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모임’은 동창회·종교·동호회뿐…여기는 재미없는 천국

2022.09.16 16:03 입력 2022.09.16 19:13 수정
성우제

성우제의 ‘경계인’

캐나다에 살러 온 이민자라면 누구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캐나다행을 고려하면서 가장 큰 고민거리는 거기 가서 무엇을 해서 먹고사는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몇 년 동안 생각만 하고 선뜻 이민을 결행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 역시 밥벌이 문제 때문이었다. 십수 년 동안 한글로 기사 쓰는 일만 했던 내가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기자 경력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다. 문과 출신으로서 가진 기술이라고는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말 그대로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는 것 말고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다.

한국 모 대학 동창회의 가을 야유회. 토론토에서 열리는 동창 모임에서는 40년 이상 격차가 나는 선후배들이 함께 어울린다.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음식을 한 가지씩 준비해와서 나누고, ‘라인댄스’를 추는 야유회는 토론토에 살러와서 처음 경험했다.

한국 모 대학 동창회의 가을 야유회. 토론토에서 열리는 동창 모임에서는 40년 이상 격차가 나는 선후배들이 함께 어울린다.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음식을 한 가지씩 준비해와서 나누고, ‘라인댄스’를 추는 야유회는 토론토에 살러와서 처음 경험했다.

나름 대비를 한다고는 했으나 막상 이곳에 살러 와서 보니 한국에서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초조한 나날이 될 수밖에 없다. 이곳에 먼저 와서 자리 잡고 사는 이민 선배들에게 물어보면 한결같이 이상한 소리들을 했다. “몇 년간 아무 일도 하지 마. 그냥 먹고 놀아.” 월급쟁이 출신으로서 자영업에 종사하려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노는 것이 특히 더 중요하다고 했다. 가진 돈이라고는 뻔해서 한시라도 빨리 돈벌이에 나서야 할 사람에게 그냥 놀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나 싶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농담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 농담 같은 말을 여러 사람이, 그것도 진지하게 하는 바람에 조금 황당하기도 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그저 놀고먹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드물다. 한국 출신의 나 같은 평범한 가장이라면 말이다.

한국과 영 다른 캐나다의 ‘노는 법’
주중 누구를 만나는 일 거의 없고
‘칼퇴’ 후 대부분 가족과의 시간
모든 모임은 부부 동반이 중심
직장동료도 밖에선 전혀 볼일 없어

늘 보는 사람들과의 단순한 일상
그래서 한국에 가는 게 더 좋다
반가운 사람들과 노는 건 최고니까

“그냥 먹고 놀아라”라는 말의 뜻이 ‘마음 급하다고 섣불리 일을 시작하지 말고 이곳 분위기와 돌아가는 사정부터 먼저 파악하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알아챘지만 그래도 “그냥 놀아라”라는 말 자체는 대단히 신선하고 인상적이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빈둥빈둥 노는 것이 인생살이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캐나다에 와서 처음 들었다. 역시 캐나다는 한국과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잠깐 동안 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가져온 돈을 까먹으며 몇 년을 놀다시피 하다가 본격적으로 밥벌이를 하게 되면서 “그냥 놀아라”라는 말의 의미를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놀고먹는 것이 캐나다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영업을 하려는 월급쟁이 출신들에게 일단 느긋하게 놀면서 관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은 캐나다나 한국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가게 문을 열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으면서 진짜로 놀아보려고 하다 보니, 이번에는 재미있게 노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외국 나와 살면서도 한국 음식을 먹듯이 한국 사람들은 한인 커뮤니티에서 주로 놀게 마련이다. 한국 사람들과 어울려도 노는 방식이 한국과 많이 달랐다. 나보다 1년 먼저 캐나다로 살러 온 한 친구는 처음 참석한 어느 모임의 송년 파티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백수십 명의 사람들이 파티복을 입고 와서 춤을 추고 하는데, 참 적응이 안 되더라.” 나는 말만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송년 모임이야 한국에서도 많이 가졌지만 부부가 함께 참석해서 춤추고 노는 파티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캐나다살이가 거의 모든 면에서 한국살이와 다르지만 한국 사람들끼리 만나서 노는 것도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노는 일을 일부러 배우고 익힐 것까지야 없겠으나 캐나다에서 노는 방식도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문화여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캐나다에 산 지 20년이 지난 지금은 적응이 되어서, 야유회나 송년 파티에 나가면 나도 이제 어색해하지 않고 춤을 추며 놀 줄 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만큼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역시 직장과 그 주변이었다. 돌이켜보면 직장에 나가서 일만 했던 것이 아니다. 직장과 관련지어 가장 많이 놀기도 했다. 절친한 친구들이야 자주 만나봐야 1년에 서너 번뿐이었지만 직장 사람들은 매일 보고 거의 매일 어울리는 사람들이었다. 동료들과 저녁 술자리를 자주 가졌던 것은 물론이고, 직장 업무와 관련한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도 많았다. 당시만 해도 그것을 일의 연장이라 여겼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거의 술 먹고 놀았던 시간이나 다름없다. 좋게 보자면 일과 놀이를 칼같이 구분하는 문화가 없을 때여서 다소 어정쩡했을 뿐이다.

캐나다에 살러 오니 이곳은 일상적으로 노는 문화가 한국과 많이 달랐다. 내 경우 가장 다른 점을 꼽자면 주중 저녁 시간에 가족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일과 관련해 사람을 저녁 시간이나 주말에 만날 일 자체가 없다. 평일 저녁에 사적으로 누구를 만나 노는 것도 매우 희귀한 일이다(나는 몇 년 전 서울에서 출장을 온 친구를 만난 것이 마지막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주변 친구들을 봐도 마찬가지이다. 특별한 일이 있다면 모를까 일상적으로는 ‘칼퇴근’을 하고 집에 오는 것이 기본이다.

