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최 없는데 참사 징후까지 보였다면 정부가 더더욱 개입했어야”

2022.11.02 21:31 입력 2022.11.02 22:23 수정

세월호 유가족 박종대씨가 본 ‘이태원’

“주최 없는데 참사 징후까지 보였다면 정부가 더더욱 개입했어야”

위험성 알면서도 ‘무대책’
막상 터지니 “매뉴얼 없다”
세월호 참사 때와 똑같아

박종대씨(58·사진)는 매주 토요일 오후 9시부터 2시간 동안 세월호 참사 스터디를 한다. 지난달 29일에는 ‘줌’으로 모임을 진행했다. 스터디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심정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속보가 떴다. 그는 순간 ‘큰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태원에서는 156명이 사망하고 172명(2일 오후 6시 기준)이 다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박씨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화만 나고 짧은 말로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박씨는 세월호 참사 유족이면서 세월호 참사 연구자다. 2020년 7월 책 <4·16 세월호 사건 기록연구>를 냈다. 그의 집 책장에는 세월호 참사 관련 자료집 250여권이 꽂혀 있다. 책장을 지나면 고 박수현군의 방이 나온다. 안산 단원고 학생이던 박군은 2014년 4월16일 일어난 세월호 참사로 희생됐다. 그는 박군의 아버지다.

박씨는 “(이태원 참사) 유족분들이 모여 계시면 옆에서 마실 거라도 한잔 드리고 싶은 심정”이라며 “저도 세월호 참사 직후 배은심 여사(이한열 열사 어머니)를 뵙고 여러 조언을 받았는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박씨를 지난 1일 경기 안산시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박씨는 “미국, 일본, 프랑스 등에서 참사 피해를 겪은 유족들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선진국들도 참사 희생자와 유족을 대하는 태도가 똑같다는 사실을 공유했다”며 “한국에서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자고 다들 마음먹었는데 다시 이렇게 참사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는 ‘매뉴얼’ 전문가다. 세월호 참사 당시 해경의 미흡한 구조 활동을 밝혀내려 모든 해경 구조·대응 매뉴얼을 섭렵했다. 박씨는 “명확한 해경 지휘부의 책임소재를 가릴 만한 매뉴얼이 없을 뿐이지 구조작업 진행에 필요한 매뉴얼은 다 있었다”며 “이번 참사는 발생 전 여러 징후가 있었다.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가 막상 참사가 발생하니까 적용할 매뉴얼이 없었다면서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박씨는 이날 정부가 책임회피의 근거로 내세우는 ‘2021년 지역축제장 안전관리 매뉴얼’을 들고 왔다. 그는 참사의 징후가 있었다면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이태원이 경찰 출입금지 지역인 것도,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미치지 않는 장소도 아니지 않은가”라며 “정부나 용산구 논리대로 주최자가 없는 지역축제여서 안전공백이 있다면, 더더욱 국가가 나섰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재난안전법에도 국가는 국민 보호의 책무를 규정해 놨다”며 “경찰관 직무집행법에도 급박한 상황에선 국민 안전을 위해 경찰이 나서야 할 규정이 다 있다”고도 했다.

매뉴얼보다 ‘통치 철학’ 중요
법을 아는 윤 대통령·여당
법적 책임 부정 발언 문제

박씨는 매뉴얼이나 안전 관련 법령의 허점을 들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부를 비판했다. 정부는 ‘주최자 없는 축제’는 안전관리 책임이 지자체나 정부 어디에도 없다는 논리로 책임을 회피해왔다. 그는 “대통령실이 법과 매뉴얼을 핑계로 국가 책임이 아닌 것처럼 책임회피를 하고 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지금 정부에는 법을 잘 아는 분들이 모이지 않았냐. 법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매뉴얼보다 중요한 것은 통치자의 철학이라고 했다. 박씨는 “안전 문제가 예방이 되려면 결국에는 의사결정하고 집행하는 최고 통수권자와 고위 관료의 안전 철학이 제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최근 정부나 일부 지자체에서 안전 관련 예산을 줄이거나 ‘안전보다 경제’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이런 결정이 큰 화를 부르는 단초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애도가 먼저다’라는 식의 접근이나 희생자에게 참사의 책임을 돌리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그는 “애도는 애도대로, 진상규명은 진상규명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 분리할 필요가 없다”며 “참사 희생자 혹은 특정인에게 화살을 돌리려는 시도도 보이는데, 이는 세월호 참사 때와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지난 1일에는 경찰청 정보국이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후 시민사회 동향 등을 파악한 문건이 공개되기도 했다. 박씨는 “이미 재판에서도 확인됐지만 세월호 참사 때는 국군 기무사와 국정원이 동원돼 유족을 광범위하게 사찰했다”며 “참사 희생자를 죄인처럼 몰아가려는 시도가 또 일어날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박씨는 진행 중인 세월호 참사 해경 지휘부의 항소심 재판도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해경 지휘부 재판을 보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식의 논리를 접하게 된다”며 “이태원 참사 당일 112상황실 신고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지휘부가 일선에 책임을 미루는 ‘꼬리자르기’를 할까봐 우려가 됐다”고 말했다.

박씨와 인터뷰하던 때 전후로 정부와 지자체 책임자들의 갑작스러운 사과가 이어졌다. 윤희근 경찰청장을 비롯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오세훈 서울시장 등이 연이어 공식 사과했다.

박씨는 “정부 책임의 윤곽이 드러나자 떠밀려 사과한 것일 뿐”이라며 “매뉴얼 탓이 아니라 책임을 규명하는 구체적인 절차가 필요하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이런 참사는 또 일어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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