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올해의 인물 ‘엄마’

2019.12.21 10:17

2019 엄마들이 세상을 바꾸다
허술한 사회안전망 때문에 자식을 잃은 엄마들이 나서서 세상의 관심을 촉구했다. 언제쯤 엄마들을 투사로 내몰지 않는 사회가 올 수 있을까.

올 한 해 ‘엄마’라는 이름을 참 많이 들었다. 하늘로 떠난 아이의 이름을 내걸고 거리로 나선 엄마들이 있었다. 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목소리를 낸 또 다른 엄마들도 있었다. 떠난 이는 돌아오지 않고, 남은 이의 가슴에 묻힌 기억은 조금씩 잦아든다. 엄마들은 잊지 말자고, 기억하자고 말했다. 똑같은 죽음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다. 하나의 줄기로 엮을 수 없는, 다양한 엄마들을 그리는 드라마 한 편이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들기도 했다. 엄마들의 목소리는 정부와 국회의 움직임을 이끌어냈다. 더디고 부족하지만 변화의 물꼬를 텄다.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가 12월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1주기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에서 위험의 외주화 근절, 특조위 권고안 이행 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가 12월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1주기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에서 위험의 외주화 근절, 특조위 권고안 이행 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용균아, 나는 너다

2018년 12월 10일, 김미숙씨(51)의 시간은 멈췄다.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아들 용균이는 이날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졌다. 용균이는 하청업체 비정규직이었다. 위험 업무는 하청업체에 외주를 주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2인1조’ 근무는 지켜지지 않았다. 고장난 손전등 대신 휴대폰 플래시에 기대야 했다. 용균이는 두 달 전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는 손팻말을 든 사진을 남겼다.

김씨도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전자 부품 공장에서 2교대로 일했다. 동료가 문자 한 통으로 해고당하고 부당한 지시가 떨어져도 ‘비정규직이면 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오래 병앓이를 하는 남편과 아들을 먹여살리는 게 중요했다. 노동자의 권리보다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이 더 귀했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은 김씨를 바꿔놓았다.

발전소 측은 사고 원인을 김용균씨에게 지우려고 했다. 맞서야 했다. 노동자들이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아들이 남긴 숙제였다. 아들이 떠난 지 4일 만에 처음 마이크를 잡았다. ‘태안화력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시민대책위원회(대책위)’의 기자회견 현장이었다.

“자식 죽은 부모가 나서지 않으면 사람들이 봐주지 않습니다. 이만큼 힘들고 억장이 무너지는 가슴을 끌어안고 해야 국민이 알아주고 조금이라도 귀 기울여주기 때문에 제가 나섰습니다.” 장례는 정부·여당으로부터 특별조사위원회 발족 약속을 받은 뒤에야 치렀다. 숨진 지 62일 만이었다.

“김용균은 작업지시·업무수칙을 위반한 게 아니라 지시를 너무 충실히 지켰기 때문에 죽었다.” 지난 8월 특조위는 4개월간의 활동을 마무리하며 이 같은 조사결과를 내놨다. 특조위는 사고 원인으로 발전소의 원·하청 구조를 지목했다. 공정을 무리하게 쪼갠 후 여러 협력사에 외주를 준 결과, 현장의 소통이 단절되면서 노동자가 일상적인 산업재해 위험에 노출됐다는 것이다. 10월 26일에는 김씨가 초대 이사장을 맡은 ‘김용균재단’이 출범했다. 12월 8일 김용균 1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김씨는 “너를 살릴 순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처럼 삶이 파괴되는 걸 막겠다. 엄마는 이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을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한 ‘김용균법’에선 정작 김용균이 빠져 있다. 외주금지 업종에 발전 분야가 제외되면서다. 정부·여당은 12월 12일 원청 책임 강화와 노동자의 고용안정·처우 개선에 중점을 둔 ‘발전산업 안전강화 방안’을 내놨다. 하지만 하청노동자들에게 집중된 위험을 근절할 핵심 방안인 ‘직접고용’은 빠졌다.

방 안에 누워 있을 때면 아들이 떠오른다. “저는 일 끝나고 집에 오면 바로 잤어요. 그럼 용균이가 문 열고 들어와서 제 옆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죠. 엄마 피곤하다고 하면 다리 주물러주고, 머리 지압도 해주고…. 갑자기 용균이 기억이 훅 다가올 때 힘들어요.”

