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잔반 먹여"···아이 진술 뿐인 증거, 갈길 먼 아동학대 수사

2022.07.10 10:42 입력 2022.07.10 13:10 수정

장모양(6)이 지난해 서울 송파구 유치원 담임교사가 강제로 잔반을 먹였다며 피해를 호소하는 글. 장양 가족 제공

장모양(6)이 지난해 서울 송파구 유치원 담임교사가 강제로 잔반을 먹였다며 피해를 호소하는 글. 장양 가족 제공

지난해 8월19일, 유치원 학부모 이모씨는 딸 장모양(당시 5세)과 인형놀이를 하다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여섯 달 전 유치원 교사가 강제로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며 어른 주먹만한 잔반을 먹였다는 이야기였다. 장양은 “고기랑 부추랑 김치를 다 섞어서 먹였다” “○○반 선생님에게 사과받고 싶다”며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는 증세를 보여 병원에 갔더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중증 진단을 받았다. 이씨는 8월 말 경찰에 신고했다.

사건을 수사한 서울경찰청은 신고 10개월만인 지난달에야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수사가 복잡했거나 증거를 방대하게 모으느라 처분이 늦어진 건 아니었다. 경찰이 신고 접수 2달 뒤에야 증거 수집에 나선 탓에 사건이 발생한 달의 폐쇄회로(CC)TV 자료를 놓치기도 했다. 수사관이 교체돼 수사에 속도가 붙었지만 피의자 대면조사는 신고 8개월 뒤, 참고인 조사는 5개월 뒤에야 이뤄졌다. 경찰은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넘겼다. ‘증거불충분’이라고 했다. 아동학대 사건의 기소 여부는 검사가 최종 판단한다.

이 사건은 폭행이 수반되지 않은 ‘정서학대’ 유형이다. 이씨가 모을 수 있는 증거는 딸의 진술뿐이어서 이씨는 30여개의 음성 녹음 파일을 정황 증거로 경찰에 제출했다. 그러나 경찰이 아동 진술의 신빙성을 낮게 판단해 수사가 더뎠다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경찰이 안일한 초기 수사로 CCTV와 초기 목격자 진술 등 중요 증거를 놓쳤다는 것이다.

이씨 측 설명에 따르면 수사관은 이씨의 첫 참고인 조사에서 “아동의 진술만으로는 처벌이 어려운 건 알고 있느냐”며 “그럼에도 신고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진술의 진위를 따지기보다 증거 능력부터 의심한 것이다. 서울경찰청은 감찰조사 후 “아동학대수사 업무 매뉴얼을 위반한 부적절한 언행”이라며 수사관에게 ‘주의’ 조치를 내렸다.

경향신문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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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수사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은 정황은 도처에서 확인된다. 경찰은 아동이 해바라기센터에서 한 진술을 분석하면서 이씨가 추가로 제출한 딸의 진술 녹음파일은 조사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말한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경찰이 아동학대를 ‘가볍게’ 치부한 정황은 수사 절차에서도 드러났다. 경찰수사규칙상 경찰은 수사 개시 후 고소·고발인이나 피해자에게 월 1회 수사 진행상황을 통지해야 하고, 3개월 내에 수사를 끝내지 못하면 부서장에게 수사기간 연장을 승인받아야 한다. 그러나 국민권익위원회 조사 결과 사건을 처음 접수한 수사관은 사건 배정부터 인사이동이 나기 전 5개월간 한 차례도 이씨에게 수사 진행상황을 알리지 않았다. 부서장에게 기간 연장을 승인받지도 않았다. 서울경찰청은 “관련 규정 위반이 인정된다”며 주의 조치했다.

아동학대 사례 여부를 판단하는 구청의 대응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송파구청은 지난해 10월 사례판단회의를 열었지만 핵심 자료인 해바라기센터 진술을 경찰로부터 전달받지 않은 채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억지로 음식을 먹였다면 증상이 바로 나타났어야 하는 것 아니냐” 등 피상적인 논의만 오갔다.

장모양(6)이 지난해 진단받은 PTSD 진단서. 장양 가족 제공

장모양(6)이 지난해 진단받은 PTSD 진단서. 장양 가족 제공

전문가들은 정서학대 사건에서 아동 진술은 핵심적인 증거인데 수사기관의 인식이 여전히 낮다고 지적했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진술의 신뢰도를 낮게 보는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바라기센터 진술 당시 함께한 진술조력인은 “또래에 비해 진술 능력이 높고, 반복 질문에서 잘못된 정보를 바로 정정하기도 했다”는 의견을 냈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은 “이 사건의 경우 아동의 진술이 처음부터 끝까지 굉장히 일관되고 구체적”이라며 “60개월 정도의 나이면 충분히 신빙성 있는 진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10일 “정서학대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부족해 진술을 못 믿는 경우가 많다”며 “아이들도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인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복잡해지기 때문에 초기진술과 증거 확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

아동 진술의 신뢰성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도 있다. 2020년 대법원은 13세 미만 미성년 자녀 성추행 사건에서 “진술 내용이 사실적·구체적이고 주요 부분이 일관되며 모순이 없다면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 사건도 뚜렷한 물적 증거가 없었지만 대법원은 아동의 진술이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며 증거로 인정했다.

이씨는 “피해자인 딸의 진술은 일관돼도 계속 의심받았는데, 피의자는 여러 차례 진술에서 내용이 바뀌어도 의심받지 않았다”며 “수사기관의 관행이 바뀌지 않으면 이 사건처럼 CCTV 등 물증이 없거나, 해바라기센터에 가서 진술하기 어려운 나이인 아이의 경우 진술이 계속 무시될 것 같아 우려된다”고 했다. 이씨 측은 최근 김창룡 전 경찰청장과 수사관들, 구청 공무원 등을 직무유기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소·고발했다.

경찰은 감찰 뒤 수사관의 부적절한 발언과 수사 진행상황 미통지는 문제였다면서도 “CCTV 수거 및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를 지연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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