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침공에 대한 중립 유지는 집단학살 지지”···한국 정부 지원 호소한 우크라이나 전직 관료

2022.09.25 11:29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증언하고 정부와 민간단체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한국에 방문한 우크라이나인 올레나 트레굽이 22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서은 기자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증언하고 정부와 민간단체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한국에 방문한 우크라이나인 올레나 트레굽이 22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서은 기자

“이 전쟁에서 중립 유지는 제노사이드(집단학살)에 대한 지지다. 한국이 러시아 제국주의 권력에 기대는 마지막 국가가 되지 않길 바란다.”

우크라이나 경제부 관료 출신으로 러시아의 전쟁 범죄를 증언하기 위해 한국에 온 올레나 트레굽(40)은 지난 22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경향신문과 만나 이 같이 말했다. 그는 “한국 국민들에게 우크라이나는 굉장히 멀게 느껴지고 미디어에서 보이는 모습도 제한돼 있다”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고문과 집단학살에 대해 느끼는 공포를 알리기 위해 왔다”고 했다.

트레굽은 “한국은 6·25 전쟁 때 많은 국가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우리 상황을 잘 공감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불행히도 한국은 우크라이나가 기대했던 것만큼 우리 편에 서주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한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적극적으로 무기를 지원하지 않고 있고, 미국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맞추는 수준에서 소극적으로 대러시아 제재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정부가 전쟁 이전의 정상 상황으로 돌아가면 러시아가 이전처럼 경제적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러시아는 반드시 끔직한 범죄를 저지른 데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뉴욕타임스와 유엔에도 몸담았던 트레굽은 현재 우크라이나 안보 분야 부패방지에 힘쓰는 비정부기구 ‘NAKO’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동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시민사회의 영향력이 강하다. 국회 입법과 정부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한다. 최근 트레굽은 전직 우크라이나 교수, 관료, 정치인 등과 함께 우방국을 다니며 자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20일부터는 3박4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해 정치인, 외교관, 대학 교수 등을 두루 만났다. 그는 “지금 전쟁은 선과 악이 분명하게 나뉜다”며 “폭력을 휘두르는 큰 국가와 평화를 원하는 작은 국가 사이의 싸움”이라고 했다.

2차 세계대전 방불케 하는 우크라 상황

트레굽은 우크라이나 사정이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방불케 한다며 현지 상황을 묘사했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수학공부를 하다가 선생님이 “방공호”라 외치면 후다닥 몸을 숨기는 비정상적 일상이 지속되고 있다고 했다. 약국이나 슈퍼마켓 등 생활에 필수적인 시설도 공습 경보가 울리면 문을 닫는다. 특히 항공편이 막혀 우크라이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고 했다. 트레굽은 “가까운 유럽까지도 자동차로는 이틀 이상 걸리는데 누가 우크라이나에서 사업을 계속하려고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우크라이나가 최근 러시아로부터 탈환한 동북부 하르키우주의 도시 이지움 인근 숲에서는 집단 매장지가 발견됐다. 트레굽은 러시아군이 자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에 대해 “수도 키이우 외곽에서 수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기 전 고문당하는 것을 봤다”며 “새로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이 사건은 러시아의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집단 학살의 일부”라며 “러시아 군대 포로들에게 들은 결과 군대 상부에서 민간인을 죽이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고 했다.

트레굽은 러시아의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 공습에 대해서는 “러시아는 직접적으로 영향받을 유럽에 ‘핵 테러’를 하는 것”이라며 “전력선뿐 아니라 원자로를 냉각시키는 파이프도 공격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병원, 학교, 식품 저장소, 에너지 인프라 등을 공격해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올 겨울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나도록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엔에서 국제 법정 소집을 요구했다”며 “러시아의 전쟁 범죄 가해자들을 계속 지켜볼 것이다. 사법재판소에서 정의를 찾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전쟁 끝내기 위해 한국 정부 지원 절실”

러시아의 공습이 시작된 지난 3월 키이우를 떠난 트레굽은 이달 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살고 있다. 그의 자녀들은 다른 나라에 사는데, 이번 전쟁으로 많은 우크라이나인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이 되었다. 트레굽은 “그럼에도 우크라이나인들은 열심히 살고 있다”며 “사람들이 직장에 갈 수 있으면 최대한 가고 있고, 디지털 환경이 잘 구축돼 있어 해외에서 원격근무라도 한다”고 했다.

트레굽은 23일 한국을 떠나며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한국 정부의 무기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승리 여부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안전에도 영향 미칠 것”이라며 “한국이 우크라이나를 도우면 한국에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이다. 러시아의 파워를 과대평가하면 안된다”고 했다. 트레굽은 한국 국민들을 향해서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을 방관하지 말아달라”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여러분을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에 힘을 싣고자 하며, 평화를 실현하고자 한다. 한국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우크라이나는 도울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증언하고 정부와 민간단체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한국에 방문한 우크라이나인 올레나 트레굽. 본인 제공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증언하고 정부와 민간단체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한국에 방문한 우크라이나인 올레나 트레굽. 본인 제공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