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력의 양극화와 자발적 낙오자

2012.08.02 20:59 입력 2012.08.03 01:56 수정
정희진 | 여성학 강사

‘애국’과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마음이 조마조마해 한국이나 북한 선수들의 경기를 못 보겠다. 박태환 선수를 생각하면 감동의 물결 정도가 아니라 감동의 몸살을 앓을 지경이다. 사소한 일에도 일희일비하는 내게 그는 현실의 영웅이라기보다 외계에서 다른 삶을 살아내는 사람 같다.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존경과 경탄은 당연하지만 ‘안쓰러운’ 마음 역시 감출 수 없다.

판정 번복 사태 때 매스컴은 그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고 했지만, 그 상황이 천국(기쁨?)과 지옥(절망?)일 것 같지 않다. 감각의 제국은 살아 있음이고 그 반대는 세포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 감각의 마비가 아닐까. 이른바 ‘멘붕’ 말이다.

[정희진의 낯선사이]정신력의 양극화와 자발적 낙오자

엘리트 스포츠의 결정판, 올림픽은 국가주의를 생산했지만 요즘엔 이와 더불어 신자유주의 시대 개인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정신력, 체력, 기술, 지적 능력 등 인간이라는 종(種)이 어디까지 위대해질 수 있는가를 증명하고 미디어는 이를 보통사람들에게 ‘가르친다’.

1989년 사회주의권의 변화 이후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막을 열었을 때 ‘20 대 80론’이 화두였다. 피라미드 모형도 바람직한 사회 구성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무너지고 인류는 부자 20%와 가난한 사람 80%로 양극화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부디 그렇게만이라도, 하는 심정이다. 현재 양극화는 0.1 대 99.9의 양상이다. 20 대 80의 사회에서는 ‘20’이 가시화되고 투쟁도 변화의 가능성도 있지만, 0.1%의 인구는 공간적으로 아예 분리되고 그들의 삶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다.

문제는 양극화가 동산과 부동산을 위주로 한 빈부격차만이 아니라 실력, 건강, 매력, 의지, 외모 등 개인을 평가하는 자원의 모든 면에서 등장했다는 점이다. 올림픽에 사연 없는 선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노력(努力)은 노력(勞力)에 가깝다. 자기 훈육, 정신력, 특히 통제력과 집중력은 나 같은 사람에겐 신의 경지처럼 보인다. 신세대 선수들은 ‘헝그리 정신’ 대신 즐기며 한다지만 그러한 관점의 변화조차 자기 노력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여유, 정신력의 힘이다.

한편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일본에서는 ‘자발적 루저’, 공부와 취업 모두를 거부하는 니트(NEET)족, 노동과 놀이는 물론 연애에 이르기까지 힘 드는 일은 일절 하지 않으면서 최소한만 움직이며 살아간다는 ‘탈력(힘을 뺌, 脫力)’ 집단이 등장해 일본 사회를 긴장시키고 있다. 니트족만 85만명이라는데, 이들이 집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 수치를 믿는 사람은 없다. 최소한 10배 이상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도 드러나지 않을 뿐 상당히 존재한다고 본다(일본도 오랜 잠수기를 거쳐 논의가 시작됐다). 예를 들어 평화주의나 종교적 신념의 ‘양심적 병역 거부’와 달리, 지금은 ‘순수 기피’가 늘고 있다. 어차피 취직이 안될 텐데 군대 다녀와서 뭐하냐는 것이다. 1970~80년대 한국 사회에서 병역은 남성 시민권 등록의 필수 코스였지만 지금 이들은 국민 되기에 관심이 없다. 투자한 희생이나 의무만큼 국민이 된다고 해도 얻는 이익이 없음을 간파한 것이다.

야마다 마사히로가 말한 ‘희망 격차사회’와 이로 인한 정신력의 양극화. 올림픽 선수들처럼 영광의 가능성이 있기에 혹은 지원하되 억압하지 않는 좋은 부모를 만나서 혹은 노력과 성과가 일치하지 않는 체제 모순을 깨닫지 못해, 열심히 사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인생 목표인, 숨만 쉬는 집단이 있다.

이 시대는 승부의 이분법 사회가 아니다. ‘경쟁사회 내부의 승자와 패자’와 ‘경쟁사회의 트랙 밖에서 적극적으로 낙오를 선택한 사람’이 대립(?)하고 있다.

‘자발적 낙오자’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자기 선택이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으며 열등감도 없다. ‘무식’이나 ‘가난’을 창피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쉽게 부자가 된 이들을 제외하곤,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하류지향>의 저자 우치다 다쓰루는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고, 비판한다. 사회가 ‘자발적 루저’들을 먹여살려야 하므로 공동체에 부담이 된다며 이들을 ‘기생충’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당연한 반응이지만, 이들을 경쟁사회의 도피자로만 인식하고 계도해야 한다는 사고는 안이하다. 이들의 존재는 시스템의 부작용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의 문제이다. 절망적이게도 중간지대는 몰락했다. 사회가 그 공간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우울증은 전 지구적 ‘바이러스’다. 증상도 원인도 다양해서 일반화할 순 없지만, 사회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경쟁의 갈등을 자기 탓으로만 여기는 ‘착한’ 사람들의 병이 아닐까.

정신력의 양극화, 양끝에 있는 이들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열심’은 곧 행복이며 바람직한 삶일까. 힘을 빼고 편히 살겠다, 경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낙오자의 변명에 불과한가. 미래는 자발적 낙오에 대한 재해석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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