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여성 상위시대’

2017.10.15 21:26 입력 2017.10.15 21:29 수정

[NGO 발언대]말로만 ‘여성 상위시대’

“키 160㎝ 이상, 몸무게 50㎏ 이하, 안경착용 불가.”

1994년 잘나가던 기업 70곳이 직원을 채용하면서 학생을 추천해 달라고 보낸 모집공고 내용이다. 물론 대상은 여학생이었다. 모집공고에서 제시한 신체기준은 업무 수행상의 필요성이나 정당성이 전혀 없는 신체적 조건을 이유로 한 용모차별과 성차별이 결합된 복합 차별로서, 헌법의 평등권과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고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한 사례로 사회적 문제가 됐다.

그때로부터 23년이 지난 2017년, 한국 사회는 얼마나 변했을까? 언제부턴가 ‘여성 상위시대’라는 말까지 떠돌고 있는데 정말 그럴까?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예시하는 사건이 얼마 전 있었다. 한국가스안전공사의 성차별 사건.

한국가스안전공사는 합격권에 들었던 여성 7명의 점수를 조작하여 고의로 탈락시켰다. 이유는 사장이 “여자는 출산과 육아휴직으로 업무연속성이 단절되니 탈락시켜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공성, 공정성, 투명성이 생명인 공기업이 ‘여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자료까지 조작하는 불법행위를 한 이 사건은 2017년 대한민국의 참담한 성평등 수준을 가늠할 바로미터다.

지난달 한국의 성평등 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보고서가 발표됐다. 한국여성민우회가 2017년 오늘을 살고 있는 1257명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 발간한 ‘2017 성차별보고서’. 여성들은 가정, 학교, 일터, 미디어, 공동체 등과 같은 제도적 장소에서부터 익명의 생활공간인 대중교통, 거리, 시장 등 삶이 이루어지는 모든 공간에서 성별 고정관념과 성역할 고착화의 피해를 전방위적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중 93%는 2017년 한국은 여전히 성차별적인 사회라고 진단한다. 여성들은 그동안 변하지 않은 것은 ‘사회’이고 변한 것은 ‘여성 자신’이라고 말했다.

사법·행정고시 여성합격률 40%, 외무고시 70% 안팎으로 상승.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진행자는 이 지표를 근거로 성차별이 줄고 있다고 진단했다. 많은 경우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 지위 향상의 증거로 각종 임용시험의 여성합격률이 제시된다. 성적순 시험의 합격률은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성적이 우수하다는 사실을 말할 뿐 여성지위 향상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차별이 덜한, 덜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공적 영역으로 여성들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성차별 현실을, 악착같이 우수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여성현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할 뿐이다.

한국가스안전공사 성차별 사건으로 공적 영역조차도 여성들에게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제 여성들은 더 이상 기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다. 한 정치인은 이 사건을 ‘사장 개인의 편견 문제’로 진단했다. 개인 문제로 치환되는 순간 변화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이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해석 능력과 해결 의지가 변하지 않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성평등 대한민국, 성평등 추진체계 실현’은 출범 160여일이 지난 지금까지 안갯속이다. 더 이상 여성들의 삶을, 목소리를 무시하지 말라. 이제 변화한 여성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다. 문재인 정부는 현실을 직시하고 하루속히 성평등 추진체계를 꾸려 힘 있게 가동해야 한다. 그것이 성평등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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