용균이는 엄마의 꿈에 4번 나왔다. 3번은 강가에서 놀고 있는 네 살배기로 등장했다. 강에 물이 불어나면 용균을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한번은 어느 정도 큰 모습이었다. 용균이 낭떠러지가 있는 내리막에서 보드를 탔다. “제가 ‘용균아, 위험해. 그렇게 타지 마’라고 했더니 보드에서 내리더라고요. 보드를 한쪽에 치웠더니 꿈에서 깼어요. 용균이가 위험한 현장에서 일한 걸 막지 못해서 그런 꿈을 꾸지 않았나 싶어요.” 다음번 꿈에선 위험이 없는 상황에서 용균이를 만나고 싶다.

안전사고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이 10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어린이 생명안전 법안 통과 촉구 기자회견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울고 있다. 이준헌 기자

안전사고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이 10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어린이 생명안전 법안 통과 촉구 기자회견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울고 있다. 이준헌 기자

더 이상 희생에 빚지지 않도록

고유미씨(37)는 지난 2월 서울랜드 주차장을 찾았다. 1년 4개월 전 4살 아들 하준이가 사고를 당한 곳이다. 남편이 트렁크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사이, SUV 차량이 손을 잡고 있던 모자를 뒤에서 들이받았다. 변속기어를 주행상태인 ‘D’에 놓고 경사로에 주차된 차량이었다. 경사를 따라 수십m를 굴러왔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하준은 사고 1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사고 이후에도 주차장은 변하지 않았다. 5000평 규모의 공간에 제동장치 작동을 철저히 하라는 현수막 7개가 걸린 게 전부였다. 고임목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비탈진 곳에 주차장을 마련할 경우 고임목 등 미끄럼 방지 시설과 안내표지를 갖추도록 한 ‘하준이법(주차장법 개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해 9월부터 경사진 곳에 주차한 운전자는 반드시 고임목을 괴거나 바퀴를 돌려놓도록 법이 바뀌었다. 단속은 미미했다. 고씨는 지난 4월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에게 연락했다. “어떻게 하면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요?”

하준이가 있는 봉안당에는 해인이도 있다. 유골을 안치하는 날, 직원이 “비슷한 사고로 온 아이가 있다”고 말해줬다. 2016년 4월 5살 해인이는 경기 용인 어린이집 앞에서 제동장치가 풀려 내려오는 차량에 치였다. 응급조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남은 아이들이 이런 사고를 당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고씨가 나선 이유였다.

안타까운 사고는 잇따랐다. 지난 5월 15일 8살 동갑내기 태호와 유찬이는 인천 송도의 한 축구클럽 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 차량은 제한속도 시속 30㎞인 스쿨존(어린이보호구역)에서 빨간불에도 85㎞로 달리다가 승합차와 충돌했다. 어린이들이 타고 다니는 차량인데도 통학차량 신고 대상이 아니었다. 한 달 뒤 어린이 통학차량 신고 대상을 넓히고 안전을 강화하는 ‘태호·유찬이법’이 발의됐다. 9월 11일 충남 아산에서는 9살 민식이가 떠났다. 동생의 손을 잡고 스쿨존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량에 치였다. 이후 스쿨존에 신호등·과속 단속 카메라 설치를 의무화하고, 스쿨존 사고 시 가중처벌을 하는 ‘민식이법’이 발의됐다.

하지만 국회 정쟁 속에 법안들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이들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어린이 생명안전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요구했다. 국회의원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호소했다. 해인이 가족도 합류했다. 어린이의 응급조치를 의무화한 ‘해인이법’도 잠자고 있었다. 부모들은 국회의 무관심, ‘감성팔이’라는 악성 댓글과 마주하면서도 기운을 냈다. 이 문제를 나서서 바꿀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민생법안을 협상의 볼모로 잡고 있다는 비판을 의식한 걸까. 지난 12월 10일 민식이법과 하준이법이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민식이 엄마 박초희씨는 법안 통과 후 “우리 아이들의 이름이 밑거름되어 이 사회에서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 더 이상 아이들 희생으로 빚진 법안들이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준이 엄마 고유미씨는 “국회에 고맙지 않다”고 했다. “자발적이라기보다 뒤에 카메라가 많이 붙었으니까 (법안을 처리) 한 것이라는 느낌밖에 받지 못했어요. ‘이미 돼야 했던 거 아닌가. 왜 이제야’라는 생각뿐이었어요. 주차장에 안전판 세우는 일에 2년 넘는 세월이 걸렸어요. 그렇게 걸려야 했을 일인가요.”

아직 어린이 통학버스에 폐쇄회로(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한음이법, 해인이법, 태호·유찬이법이 남아 있다. 고씨는 하준·민식에게 “우리 조금 더 기다렸다가 가자”고 편지를 썼다. 태아는 ‘정상적인 사회’를 살았으면 한다. 멈춰 있는 차가 굴러내려오지 않고, 아이가 다치면 바로 처치하고, 노란색 통학버스면 당연히 등록된 차량인 세상 말이다.

