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피해자 배제된 재판…“n번방은 판결을 먹고 자랐다”

2020.04.20 06:00 입력 2020.04.20 07:29 수정

피해자 배제된 재판

[성범죄법 잔혹사]④피해자 배제된 재판…“n번방은 판결을 먹고 자랐다”

“#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

텔레그램을 통해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한 n번방 사건이 사회적 논란으로 불거진 뒤 트위터엔 이런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분노한 시민들은 n번방의 시발점으로 ‘법원’을 가리켰다. 법원이 성착취물의 해악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낮은 형량을 매겨 범죄의 방조자 역할을 했다는 비판이었다.

법원 내 젠더법연구회 판사들이 인터뷰단을 구성해 활동하던 중 지난해 말‘마녀’(트위터 활동명·@C_F_diablesse)를 만났다. 일명 ‘마녀, 디케를 만나다’ 프로젝트다. 마녀는 성폭력 피해 당사자이면서 피해자와 연대하는 익명의 활동가다. 마녀는 피해자 64명을 설문조사했다. 판사들은 마녀를 인터뷰했다. 설문조사와 인터뷰는 전국 법원의 판사들이 볼 수 있도록 법원 내부통신망에 게재됐다. 경향신문은 이 자료들을 확보했다.

성폭력 피해자, 활동명 ‘마녀’
피해자 64명 설문조사 진행
재판 경험한 19명 답변 분석

피해자 64명이 쏟아낸 말들엔 한국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를 얼마나 방치해왔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곳곳에서 울분과 한숨이 묻어난다.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피해자들은 가족·친구·직장상사·선생님·연인 관계의 남성에게 피해를 당했다. 반면 살고 싶어서, 또 다른 피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가해자를 신고·고소한 피해자들은 정작 수사·재판 과정에서 배제되고 있었다. 낮은 형량은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목소리가 빠진 결과물이었다.

헌법과 형사소송법 등에는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를 형사사법절차에 반영할 수 있는 규정들이 있다. 대법원은 성폭력 사건을 심리할 때 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가져야 된다는 판결도 내렸다. 규정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고 판사들의 성인지 감수성은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폭력 피해자는 여전히 피해를 입은 순간부터 자신이 ‘진정한 피해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국가가 가해자에게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절차는 필요하지만, 성폭력에 대한 편견 속에서 법정은 오히려 피해자에게 2차 가해의 장이 되고 있다.

■ 절반은 모르는 피해자 진술권

증인신문 외 진술권 있지만
9명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16명, 의견·탄원서 냈지만
“가해자가 보복할까 두려워”

설문조사에 참여한 피해자 중 재판 경험이 있는 19명의 답변을 분석했다. 5명은 1심부터, 5명은 2심부터 마녀가 연대한 피해자들이다. 주변에 마녀와 같은 지원자가 없는 피해자들의 현실은 설문조사 결과보다 더 참담할 수 있다.

“형사피해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당해 사건의 재판절차에서 진술할 수 있다.” 피해자 진술권을 규정한 헌법 제27조 5항이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절반(9명)은 가해자의 재판에서 증인신문 외에 의견을 진술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몰랐다고 답변했다. 재판부·검사·피해자 변호사 등 아무도 피해자에게 진술권이 있다고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6명은 재판에서 직접 의견을 진술해봤다고 했고, 의견서·탄원서 등을 재판부에 제출해본 피해자는 16명으로 상대적으로 많았다. 한 피해자는 의견서를 어떤 내용까지 낼 수 있는지, 어느 시기에 내는 게 효과적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이 피해자는 “추가 증거 자료를 보내야 해서 법원에 연락하니까 검찰에 제출하라고 하고, 검찰에 연락하니까 법원에 제출하라고 해서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의견서·탄원서 등을 제출하지 않은 한 피해자는 “괜히 문서를 잘못 냈다가 판사님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아무 것도 못했다”고 말했다. “가해자의 보복이 두려워서 엄벌해달라는 탄원서도 제대로 못 냈다” “피고인이 내가 낸 엄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확인하고 보복할까봐 두렵다”는 답변도 나왔다. 피해자가 낸 자료를 피고인 측에 넘기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피해자들은 말했다.

형사소송법 제294조의4 3항은 피해자의 재판 기록 열람·등사권을 규정한다. 피해자의 진술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다. 피고인 측이 피해자 평판을 깎아내리는 등의 주장을 했을 때 피해자 측이 기록을 보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 8명은 재판 기록 열람·등사권이 있는지 몰랐다고 답변했다. 재판부마다 복사를 허가해주는 범위는 제각각이었다. 어떤 재판부는 기록 전체를 복사해주기도 하고, 어떤 재판부는 피고인 측 의견서·공판조서·피해자 본인의 증인신문 조서 등의 복사를 불허했다. 피해자들은 “기록 복사를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공판 검사는 피해자들과 소통하지 않았다. 10명이 재판 진행 중 공판 검사와 소통한 적이 없다고 답변했는데, 이 중 한 명은 소통을 시도했지만 검사가 거부했다고 했다.

