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시대 2 : 기러기 가족

2015.02.01 20:46 입력 2015.02.01 20:52 수정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화제의 인물은 단연 이건희 삼성 회장이었다. 그해부터 본격적인 공개 행보를 시작한 이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임직원을 불러들여 최대 규모의 해외 현장 회의를 개최하면서, “초일류 기업 실현”을 위해 경영 혁신과 명품 전략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임직원 대상으로 행해진 그의 강연은 이후에 특집 프로그램으로 공중파를 타면서 여론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의 경영 전략을 담은 어록 역시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중 가장 널리 회자된 것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년이 지난 후에야 국정 운영의 최우선 과제로 ‘세계화’를 내놓으며 ‘개혁의 아이콘’ 자리를 두고 이 회장과 경쟁을 벌여야만 했다.

[별별시선]명품시대 2 : 기러기 가족

흥미로운 점은 21세기 초반부터 “세계화”를 통해 “마누라와 자식”까지 바꾸려는 움직임이 중산층 상층부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계 일류”를 향한 욕망이 시간차를 두고 수십만명의 사원을 거느린 대기업에서 4인 구성의 중산층 가족으로 전이된 결과였을까? 아무튼 안정적인 직장인이라는 명함, 30·40평형대 아파트 거주, 중형 이상의 승용차 보유를 통해 ‘코리안 스탠더드’의 인증 마크를 획득한 이들이 자녀의 조기 유학을 통해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타이틀에 도전을 시도했다.

사실 90년대 초반의 조기 유학 열풍을 상기해 보면, 이는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양자 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90년대 초반의 열풍이 상류층의 자본 소득과 사업 소득을 동력원으로 삼았고 ‘도피성 유학’이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반면, 21세기의 새바람은 상위 10% 내에 자리한 근로소득 가구가 주도했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조기 유학 모델의 확산은 ‘기러기 가족’이라는 변종 가족의 출현을 가져왔다. 어린 자녀는 뒷바라지해 줄 엄마와 함께 유학길에 나서고 아빠는 고국에 남아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며 다달이 생활비와 학비를 보내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등장했던 것이다. 상류층 일부는 자녀의 미국 국적 취득을 위해 ‘원정 출산’이라는 전략을 실행에 옮기고, 중산층 상당수는 아파트 근처 학원가를 떠돌며 사교육에 몰두하던 시점, 그 시점에 기러기 가족은 중산층 내부의 치열한 경쟁을 우회하는 ‘세계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중산층 일부의 소득 증가도 큰 몫을 했다. 이 시기는 자산 소득을 추구하는 ‘일상의 금융화’가 부동산과 주식 시장의 폭등세를 틈타 확산된 시기이면서, 동시에 근로소득 상위 10%의 임금이 전체 임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증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1980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1995년에는 23.9%까지 내려갔던 그 비중은 IMF 외환위기 이후 급상승해 2005년에는 35%대에 육박했다. 이런 경제적 여건은 그들이 소비자로서 경쟁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교육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었다.

적어도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전까지 기러기 가족은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기러기 가족의 부모가 속한 세대가 ‘도시화’의 흐름을 완성하며 ‘중산층’에 진입한 세대였으니,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그들 중 일부가 대학 진학률 80%대의 시대를 맞이하여 자녀 교육의 명품화를 통해 ‘세계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중산층 이후의 가족 구성을 실험하는 것도 그럴듯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심화되는 양극화”와 “무너지는 중산층”이라는 수사가 보편화된 시점에 돌이켜보면, 기러기 가족은 고도성장기에 가능했던 계층 분화와 상승의 드라마가 새천년에도 종영을 거부한 채 억지로 만들어낸 마지막 스핀오프처럼 보인다. 지반이 흔들리고 있는 시점에 공통의 안전지대를 확보하기보다는 발 딛고 있는 곳으로부터 가족 단위로 먼저 탈출하고자 하는 몸부림, 아마도 그 성공 여부와는 무관하게 ‘기러기 가족’은 한국 중산층의 가족주의가 가닿을 수 있는 재생산 전략의 한계 지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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