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좋은 동네에 필요한 것

2020.10.31 03:00 입력 2020.10.31 03:01 수정

조경을 잘 갖춘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삶의 질이 조금 올라갔다. 돌봄노동이 버거워 지친 밤에는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기도 하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산책도 즐기게 되었다. 풀과 나무가 많아지니 더 많이 행복해졌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가 제일 좋아하던 라탄의자가 아파트 공원에서 사라졌다. 의자에서 노닥거리는 일도 큰 즐거움이었는데 한순간에 공터가 되어버려 못내 아쉬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출근했다 돌아와 아이를 챙기고 밀린 집안일을 하는 그 정신없는 시간에는 의자가 거기에 있단다. 거짓말처럼 의자가 돌아오는 시간의 나는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짬이 없고 밤이 되어 산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 더 이상 그곳에 의자가 없다. 이뿐만 아니라 화단이 길게 이어져 있어 내가 제일 좋아하던 출입구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굳이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자면 다닐 수는 있지만 왠지 예전만큼 그 산책길을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처음 입주했을 때 느꼈던 행복감이 이래저래 조금 줄어들었다.

그간 수많은 민원이 있었나보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고, 그 넉넉하고 예쁜 의자 주변으로 담배꽁초가 수없이 쌓였다. 사방으로 출입구가 나 있어 시원시원한 설계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입주민들은 돈을 마련해 담장을 설치하자고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파트가 공원화되어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다.

누군가는 집에 들어가다 반려견의 배설물을 밟았고, 누군가는 유아놀이터의 벤치 위에서 단체로 롱보드 연습을 하는 사람들을 목격했고, 믿기지 않지만 노상방뇨하는 사람들과의 실랑이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결국 견디다 못한 사람들의 의견으로 공용의자가 사라지고 출입구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외부인을 확실하게 막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지 이 또한 명확하지 않다. 사실 소방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린 사람도, 회사에서 처리해야 할 대형폐기물을 아파트에 그냥 내다버렸던 사람도 알고 보니 모두 입주민들이었다. 그러니 정말 문제의 핵심이 외부인인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몇몇의 이기적인 행동들 때문에 우리 동네는 어쩌면 잘 꾸며진 공원 하나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도시 속 작은 공원은 환경생태적 이점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작게나마 자연을 만나며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도 찾을 수 있고 커피숍과는 달리 돈이 들지 않는 만남의 장소로 쓸 수도 있다. 사교의 장이 많아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접점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고 그러니 공원을 중심으로 동네 사람들끼리 네트워크도 만들어질 수 있다.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은 외부인들을 통해 동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으며 직접 기르진 못하더라도 내 집 앞을 꾸준히 산책하는 강아지들을 보며 마음의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그 따뜻한 골목길 역할을 어쩌면 열린 아파트의 조경이 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차피 만들어진 이 공간을 어떻게 하면 남들은 못 쓰게 할까보다 어떻게 모두가 책임 있게 쓸 수 있을까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유현준 건축가는 공원이 많아야 살기 좋은 도시라고 했다. 내 집만이 아니라 우리 동네가 계속 살기 좋은 동네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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