그래도 사람이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으니, 캐나다에 사는 사람들도 나름 노는 문화가 있기는 있다. 이민자의 나라인 만큼 사람들은 주로 자기 나라 사람들과 어울린다. 더군다나 나 같은 이민 1세라면 노는 분야에서만큼은 같은 말과 정서를 공유하는 사람들하고만 교류하게 마련이다. 편하게 놀자면 언어와 정서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캐나다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만나는 모임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종교단체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 동창회이다. 더불어 스포츠 동호회나 향우회 같은 것도 함께 어울리는 모임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부는 아니겠으나 토론토 한인사회의 많은 이들은 종교단체와 학교 동창회를 매개로 사적인 친목 모임을 만들어나간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크고 작은 모임들의 성격도 한국과 여러모로 다르다는 점이다. 나는 학교 동창회를 통해 사람들을 주로 만났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민을 와서 학교 모임을 가장 먼저 접했기 때문이다.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우연히 학교 선배를 만났고, 그 선배를 따라 동창회 야유회에 나갔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만약 종교단체나 동호회 사람을 먼저 만났더라면 내가 어울리는 사람들이 그런 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곳 학교 동창 모임에는 한국에 살 적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특이한 점들이 많다. 나는 선후배 관계를 제법 중시하는 학교를 나왔으나 한국에 살 적에는 동창회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었다. 수십 년 높은 선배를 만날 일도 없고, 직장에서 알게 된 높은 선배라고 해봐야 마주치면 그저 인사나 하고 지낼 뿐 함께 어울릴 일이라고는 없었다. 게다가 연배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20년 남짓 선배였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보니 학교 선후배 관계가 한국과 많이 달랐다. 내가 여기서 만난 최고참 선배는 1947년에 대학에 입학한 분이었다. 1950~1960년대에 대학 생활을 했던 선배들도 많이 만났다. 한국에서는 보지도 못했던 연배의 선배들이다. 그분들은 연배가 높기도 했지만 한국인 이민 사회에서 숫자도 참 많았다. 20년 전만 해도 1년에 몇 번씩 열리는 큰 모임은 바로 그분들이 주도했다. 나는 모임에 나가서 그런 ‘어른’들과 수시로 어울려 놀았다. 한국에서라면 어울리기는커녕 연배가 달라서 만나지도 못했던 높은 선배들이었다. 동창회에서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특이한 것은 종교든 동창회든 대부분의 사적인 모임에 부부가 함께 참가한다는 사실이다. 문화가 그렇다 보니, 친목 모임에도 혼자 나갔다가는 ‘뻘쭘’해지기 십상이다. 나도 한때 한국에서처럼 남자들끼리 갖는 저녁 술자리에 몇 번 나가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노는 재미가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술자리를 마친 후 귀가하는 일이 너무 불편했다. 서울처럼 대중교통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대리기사도 없으니, 남자들끼리 갖는 저녁 술자리 모임을 더욱 꺼리게 된다.

노는 일에 관한 사정이 이러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예전에 캐나다살이를 준비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말이 돌았다. “캐나다는 재미없는 천국,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 천국과 지옥에 관해서라면 이론이 많겠으나 (노는) 재미가 ‘있다’ ‘없다’에 대해서는 그럴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특히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으로 말하자면 캐나다는 정말로 재미없는 곳이 맞다. 한국에 비해 노는 환경이 다소 좋은 것은 골프나 캠핑 같은 몇몇 분야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겨울이 긴 토론토에서는 6개월 남짓 즐길 수 있는 놀이이다.

‘재미없는 천국’이라는 캐나다는 한국에 살다 온 사람이 보기에 재미가 없기도 하지만 참 단순한 곳이기도 하다. 사람을 새로 사귈 기회도 많지 않고, 노는 내용도 늘상 비슷비슷하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끼리 가끔씩 만나 함께 식사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적인 놀이’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여러모로 단순한 삶이다 보니, 가족 구성원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놀고 있는지 모두 투명하게 공개되기도 한다. 특히 가족 비즈니스로 자영업을 하는 경우라면 일하는 것이나 노는 것 전부를 부부가 공유하게 되어 있다. 주중에 누구를 만날 일이 없고, 주말에 누구를 만난다 해도 부부가 함께 만나기 때문이다.

참 복잡다난했던 한국에서의 삶과 비교하자면 이곳 삶은 단순하기 짝이 없지만(지루한 이곳 삶에 적응하지 못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여럿 보았다) 그래도 살다 보면 이 재미없는 삶에도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일터에 나가봐야 어울릴 사람도 별로 없고 재미있게 놀 만한 대안이 없으니, 종교나 학교 동창회, 동호회 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나를 포함해 이곳에 사는 많은 한국 사람들은 세계의 그 어느 유명 여행지보다 한국 가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떠난 지 오래되어 한국이 아무리 ‘한국말 잘 통하는 외국’ 같다고는 해도 좋은 음식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처럼 노는 재미가 없는 단순한 사회에 살다 보면 그 반가운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만큼 달콤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특히 내 경우가 그렇다.



[다른 삶]‘노는 모임’은 동창회·종교·동호회뿐…여기는 재미없는 천국


▶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원(原)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2002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 16년째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의 여러 매체에 기고해왔다. 재외동포문학상을 두 차례(소설 및 산문 부문) 수상했고 <느리게 가는 버스> <딸깍 열어주다> 등 단행본 5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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