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전두환의 ‘80년 5월’

각하로 불린 전두환, 광주 재진입·도청 진압회의 모두 참석

2019.05.15 06:00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결정된 국무회의 직후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비상계엄 선포문(위). 1980년 5월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의결이후 결정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명단(아래). 이미지 크게 보기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결정된 국무회의 직후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비상계엄 선포문(위). 1980년 5월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의결이후 결정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명단(아래).

1980년 5월27일 오후 4시. 서울 중앙청 국무회의실에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를 비롯해 19명의 장관들이 모였다. 이날 새벽 광주에서 3개 공수여단 특공조가 옛 전남도청 등을 유혈 진압하면서 열흘간의 5·18민주화운동이 막을 내린 지 12시간쯤 지난 후였다.

이날 국무회의에서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을 비롯해 중부지역 폭풍피해 복구비,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시행령 등 8건이 의결됐지만, 수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사살되고 부상당한 광주를 위한 안건은 아예 없었다. 국보위는 ‘대통령을 보좌하고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국책사항을 심의’하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직후 발표된 국보위원 51명에는 광주를 유혈 진압한 지휘관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황영시 육군 참모차장, 진종채 2군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 군인이 29명이나 됐다.

국무회의 4일 뒤인 5월31일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임명됐다. 광주를 유혈 진압한 날, 권좌에 오를 채비를 마친 전 전 대통령이 권력의 정점에 선 순간이었다.

전씨 한 달간 행적 첫 추적
권력 찬탈 동분서주 과정
광주가 변수…무차별 진압

경향신문이 움직일 수 없는 기록과 공식 진술 등을 통해 1980년 5월 전 전 대통령의 행적을 추적했다. 1995년 진행된 검찰 수사기록과 군 문건, 신군부 핵심들의 진술 등을 통해 드러난 전 전 대통령의 5월 행적은 34건이었다. 이 중 5·18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행적만 해도 12건이나 됐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은 1995년 검찰에 제출한 서면답변서 등을 통해 이 중 3건(5월25일 최규하 전 대통령의 광주 방문, 이날 열린 국방부 회의 참석, 정호용 특전사령관 면담)만 인정했다. 그나마도 “진압작전 관련 논의는 없었다”는 단서를 붙였다.

전 전 대통령의 5월 행적은 모든 것이 단 한 가지 목표에 집중된 권력찬탈의 과정이었다. 5·18은 권좌를 향해 순항하던 전 전 대통령에 대한 유일한 도전이었다. 광주시민들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빌미로 국군 최정예부대였던 공수부대를 동원, 민주주의를 말살하려 했던 신군부에 맞섰다.

전 전 대통령은 5월4일 보안사령부에서 ‘시국수습방안’ 마련을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비슷한 시기 학생시위 배후 조종자 조치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보안사는 5월12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을 담은 ‘시국수습방안’을 확정해 전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튿날에는 예비검속 대상자 선정 작업을 시작해 5월15일 명단을 확정했다.

준비를 마친 전 전 대통령 측은 5월20일 이후 실시하려 했던 ‘시국수습방안’을 조기에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준비했다. 이날 전 전 대통령은 청와대로 최규하 전 대통령을 찾아가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정치인들을 연행·조사하겠다는 계획도 보고했다. 오후에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요구하기 위해 청와대를 다시 찾았다.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이 이뤄진 1980년 5월27일 광주에 입성한 계엄군들이 도청과 시내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이 이뤄진 1980년 5월27일 광주에 입성한 계엄군들이 도청과 시내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전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이날 오전 열린 전군지휘관회의에서는 백지 서명이 이뤄졌다. 주요 군 지휘관 전원 동의를 내세워 최 전 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한 용도였다. 전 전 대통령의 의도대로 최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열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하도록 지시했다. 5월18일 0시부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걸림돌이 생겼다. 7공수 2개 대대가 진주한 광주에서 시민들의 거센 저항이 시작됐다.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전 전 대통령이 전면에 나섰다. 2017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사태의 발단에서 종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직접 관여할 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5월19일 전 전 대통령은 보안사 회의에서 “광주 지역을 담당하는 505보안대에서 현지 상황이 잘 보고되지 않는다”고 화를 냈고 최예섭 보안사 기조실장을 광주로 파견했다. 국보위 설치를 위한 행보도 이어갔다. 이날 청와대에 국보위 설치를 건의하고, 서울 삼청동 중앙교육연수원 건물을 사무실로 결정했다.

도청 진압작전 최종 결정
25일 국방부 회의도 참석
5·18 직접 관련 기록 12건

5월20일에는 중앙정보부가 연행해 조사하고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5·18의 배후에 김 전 대통령이 있다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시작이었다. 계엄군의 진압작전에도 깊이 개입했다. 5월21일 국방장관실에서 열린 군 수뇌부회의에 참석했고 5월23일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열린 ‘광주 재진입작전’ 논의에도 전 전 대통령이 있었다. 전남도청 진압작전이 최종 결정된 5월25일 국방부 회의에도 참석했다.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전 전 대통령의 5월 한 달간 행적을 살펴보면 오직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면서 “강력한 시민 저항이었던 5·18민주화운동은 예측하지 못한 변수였기 때문에 전 전 대통령이 빠른 해결을 위해 깊숙이 개입, 강력한 진압작전을 지시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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