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란 이름의 ‘혐오’…트랜스젠더 배제한 ‘터프’ 해부하다

2020.02.21 06:00 입력 2020.02.26 13:37 수정

(4) 트랜스젠더 배제하는 터프

2016년 5월26일 서울 강남역에서 여성혐오범죄 비판 시위가 열리고 있다. 2016년 10월23일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임신중단 합법화 촉구 시위가 열리고 있다. 2018년 12월2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불법촬영 규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지난 6일 숙명여대 교내에 트랜스젠더 여성 입학에 찬성·반대하는 대자보가 나란히 붙어 있다(왼쪽 사진부터).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6년 5월26일 서울 강남역에서 여성혐오범죄 비판 시위가 열리고 있다. 2016년 10월23일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임신중단 합법화 촉구 시위가 열리고 있다. 2018년 12월2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불법촬영 규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지난 6일 숙명여대 교내에 트랜스젠더 여성 입학에 찬성·반대하는 대자보가 나란히 붙어 있다(왼쪽 사진부터). 경향신문 자료사진

래디컬 페미니스트 집단 ‘터프’
숙명여대 입학 반대 여론 주도
“여성에 위협·신체 훼손 부추겨”
영국 학자 제프리스 주장 추종
해외선 “젠더 논의 후퇴” 비판

여대에 재학 중인 ㄱ씨(26)는 2017년 초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 ‘워마드’에 들어간 뒤 인식을 바꿨다. “항상 화장실에 가면 불법촬영 카메라부터 찾고 배낭여행을 가면 몸을 조심하려 했어요. 남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죠.” 그해 4월 ‘탈코르셋’을 하며 머리를 짧게 잘랐다. 2019년 5월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 동아리 활동을 본격화했다. 혜화역 시위 등 여성 안전을 요구하는 시위에 줄곧 참여했다. ‘여성만의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던 ㄱ씨에게 트랜스젠더란 “여성 안전을 위협하고 공정성을 해치는 남성”이었다. 이달 초 23개 여대 래디컬 페미니즘 동아리를 대표해 트랜스젠더 ㄴ씨의 숙명여대 입학 반대 성명을 작성했다.

ㄱ씨처럼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터프(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TERF)라고 한다. 이들은 입학 반대 여론을 주도했다. 한 성명에서 여성을 ‘비둘기’, 남성을 ‘인간’으로 규정했다. 성별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존재를 비둘기도, 인간도 아닌 존재로 지워버렸다. ‘비둘기 페미니즘’은 ‘여성’으로 차별받으면서도 ‘시스젠더’(지정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라는 주류로서 소수자를 억압하는 이데올로기가 됐다. 어떤 정체성으로는 차별받지만 다른 면에서는 차별을 가하는 ‘교차차별’ 현상도 보여준다.

터프 같은 트랜스젠더 배제 측을 ‘혐오세력’으로만 치부하면 복합적인 함의를 놓친다. 터프를 자처하지 않는 여성들도 입학 반대 흐름에 일정 부분 가세했다.

여대 등 여성공간이 그동안 충분히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우려에서 나온 현상이다.

■ “트랜스젠더는 ‘토끼’(여성)의 탈을 쓴 ‘늑대’(남성)”

여성계에선 한국 터프 집단을 두 축으로 본다. 한 축은 영국 출신 터프 학자 실라 제프리스의 주장을 국내로 들여온 ‘스피커’ 집단이다. 이 집단은 2018년 초 제프리스의 이론적 토대를 가져왔다. 열다북스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책을 내고 행사를 열어왔다. 오는 3월 예정된 ‘여성공간사수 래디컬 총궐기’ 행사도 주최한다. 다른 한 축은 이를 수용하는 10~30대 여성들이다. 대다수가 강남역 살인사건 등을 시작으로 혜화역 시위 등 여성 안전을 위한 시위를 주도했다.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관련 행사를 통해 터프로 정체화했다.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에 배제적 입장을 보였던 1970~1980년대 래디컬 페미니즘 조류에서도 극단에 있는 학자로 평가된다. 트랜스젠더를 여성에게 위협적인 존재이고 신체 훼손을 부추기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논의는 해외에선 강한 비판이 전개돼 학계에서 영향력이 있지 않다. 학자들은 그의 주장이 트랜스젠더를 낙인찍고 이들의 사회적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본다. 페미니즘이 그간 진전시킨 젠더 논의를 협소하게 만들고 후퇴시킨다는 점에서도 비판한다.