‘정치하는 엄마들’이 3월 5일 한국유치원총연합회를 검찰에 고발하는 기자회견에서 한 어린이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정치하는 엄마들’이 3월 5일 한국유치원총연합회를 검찰에 고발하는 기자회견에서 한 어린이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엄마, 엄마, 엄마

올 한 해 엄마를 이야기할 땐 ‘정치하는 엄마들’(엄마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어린이 생명안전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부모들의 지원군이었다. ‘맥도날드 햄버거병(용혈성요독증후군) 재수사’를 이끌어냈다. 최저기준이 22년 전과 똑같던 어린이집 급·간식비 인상도 주도했다. 지난해부터 주력해온 사립유치원 문제를 비롯해 스쿨미투, 미디어 속 혐오·차별 문제도 들여다봤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모였지만 하나로 규정짓긴 힘들다. 자식을 위해 뭐든 다 해주는 희생의 아이콘,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려 열 올리는 ‘돼지엄마’ 같은 뻔한 틀은 이들에게 맞지 않는다.

엄마들의 활동 영역은 크게 두 가지다. 엄마 자신과 아이 문제다. 하지만 엄마들이 ‘저출산을 극복하려면 노동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해도 “보육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답이 돌아온다. 조성실 활동가는 “엄마가 넘지 말아야 하는 성역이 있다고 느낀다”고 했다.

“엄마는 아이들을 지키고 희생하고 이들을 위해 목소리 낼 수 있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정치 영역으로 뛰어드는 순간 혐오나 부정적 대상이 돼버려요. 우리 아이는 세상을 떠났지만 다른 아이를 위해 활동을 한다, 여기까진 감동의 서사였는데 정치적 논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면 그땐 엄마여서 상처를 받게 되죠. 한 중진 국회의원이 제게 왜 (엄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제가 되물었죠. 엄마인 나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한다고 했는데 왜 아이에 대해서만 대표성을 부여하느냐고요.”

엄마들은 “모두가 엄마다”라는 구호를 내건다. 내 아이 한 명만 잘 키우는 사회를 꿈꾸지 않는다. 아이 낳고 기르기 좋은 사회가 특정 집단이나 성별에 제한되지 않는, 서로를 향한 차별과 혐오를 넘어선 사회를 바란다. 김정덕 공동대표는 “우리가 지향하는 건 생물학적 여성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아빠, 양육하는 조부모, 한 부모 양육자로 확장된다. 그간의 활동들도 양육자라는 당사자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린이 생명안전 법안 통과를 요구하는데 아빠들도 같이 나섰듯, 단순히 엄마·여성·아이들만의 문제로 보지 않고 시각을 넓혀가고 있다”고 말했다.

시청률 20%를 기록하며 호평 속에 종영한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도 엄마들의 얼굴이 나온다. 엄마에게 버려져 고아로 자란 주인공 동백(공효진 분)은 미혼모다. 옹산마을로 내려와 ‘까멜리아’를 차린다. 이웃들은 온갖 색안경을 끼고 동백을 바라본다. 동백은 자신을 향한 무례함에 당당히 맞선다. 늘 치근거리는 건물주를 향해 “여기에서 살 수 있는 건 딱 술뿐”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웃은 “미혼모가 무슨 술집을 하느냐”고 한다. 동백의 ‘베프’ 덕순(고두심 분)은 “미혼모는 술집 하지 말라는 법이 있어. 그럼 과부도 게장 팔면 안 되것다. 나도 게장에 소주 파는데”라고 맞선다. 동백을 인간적으로 아끼지만 아들 용식(강하늘 분)과의 연애를 두고는 갈등한다. “동백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어. 버림받은 일곱 살로 남아 있지마. 허기지지 말고 불안해 말고 훨훨 살어.” 동백 엄마 정숙의 말도 회자된다.

조 활동가는 가장 공감한 캐릭터로 용식 엄마 덕순을 꼽았다. “자기 자식이 힘든 삶을 사는 걸 고민하면서도, 자신이 겪어왔던 편견을 자기대에서 끊으려고 하는 노력을 보여줬다. 그야말로 엄마의 마음으로 모두를 품는 서사가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이어 “뭉클뭉클하고 꿈틀대는 ‘엄마’라는 키워드가 떠오른 건 시대적으로 변화한 엄마상에 대한 사람들의 갈증도 있고, 엄마를 헌신의 아이콘으로 가두고자 하는 마음도 있는 것 같다. 분명한 건 또다시 사고로 아이를 잃고 투사가 된 엄마들의 서사는 더 이상 현실에서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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