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역설’

2020.08.27 03:00 입력 2020.08.27 03:03 수정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8일 한 중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함수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수학 교사의 말에 주저없이 ‘부동산 문제의 미래를 알고 싶다’고 했다. 집값, 전셋값 고민에 골몰해 있음을 부지불식간 드러낸 것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하는 순간부터 일관되게 사회적 약자 보호와 양극화 문제 해결을 강조해왔다. 그는 취임사에서 “무엇보다 먼저 일자리를 챙기겠다”고 밝혔다. 첫 시정연설에서는 국민들의 고달픈 하루하루에 대한 정치의 책임을 직시하고 맞서겠다고 했다. 그의 진정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박영환 논설위원

박영환 논설위원

문제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다. 2017년 2분기 3.8%였던 실업률은 2020년 2분기에 4.4%로 올라갔다. 최상위 20%의 소득을 최하위 20% 소득으로 나눈 소득 5분위 배율도 2017년 1분기 5.35에서 올해 1분기 5.41로 악화됐다. 일자리 늘리기에 집중했는데 실업률은 올랐고, 양극화를 걱정했는데 소득분배 균형은 더 무너졌다. 코로나19 등 여건 탓도 있고, 통계 논란도 있지만 악화 추세는 분명하다. 부동산 정책의 성적은 처참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따르면 현 정부 들어 서울 지역 아파트값은 53% 급등했다. 서울의 소득 하위 20% 가구는 18.4년간 먹지도 입지도 않고 모든 소득을 모아야 하위 20%의 저가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이찬진 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은 “정부의 초기 모토였던 소득주도성장이 부동산 불로소득주도성장이라는 비아냥으로 돌아왔다”고 평가했다.

노무현 정부가 데자뷔처럼 떠오른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회고록에서 노 전 대통령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늘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에 대해 배려했으며 정책 수립에 있어서도 서민대중 위주의 정책을 주문했다. 그러나 재임 중 실제 혜택을 본 계층은 역설적으로 부유층이었으며 서민대중의 삶은 더 어려워지고 빈부격차는 확대됐다. 그는 배를 서쪽으로 저어갔는데 실제 배는 동쪽으로 가버린 것이다. ‘노무현의 역설’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는 집값 폭등과 양극화를 역설의 원인으로 꼽았다.

문 대통령은 2017년 노 전 대통령 추도식에서 “이상은 높았고, 힘은 부족했다”고 참여정부의 좌절을 진단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안보도, 경제도, 국정 전반에서 훨씬 유능함을 보여주자”고 말했다. 하지만 집권 3년3개월이 지난 지금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국정 분야를 찾기가 어렵다. 부동산 문제만이 아니다. 북핵 문제 해결의 토대 마련, 분열과 갈등의 정치 종결, 계층과 세대 간 갈등 해소 등 원대했던 포부에 비하면 집권 4년차에 마주하는 현실은 초라하다. ‘문재인의 역설’이란 평가도 나올 판이다.

지금이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바로잡는다면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우선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경제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인적 쇄신은 반전의 모멘텀이 될 수 있다. ‘마음의 빚’에 연연하지 말고 성과주의 인사 원칙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또 문재인표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 집권 초기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금융 규제와 보유세 강화 등을 전격 시행했다면 부동산 정책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등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의 국회 비준도 서둘러야 한다. 선의(善意)만으론 시민의 삶을 개선할 수 없다. 일상을 바꿀 제도를 정착시키는 게 중요하다.

‘소통정부’가 돼야 한다. 사회가 갈라지는 현안은 넘쳐나는데 “때로는 광화문 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다”던 대통령은 보이질 않는다. 참모들의 병풍을 걷어내고 전문가, 언론, 이해 당사자들과 직접 소통하고 현장의 쓴소리를 들어야 한다. 취임 초 구상들을 되돌아보고 실천 가능한 공약들은 하나씩 실행에 옮겨야 한다. 야당과의 대화 정례화, 지지 여부와 상관없는 유능한 인재 등용 등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가능하다.

슬라보이 지제크의 말처럼 역사는 행동이 의도와 다른 결과를 이끌어내는 변증법적 반전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이미 ‘노무현의 역설’이 가져온 역사적 반전을 목격했다. 민주주의와 인권과 복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나라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은 참여정부 5년 만에 절망으로 바뀌었고, 그 절망은 보수 기득권 세력 재집권의 동력이 됐다.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킨 촛불시민들도 하나둘 기대와 현실의 격차를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집권 초 80%였던 지지율은 절반으로 추락했다. 기대의 시간이 지나가면 평가의 순간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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