸다”고 말했다. 이후 대구형무소로 보내졌다.

현 할아버지는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15년형을 선고받고도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는 생각에 틈날 때마다 운동을 했다. 7년 6개월로 감형이 됐을 때는 ‘살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 이제 사회 나가서 살려면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형무소 외부에서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지원했다. 의정부 농장과 마포 공장에서 일하게 된 계기다.

그런 그도 ‘빨갱이 낙인’은 견디기 어려웠다. ‘요시찰 인물’로 찍혀 10년 넘도록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빨갱이’라고 쑥덕거리는 건 물론이고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살았다. 현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점심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항상 굶었다. 일만 했다”고 말했다.

고통은 자녀들에게도 대물림됐다. 죽은 줄로만 알고 제사까지 지내던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기쁨은 잠시, ‘폭도의 자식’이라며 다른 아이들에게 얻어맞기 일쑤였다. 군대에서 오래 복무한 큰아들은 제때 진급을 하지 못하고 하사관으로 제대했다.

재판 시작까지 수천 번의 망설임

7년 6개월의 복역은 물론이고 ‘빨갱이’로 살아야 했던 수십 년의 세월이 너무 억울해 뭐라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요시찰 인물에서 벗어나고도 혹시나 말을 잘못하면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입을 꾹 다물고 살았다. 2013년 ‘4·3 도민연대’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1년 9개월 만에 재심이 확정되고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고 하면 다들 “온 우주가 도왔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을 시작하기까지 수천 번의 망설임이 있었다. 이번 재심에 참가한 18명 모두가 그랬다. 60년이 넘게 지났지만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민연대가 가장 먼저 마련한 자리가 ‘밥 먹는 모임’이었다. 양동윤 도민연대 공동대표는 “도의원, 작가, 종교계 원로 등을 불러서 일부러 어르신들께 밥을 사게 하고 처음으로 4·3 행사에도 가게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당신들을 지지한다, 이제는 말해도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며 “이 과정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실제 피해자들은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고 재심까지 결정했다. 70년 세월 동안 자녀들에게 수형 사실을 숨기고 살았던 피해자들도 재심이 시작되면서 자녀들에게 참혹했던 자신의 과거를 알렸다. 김순화 할머니(88)도 그 중 한 명이다. 김 할머니는 도민연대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소송을 하지 않았다면 평생 입 밖에 꺼내지 않을 심산이었다.

김순화 할머니(88) / 이하늬 기자

김순화 할머니(88) / 이하늬 기자

4·3 당시 16살이던 김 할머니는 18살, 21살 오빠들이 있다는 이유로 도망을 다녀야했다. 오빠들은 살기 위해 몸을 숨겼고 남은 이들은 자연히 ‘폭도 가족’ 으로 몰렸다. 김 할머니는 혼자 숨어지내다 부모가 ‘학살’ 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오빠들도 돌아오지 못했다. 김 할머니는 이유도 모른 채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처음에는 재판을 하기 싫었어. 재판을 해봤자 아무 이문(이득)이 없으니까. 그런데 ‘진짜’ 재판을 받아보니까 이게 재판이구나 싶고 또 우리 변호사가 있으니까 기분이 좋더라고! 다 늙은 마당에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도 있구나….”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게 수형인과 그 가족의 처지다. 가령 재심 의지가 강했던 현창용 할아버지(87)는 재판 중간에 병세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실려갔다. 가족들은 “무죄 판결이 났을 때 소식을 알려드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아버지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현 할아버지는 무죄 판결 3주후 세상을 떠났다.

형무소에서 20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정기성 할아버지(97) 아들 정경문씨(54)는 무죄 판결을 받은 이후 “하지만 보상으로 아버지 청춘을 되돌릴 순 없을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정 할아버지는 치매가 악화돼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긍정맨’ 현 할아버지는 한 평생 몸 쓰는 일을 했지만 크게 아픈 적은 없다. 하지만 재판이 끝나고 나니 온 몸이 아프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목소리는 또박또박 했지만 어지러운지 수차례 이마를 짚었다. “그동안에는 억울한 마음에 오기로 살았지. 근데 재판에서 이겨도 가슴이 풀리지를 않고 아파. 아이고 그 고생을 생각하면 억만금을 줘도 다시 안 하지. 차라리 죽지.”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