■ 피해자 특성 이해 못하는 재판부

가해자 측 2차 가해성 질문
“판사가 즉각 제지” 겨우 4명
부당한 질문 이의 제기 5명뿐
“부정적 판결 나올까봐 자제”

재판에 증인으로 나가 증언할 때는 피해자에게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가해자를 법정에서 마주하고, 잊고 싶은 피해 사실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판사·검사·피고인 측 변호인의 질문에 답변해야 하는 상황에서 피해자는 위축되기 마련이다. 한 피해자는 “증인석에 섰을 때 머리가 하얗게 되고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 이후 언어체계가 무너진다고 한다. 한 피해자는 “첫 번째 증인신문 때 정말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어릴 때 당했던 성폭력 이후 주눅이 들고 정신과 약을 계속 먹다보니 말이 꼬이고 이상해졌다. 피해를 안 당해서가 아니라 말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그 피해로 내 안에서 망가졌다”고 했다.

재판부가 이런 피해자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피해자들의 지적이다. “내가 일반인이고 정신과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다보니 어려운 법률적 설명은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하게 됐다. 그랬더니 판사가 계속 고함을 치며 ‘그것도 못 알아듣냐’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내가 정말 X신 같아서 죽고 싶었다.” 직장 내 성폭력을 당한 한 피해자의 말이다. “말을 하는 게 서투르거나 두서가 없는 피해자도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 “피해자가 진술할 때 차분하게 기다려주면 좋겠다. 증인석에 서보니까 너무 떨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는 답변도 있었다.

재판 진행 중 불안감·불신·분노를 느끼게 한 판사의 언행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 강간 피해자는 “10년이나 지났는데 진짜 아직도 힘드냐고 했을 때, 긴장한 상태에서 질문을 못 알아들어 답변을 못하고 있으니까 빨리 답변하라고 다그쳤을 때”를 꼽으며 “내가 피고인인 것 같았다”고 했다. 또 다른 피해자는 “(판사가) ‘그게 강간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폭행과 협박이 아닌 것 같은데’라고 물어봤다”며 “질문이 아니라 내 진술을 의심하는 것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성폭력범죄 등 사건의 심리·재판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예규에 따르면 법원은 증인으로 나오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왜 증언해야 하는지’를 비롯해 피해자 보호 제도를 설명하는 안내문을 보내야 한다. 이는 형식적인 절차에 그쳤다. 증언 과정에서 소송관계인들이 피해자 진술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증인신문에 참여했다는 피해자는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일부 재판부는 신뢰관계인의 동석도 허가하지 않았다. 피고인과 법정에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에 응답자 14명(73%)이 증언 때 피고인 퇴정을 원했다. 차폐막을 설치해 시야만 가리고 증언하는 방식이 적절하다는 피해자는 없었다. 반면 지난해 젠더법연구회의 법조인 상대 설문조사에서 법조인들은 32%가 차폐막 설치로 충분하다고 했다.

■ 피고인 측 공격 방치에 2차 피해

“10년 지났는데 아직 힘드냐
판사가 답변하라 다그칠 땐
내가 가해자 된 것만 같았다”

피해자들은 피고인 측 변호인의 2차 가해성 질문을 재판부가 적극 제지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피고인 측 변호인이 범죄와 무관한 평소 품행이나 평판, 과거 성적 경험, 성범죄 피해 이력 등을 꺼내 피해자를 공격하는 변론행위는 문제로 지적돼왔다.

응답자의 절반가량인 8명은 재판부가 피고인 측의 신문을 제지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젠더법연구회의 법조인 설문조사에서 법관들은 84.4%가 신문을 제지했다고 답변한 것과 차이가 있다. 법원이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질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거나 무신경하게 대응한 결과로 해석된다. 영미법계에선 강간피해자보호법을 통해 성적 이력 등 범죄와 무관한 증거를 법정에 꺼내지 못하게 막는 경우가 있지만, 한국은 판사의 재량에 맡겨져 있고 기준도 없다. 피해자 보호가 ‘판사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성범죄법 잔혹사]④피해자 배제된 재판…“n번방은 판결을 먹고 자랐다” 이미지 크게 보기

답변이 꺼려지거나 부당하다고 생각한 질문에 피해자가 직접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적극적으로 이의제기를 했다는 피해자는 5명에 불과했다.

피해자가 이의제기를 하기 어려운 이유는 재판부 때문이다. 4명은 피해자의 이의제기가 판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까봐 자제했다고 했다. 한 피해자는 “판사가 피해가 어느 정도냐며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며 “피해에 대한 의심으로 느껴졌지만 판사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참았다”고 했다. “이의제기를 했다가 부당한 판결을 받게 될까봐 두려워서 소극적인 대처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의제기를 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변호사가 하지 말라고 했다”는 답변도 있었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과도 연결된다. 피해자는 항상 주눅들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적극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은 피해자답지 않다는 편견이다. 한 피해자는 “이의제기를 했다가 피해자답지 않다고 생각할까봐 못했다”고 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의 1심 재판부는 ‘정조’라는 표현에 피해자 김지은씨가 증인신문 때 이의를 제기하자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지하면서 자기 책임 아래 이를 행사할 수 있는 충분하고 성숙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며 김씨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재판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피해자들에게 물었다. 잃은 게 많다는 부정적 답변이 대부분이지만 재판을 통해 피해가 회복된다고 한 피해자도 있었다. “아직 가해자 가족들이 무섭지만 이제 난 진짜 20대를 살 수 있다. 그 어린 피해자였던 나를 과거에 두고 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재판이 도움이 됐다.” “가해 행위를 부인하는 그 놈을 법정에 세울 수 있었던 것, 그래서 그 놈이 벌을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한 것이 내가 얻은 것이다. 이 힘으로 내 앞날을 다시 설계할 거니까.”

강간은 피해자의 99%, 강제추행은 91%가 여성이다. 가해자의 98%, 96%는 남성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