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할망·하르방의 '예쁜 우리 변호사'

2019.03.24 09:10 입력 2019.03.24 14:45 수정
이하늬 기자

임재성 변호사가 3월 13일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법무법인 해마루’ 사무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임재성 변호사가 3월 13일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법무법인 해마루’ 사무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예쁜 얼굴이 딱 나타나. 아 이거 우리 변호사다. 우리 변호사 저 양반이다. 보라.”

양일화 할아버지(89)가 TV 프로그램에 나온 임재성 변호사(38)를 가리키며 말했다. 목소리가 한 톤 정도 올라갔다. 임 변호사와 김세은 변호사(34)는 70년 만에 제주 4·3 수형 피해자들의 재심 개시 결정에 이어 무죄 판결까지 이끌어냈다.

변호사들이 처음부터 재심을 생각했던 건 아니다. 국가배상소송을 우선순위로 뒀다. 여든을 훌쩍 넘은 피해자들의 연세를 생각했을 때 어떻게든 ‘빨리’ 진행되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시간이 더 걸릴지라도 재심을 원했다. 제대로 된 재판을 받아보고 싶다고 했다.

법정 진술은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든 일이다. 변호사들도 그 부분을 우려했다. 취재기자가 있든 없든 재판 때마다 기자회견을 열고 목소리를 냈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피해자들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렇게 피해자들은 점점 재판의 ‘주인공’이 되어갔다.

임 변호사는 국가폭력에 관심이 많다. “국가폭력 피해사건을 맡으려고 변호사가 됐다”고 말한다. 제주 4·3 수형인 재심뿐 아니라 강제징용,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등에 관여했고, 2004년에는 “인간은 이름 모를 누군가를 죽이지 않을 권리가 있다”며 병역을 거부했다. 지난 3월 13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임 변호사를 만났다.

-어떻게 사건을 맡게 됐나?

“2015년 말에 ‘제주 4·3도민연대’에서 우리 사무실의 장완익 변호사를 찾아오셨다. 장 변호사가 과거사 활동을 오래 하셨다. 검토보고서를 써서 2016년 3월에 제주도에서 피해자들을 만났다. 사실 재심보다는 국가배상소송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재심 시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정기성 할아버지(96)는 1960년대에 재심을 준비했다. 양근방 할아버지(85)도 2008년 재심 변호사를 찾아다녔지만 어렵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유가 뭔가.

“기록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서다. 인혁당 사건은 판결문이 있었음에도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 재심 개시 결정까지 2~3년이 걸렸다. 국가배상소송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피해자들 연세가 많은 상황에서 재심은 아닌 것 같았다. 또 재심은 형사소송법상의 재심 개시 요건에 맞아야 한다. 그 중 하나가 유죄 확정 판결이다. 하지만 제주 4·3 수형인들은 판결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없었다. 수형인 명부가 전부였다.”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어떻게 재판을 시작했나.

“법무부, 경찰청, 국방부, 국가기록원 등 가능한 모든 국가기관에 관련 자료를 요구했다. 역시나 재판 관련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동시에 당시 재판이 얼마나 부실하게 진행됐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행히 이 과정에서 4·3 당시 제주에 있던 함병선 제2연대 연대장이 대구형무소장에게 형 집행을 요청한 ‘군집행지휘서’를 확보했다. 수형인 명부와 내용이 겹쳐 우리에게 유리했다.”

-당사자들이 고령이다. 기억은 뚜렷했나.

“피해자들 중에서 진술을 잘하는 분들을 모았던 건데도 온전하게 과거 기억을 증언할 수 있는 분이 열 분 정도였다. 강제징용 피해자들도 비슷하다. 고령의 피해자들을 만나면 사건 자체는 기억을 하고 있다. 당시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힘들었고’ 그런 고통이나 감정도 기억한다. 하지만 정확한 시점이나 명칭은 기억하지 못한다. 두 사건 모두 10년, 아니 5년만 일찍 했어도 달랐을 것이다.”

