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에게 두 개의 다른 ‘봄’

하노이 회담(2019·2·27~28) 굴욕으로 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미국을 향한 분노와 불신은 예상보다 훨씬 깊은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노동당 전원회의(7기 5차) 보고를 무려 나흘씩이나(12·28~31) 할 이유가 없었다. 신년사마저 생략하고 전원회의 발언문 공개 형식을 통해 현 정세를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마치 언제라도 상을 엎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세상읽기]김정은에게 두 개의 다른 ‘봄’

김 위원장은 하노이 회담 결렬 후 개최된 7기 4차 전원회의(2019·4·11) 이후 8개월여 기간을 ‘혹독하고 위험천만한 격난’으로 간주했다. 김정은에게 이 기간은 분명 자득의 시간이었으며,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지점을 끝까지 찾아보려는 간절한 모색의 시간이었다. 자력갱생과 미국과의 불화를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했다는 공개적 다짐의 배경에는 더는 수모를 당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깔려있었다. 정세가 좋아지기를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정면돌파전이 시대적 과제임을 투쟁적으로 강조했다. 새로운 전략무기체계를 확보했음도 시사했다. 이는 더 나아갈 수 없는 데서 한 발자국 더 내디딘, 말하자면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인 셈이다.

벼랑 끝에서 고민한 흔적도 엿보였다. ‘크리스마스 선물’ 보내기를 유보한 것이 그 예다. 그럼에도 북한은 미국이 적대정책을 고수하는 한 비핵화는 없을 것이며,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이 철회되고 평화체제가 구축될 때까지는 전략무기 개발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북한 특유의 조건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는 미국이 가시적 조치도 취하지 않고 대북 무시를 견지한다면 선물은 언제라도 공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비핵화를 두고 트럼프와 김정은이 맞붙어 협상할 시간은 많지 않다. 시간은 쥐고 있는 협상카드의 속성을 변화시킬 것이며 그 시간은 한반도 정세와 북·미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다. 공(攻)과 수(守)의 시간은 서로의 급소를 향해 치닫고 있다. 승부의 관건은 시간이 누구에게 유리한가이다.

사실 미국은 어떤 공이 와도 칠 수 있는 타자이다. 그러나 이란과 사실상 전쟁에 돌입한 상황에서 자칫 북한의 술책에 말려들 경우 자신의 재선에 악재가 될 수 있음을 트럼프가 모를 리 없다. 트럼프는 가능한 한 11월 대선까지는 북한의 행동에 ‘화염과 분노’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북핵 문제를 최대한 로키(low-key)로 이끌려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이 부각될 것이다. 게다가 여러 차례 미뤄졌던 시진핑의 방한과 방일이 상반기에 이뤄진다고 볼 때 김정은이 굳이 이 시기에 동북아 정세를 초긴장으로 몰아갈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 합리적이다.

다급한 쪽은 김정은이다. 북한 매체는 연일 자력갱생을 강조하면서 주민들의 기대감을 낮추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지만 1년 사이 트럼프를 세 번이나 만나고서도 북·미관계가 파국을 맞을 경우 궁핍한 주민들의 실망감이 김정은에게는 고스란히 정치적 부담거리다. 오죽했으면 새해 벽두부터 나라의 형편이 눈에 띄게 좋아지지 못하고 있음을 자인하고 절약정신을 체질화하자고 수 차 강조해야 했을까. 발언문을 읽으면서 마치 망인의 피부를 눌러도 되돌아오지 않을 때 느끼는 막막함 같은 기분이 들었다. 꺾어지는 해이자 집권 9년차에 접어든 1984년생 김정은에게도 봄은 오겠지만 그 봄은 우리가 생각하는 봄이 아닐 수도 있다. 봄(春)이 봄(bomb)으로 이어지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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