한국 터프들의 주장은 균일하다. 대부분이 제프리스의 주장이나 해외 반트랜스젠더 주장에서 나온다. 참고 자료도 한정돼 있다. 루인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상임연구원은 “그전엔 ‘트랜스젠더가 싫다’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제프리스 등의 주장으로 논리를 갖추며 페미니즘의 언어가 됐다”고 했다. 터프는 태어날 때 지정된 성별은 바꿀 수 없다고 본다. 여성과 남성을 ‘계급’으로 인식한다. 가장 아래 계급에 위치한 여성 인권을 남성·트랜스젠더의 그것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의 탈을 쓴 남성’이다. 벌벌 떠는 토끼(여성)들 사이에 토끼 모자를 쓴 늑대(트랜스젠더)를 담은 ‘여성공간사수 래디컬 총궐기’ 웹자보가 이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트랜스젠더가 여성공간에 들어오면 안전을 위협하고 불공정한 상황을 만든다고 여긴다. ㄱ씨는 “ㄴ씨와 같은 트랜스젠더를 인정하면 모든 여성공간에 남자들이 침범할 수 있는 좋은 경로를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가장 보통의 사람]불안이란 이름의 ‘혐오’…트랜스젠더 배제한 ‘터프’ 해부하다

■ “여대 안전은 무시돼왔다”

여대에서는 2~3년 전부터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공기처럼 존재하던 트랜스젠더 혐오가 ‘여성 안전’ 문제와 맞물리며 덩치를 키웠다. 2017년 4월 동국대 남학생이 숙명여대에 들어와 성추행 혐의로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여대 내 남성 침입 사건 잇따르자
터프 “트랜스젠더 나가라” 주장
안전 내세우며 ‘가짜뉴스’ 배포
성적 지향·성정체성 혐오 선동

동덕여대는 외부인 남성이 강의실에서 나체 상태로 음란행위를 한 사건 이후인 2018년 10월 외부인 출입금지를 선언했다. 이화여대는 같은 해 직장인 남성이 학교 건물에 들어와 잠을 자던 여학생의 신체를 만져 입건된 후 폐쇄회로(CC)TV와 건물 입구의 카드리더기 설치를 확대했다. 그 외 비슷한 불법촬영, 화장실에서 잡힌 여장남자 등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다수 여대가 문을 걸어 잠그는 길을 택했다.

이 사건은 ‘어떻게 하면 안전한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논의로 이어지지 못한 채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터프는 ‘남자를 쫓아내자’에 이어 ‘트랜스젠더를 쫓아내자’를 해법으로 내세웠다. 여대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표방하는 소모임이 하나둘 생겼다.

숙명여대에서는 수년 전부터 100여명 규모의 여성학 동아리 성격이 트랜스젠더 배제적으로 바뀌었다. 2019년 2학기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 세칙의 소수자 정의에 ‘성적지향 및 성정체성’이 포함되자 “트랜스젠더는 왜 들어가나. 젠더는 바꿀 수 없다”는 발언도 나왔다. 이후 ‘소수자 권리를 옹호한다’와 ‘LGBT의 T(트랜스젠더)를 반대한다’는 대자보가 번갈아가며 붙었다. 그 흐름은 ㄴ씨 사건까지 이어졌다. ㄴ씨 입학 반대 서명 인원(주최 측 추산)은 약 2만명(대학생 약 1500명)으로 집계됐다.

■ “혐오 발화는 폭력”

터프의 주장은 주장에만 그치지 않는다. ‘안전’을 내세우며 공포를 조장한다. 전문가들은 일부 터프 집단이 ‘가짜뉴스’를 배포하는 방식으로 혐오를 선동한다고 분석한다. ‘트랜스젠더는 여성에게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한다는 것이다. 숙명여대 재학생 장태린씨(22)는 “학내에서 터프 비율이 10% 정도로 유추되지만 ㄴ씨 입학 반대 여론이 적지 않았던 건 터프가 중도층을 포섭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며 “안전 문제를 내세워 터프에 관심 없던 사람도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고 했다.