-재판 분위기는 어땠나.

“‘법정’이라는 공간이 갖는 권위와 폭력성이 있다. 변호사와 판사, 검사 사이에는 어려운 이야기가 오간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처음에는 한두 시간을 앉아 있어도 재판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못알아듣는 상황이었다. 또 판사와 검사, 변호사가 모두 제주도 방언을 모르니까 통역인을 두고 소통을 했다. 그래서 70년 만에 정식 재판을 받게 됐지만 과연 이 재판이 본인들의 재판일까? 그런 걱정이 들었다. 증언을 할 때도 평소와 다르게 너무 떨고 ‘잘하셨다’고 해도 본인이 생각하기에 제대로 못한 거 같아 속상해하셨다.”

-재심이 열린 이후에는 피해자들이 자신감을 얻었다고 들었다.

“재심을 신청했지만 학계와 법조계 모두 재심은 어렵다고 말했다. 당사자들도 분위기를 통해 어려운 재판이라는 건 알고 계셨다. 재심이 결정되고 난 이후에는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거 같다. 본안 재판에서는 불법구금이나 고문 등 당시의 피해사실을 넘어서 제주도에 돌아와서 어떻게 살았는지, 당시 피해 때문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법정에서 나왔다. 피해자 가족들 분위기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가만히 좀 계시지’하는 시선으로 보는 가족도 있었다. 재심 때는 온 가족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응원하기 위해 재판에 왔다.”

-재심 개시를 신청한 지 1년 7개월 만에 재심 개시에 이어 무죄 판결까지 받았다. 우려했던 것보다는 빨리 진행된 것 같다.

“온 우주가 도와줬다.(웃음) 재심 개시만으로 1심, 2심, 대법원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 재심 개시와 판결이 빨리 이뤄졌던 이유는 검찰이 재심 개시와 1심 판결에 항소하지 않아서다. 피해자들의 신속한 권리구제를 위해 검찰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준 덕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월 17일 제주지방법원이 4.3 생존 수형인들의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자 피해자들이 법원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1월 17일 제주지방법원이 4.3 생존 수형인들의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자 피해자들이 법원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 연합뉴스

-70년 만의 무죄 판결이다. 당사자들이 정말 좋아했겠다.

“김평국 할머니가 ‘몸이 움찔움찔거린다. 날개가 있으면 날고 싶다’ ‘나를 옭아맸던 끈이 풀리는 기분이다’라고 하셨다. 당사자들이 노구를 이끌고 법정에 출석해 증언을 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과정 끝에 나온 판결이라 더 의미가 컸다. 변호사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 4·3 수형인 사건 외에도 강제징용, 양심적 병역거부 등 사건을 맡았다.

“국가폭력 피해사건을 하려고 변호사가 됐다. 병역거부 관련해서는 18년 넘게 운동을 했다. 2003년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의 영향이 컸다. 그때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대중적인 반전운동이 시작됐다. 개인적으로도 병역을 거부했고, 이후 감옥에서 나온 뒤 ‘평화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변호사로 ‘생활’하지만 정체성은 ‘평화연구자’라고 생각한다.”

-재심을 통해 18명은 무죄를 받았지만 숨진 2500명에 대해서는 구제를 할 수 없는 건가.

“수형인 명부에 기록된 것이 사실이라면 2530여개의 불법적인 판결이 존재하는 건데 생존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효이고, 사망했다고 해서 무효가 아닌 것은 아니다. 긴급조치에 근거한 재판이면 다 무효인데 재심청구를 해야만 무효가 되는 것은 개인에게 권리구제를 모두 떠넘기는 것이다. 문제는 고문, 불법구금을 당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사망한 피해자는 이에 대한 진술을 할 수 없다. 일괄무효의 내용을 담고 있는 특별법의 필요성을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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