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와 당파성, 그리고 관계론

얼마 전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한 ‘같이 잇는 가치’ 행사의 오픈 포럼에 다녀왔다. 이 행사는 장애와 비장애의 공존을 위한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표방했고, 포럼의 주요 문제의식은 장애인뿐 아니라 장애인과 관계 맺는 우리 모두가 당사자임을 인식하자는 것이었다. 국어사전에 당사자는 “어떤 일이나 사건에 직접 관계가 있거나 관계한 사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영어에서 당사자를 뜻하는 단어는 ‘party’이며, 흔히 ‘parties concerned’나 ‘parties involved’와 같이 표현된다. 즉 우리가 장애를 생물학적 손상으로 환원하지 않고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이해한다면, 장애 당사자란 장애라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는’ 이들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당사자라는 것은 장애는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연루되어 있는’ 사회적 문제라는 의미가 된다.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나는 본질론이 아닌 관계론에 입각한 이런 이해와 입장에 적극 동의한다. ‘손상은 손상일 뿐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손상은 장애가 된다’는 장애학의 기본 관점 또한 관계론을 그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포럼에서는 오히려 ‘우리 모두가 당사자다’라는 명제가 지닐 수 있는 모종의 위험성 또한 충분히 인식해야 함을 얘기했다. 하나의 명제가 지닌 진리값 내지 효과성은 해당 명제 자체에 내재하지 않으며, 그 명제가 어떤 맥락과 관계 속에서 누구를 통해 제시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명제에 대해서도 본질론이 아닌 관계론적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모두의 목숨은 소중하다’(All Lives Matter)란 명제는 사실 그 자체로는 충분히 지지할 만한 것일 수 있다. 강자도 약자도, 동물도 식물도 모든 생명은 소중하므로. 이 명제는 어떤 약자나 소수자의 생명이 비하되고 짓밟히는 현실에 맞선 구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목소리에 맞서는 맥락에서 출현했을 때 끔찍한 폭력이 되고 만다.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 아니다’라는 명제 역시 인간이 곧 남성으로 상정돼 왔던 역사적 현실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생태주의적 세계를 지향하는 급진적 선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올해 초 숙명여대 사태에서 드러났듯 그 명제가 특정한 맥락에서 터프(TERF·트랜스 배제적 래디컬 페미니스트)에 의해 전유될 때, 또 다른 소수자를 배제하는 편협하고도 이기주의적인 폭력의 언어가 된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당사자다’라는 명제도 정치적 진정성을 가지려면 일정한 조건이나 단서가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다름 아닌 당파성(partisanship)이라 생각한다. 당사자와 더불어 당파를 뜻하는 ‘party’라는 단어가 이미 당파성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때의 당파성 또한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게 아니라 관계론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억압받는 이들과 사회운동이 추구하는 당파성의 기본 윤리가 피억압자의 편에 서는 것이라 했을 때, 억압자와 피억압자, 다수자와 소수자의 위치성 역시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히 요청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환원주의적·본질주의적 진영론을 넘어선 관계론에 입각한 당파성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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