혐오 선동은 트랜스젠더를 공적 공간에서 몰아내는 결과를 낳는다. 트랜스젠더 개인의 삶을 의심하게 만들면 이들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ㄴ씨도 여성성을 인정받기 위해 여대에 입학하려 한다는 의심으로 공격받았다. 터프 집단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법원의 성별정정 결정에 반대 서명 운동을 하고, 헌법소원을 제기하려 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요구로도 이어졌다.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일부 가짜뉴스도 혐오를 키웠다. 대부분 ‘트랜스젠더는 여성 안전을 위협한다’ ‘트랜스젠더가 여성 자리를 빼앗는다’ 같은 내용이다. 출처를 확인한 결과, 악의적으로 윤색된 가짜뉴스도 다수 섞였다. 예컨대 ‘여성을 강간하고 여성교도소로 수감되는 트랜스젠더들’로 소개된 인물들 중 일부는 사실이 아니었다.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여성을 성폭행한 트랜스젠더가 남자교도소에 보내졌다’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트랜스젠더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가 사실이었다. 해외 반기독교·반트랜스젠더 사이트의 내용들이 검증 없이 번역돼 소개됐다.

가짜뉴스에 기반한 선동과 혐오 발화는 성소수자의 건강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김승섭 고려대 교수 등이 2017년 10월 발표한 논문 ‘한국 동성애자·양성애자의 건강불평등’에 따르면 사회적 혐오 발화에 놓인 성소수자는 우울증을 겪는 비율이 높다. 동성애·양성애자 등 성소수자 남성 집단은 전체 평균에 비해 7배 정도 우울증을 앓았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사회적으로 소수자 혐오표현이 문제로 떠오른 환경에서 성소수자가 겪는 부정적 경험은 이들의 건강을 악화하는 주요한 원인일 수 있다”고 했다.

터프 계열 단체가 주최하는 행사의 웹자보. 토끼들을 위협하는 늑대로 트랜스젠더를 묘사한 그림이 담겨 있다. 열다북스 제공

터프 계열 단체가 주최하는 행사의 웹자보. 토끼들을 위협하는 늑대로 트랜스젠더를 묘사한 그림이 담겨 있다. 열다북스 제공

■ “모두의 문제”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여성 안전에 대한 요구를 살펴야 한다고 본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은 “터프의 주장은 한국 사회가 여성 대상 폭력·배제에 대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는 분노감이 배경이 됐을 것”이라고 봤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도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방향으로 가선 안된다고 말은 해야 하지만, 동시에 (터프) 주장의 근원에 있는 여성 안전 요구는 같이 풀어봐야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 터프 분노감 배경에
“여성 폭력·배제에 사회 무응답”
차별금지법 등 제도적 장치 마련
집단 대립 아닌 사회적 해결 필요

여러 전문가는 안전을 명분 삼아 트랜스젠더 전체를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는 방향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한 명의 트랜스젠더가 문제 있다 할지라도 한 개인의 문제를 트랜스젠더 전반으로 확대하는 건 혐오”라고 했다. ‘진짜 여성’을 가려내며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방식은 여성운동을 축소하는 부작용도 낳는다. 손 평론가는 “기혼여성, 아들 낳은 여성, 트랜스젠더 여성을 하나씩 배제하면서 ‘순수한’ 여성을 만들겠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사태 원인을 터프에서만 찾으며 특정 페미니즘 대 트랜스젠더 간 대립으로 좁혀 이해해서도 안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루인 연구원은 “양측 대결 구도를 만들면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책임을 지우고 방관시킨다”고 했다. 홍 교수는 “사회 전체적으로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성정체성이 다양한 사람과 같이 있어도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게 많이 보이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소수자 인권침해 재발을 막으려면 차별금지법 같은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번 사태에서 무엇이 차별인지,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하는지 규정·권고하는 정부 기능이 공백 상태였다”며 “반대하는 학생들의 우려와 트랜스젠더의 교육권 사이에서 최선의 방안을 찾아갔어야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 등으로 왜곡된 논쟁 구도를 의미 있는 사회적 논의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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