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과 그 타자들

2013.09.17 18:50 입력 2013.09.17 20:36 수정
정희진 | 여성학 강사

만일 종북을 ‘종북’으로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이 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이는 전적으로 국가정보원과 언론의 노고가 아닐 수 없다.

지하철에서 두 청년의 대화가 들린다. “야, 우리 둘이 은행을 털려고 작정했어. 그렇게 마음만 먹어도 죄냐?”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마라. 은행 터는 거랑 내란이랑 같냐?”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서 ‘내란음모 사태’로 뉴스가 바뀌었다. ‘종북세력 존재론’이 난무했으므로 놀랄 일은 아니다. 여론은 정치권과 국정원 모두 개혁하라는 양비론이 대세다.

[정희진의 낯선사이]국정원과 그 타자들

유사 이래 국정원이 지금처럼 유능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통일전선 전술로 치자면, 차르와도 연대하라던 레닌도 칭찬할 만하다. 물론 현재 정황은 그들의 능력에 기인했다기보다는 상대방들이 -실책도 아니고- 워낙 무능, 황당한 까닭에 상황이 저절로 전개된 측면이 크다.

지금 국정원(one)은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세 정치 집단(the others)과 자유자재로 연대를 구사하고 있다. 국정원까지 네 진영 모두 주연이다. 떡고물은커녕 국정원 주최의 ‘잔치’ 근처에도 못 간 집단은, 어떤 말을 해도 욕먹는 야당뿐이다.

첫 번째 파트너는 말할 것도 없이 새누리당을 필두로 우리 사회의 반북 정서로 먹고사는 집단이다. ‘내란’ ‘혁명 조직’ ‘국가안보’라면 만사형통이니 일도 아니다. 사회 정서에 안보라는 당위까지 겹쳤으니, 이보다 편한 “음지의 업무”가 어디 있으랴.

두 번째 상대는 진보 진영이다. “통합진보당이 워낙 이상하니까 국정원이 대신 그들을 정신 차리게 했으면…”이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들은 국정원보다 ‘종북’의 말로에 더 관심 있는 듯 보인다. 물론 이들은 평소 원칙대로 국정원의 권력 남용과 정권 안보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 경우 양비론은 “국정원은 원래 그런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결국은 ‘종북’ 세력만 비난하는 모양새가 된다.

양비론의 실제 효과는 매카시즘 방관이다. ‘종북교(?)의 황당무계한 종교 활동’의 폐해와 별개로 국정원은, 일부 진보 진영과 ‘종북’ 세력의 오랜 반목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마지막 파트너는 공안 정국의 피해자, 통합진보당이다(통합? 기존 정당과 마찬가지로 당명 자체가 패권적이다). 종교집단은 탄압을 받으면 순교자가 된다. 개혁(改革)은 글자 그대로 피부를 벗겨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인데, ‘전통의 강호’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있으니 내부는 공고해지고 개혁은 저절로 양해된다.

이렇게 ‘레드’와 레드 헌트 집단은 비대칭적인 짝을 이루고 있다. 정치권에 패자는 없다. 민주주의만 후퇴했을 뿐이다.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타자를 만들어내는 방식과 결과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북한. 세계 최빈국, 남한 경제의 33~40분의 1, 세습, 올브라이트 미국 전 국무장관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구걸과 협박을 일삼는 ‘불량국가’, 수용소 이미지, 뼈만 앙상한 어린이들의 사진, 지도자 부부의 건장한 얼굴까지 거슬린다.

성숙한 시민은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이런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에게 전달되는 북한의 모습이 객관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효과다. ‘세계로 웅비하려는 대한민국’에 같은 민족인 북한은 부담스럽다 못해 창피한 존재다. 북한은 남한 사람이면 누구든 언제나 써먹을 수 있는 만만한 혐오 카드, 치사한 핑계거리다.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해주는 대상이 항상 그리고 영원히 대기한다는 사실은 두려운 일이다. 백인 노동자의 각성과 해방이 불가능한 이유는 흑인의 존재 때문이다. 흑인이 백인을 구성할 때, 백인은 절대로 인간이 되지 못한다.

자기 비리를 덮기 위해 ‘종교집단’을 내란 모의로 잡아넣는 국정원의 행위는 공권력 남동(濫動)이다. 굳이, 내란 세력을 지목하라면 어렵지 않다. 말 그대로 “정부(국민)에 반대하여 일정한 규모와 조직을 갖추고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4대강을 ‘녹차 라떼’로 만들고 쌍용차, 용산 사태 등에서 인명을 살상한 이들이 누구인가. 눈앞에서 일어난 국토 훼손과 살인에 증거가 필요한가?

‘종북’과 국정원의 불법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양비론은 올바르지 않다. 국가가 할 일은 범법행위에 국한되어야 한다. 그조차 늘 조작 논란과 물증 없는 언론 플레이로 끝나지만. 국정원의 목적이 처벌이라기보다 ‘진보=북한’이라는 이미지 공습과 자기들 ‘밥그릇’ 때문임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북한이나 ‘종북’이 없다면 국정원은 직원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한다.

사회는 ‘종북세력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영원한 조직은 없다. 문제가 있으면 산으로 들어가 도를 닦든, 더욱 단결하여 더욱 고립되든, 억울함을 규명하여 국민을 설득하든, 스스로 변태(變態)될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말대로 “남은 일은 저절로 일어난다, 일어날 일이라면”.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