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오는가

2021.05.03 03:00 입력 2021.05.03 03:05 수정

환경을 경제로부터 분리하는 환경외부화의 효과를 설명할 때 흔히 쓰는 ‘개수대의 비유’란 것이 있다. 수도꼭지를 틀면 개수대로 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와서 배수구로 흘러나간다. 그 물이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개수대 안에만 물이 잘 나오고 잘 빠져나가면 세상은 문제없이 돌아간다. 개수대는 시장이면서 사회다. 시장과 사회의 외부에 마치 필요하면 언제든 공급되는 자원의 저장고가 있고, 쓰고 나서 한도 없이 버릴 수 있는 거대한 폐기물 처리장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 기후위기는 그런 삶의 결과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개수대와 수세식 변기가 있는 곳이 문명과 발전의 장소다. 어디선가 물이 흘러와서 눈 깜짝할 사이에 깨끗하게 치워주는 곳. ‘이곳’의 물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여기서 버린 물이 흘러가 닿는 ‘그곳’은 어디일까? ‘이곳’은 북반구고 ‘그곳’은 남반구다. ‘이곳’은 도시고 ‘그곳’은 시골이다. 개수대는 아파트고, 대형마트고, 주유소다. 어디선가 들어와서 쓰레기가 되어 어디론가 나간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물은, 석유는, 그 많은 쓰레기는? 그동안 기업들은 자원의 생산과 처리에 드는 비용을 거의 공짜로 외부화해왔다. ‘인간 자원’인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노동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온 노동자를 자본은 맘껏 쓰고 버린다. 노동시장 외부에서 그들의 삶이 어떻게 재생산될 수 있는지는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인적 자원’을 육성하는 학교는 어떤가. 아침마다 콸콸 쏟아져 들어오는 어린이들은 지쳐서 학교를 빠져나갔다가 어디선가 재생되어 말간 얼굴로 나타난다. 덕분에 교육은 돌봄을 돌보지 않아도 되었다. 인간뿐인가. 살아 있던 동물들은 도축장으로 식당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먹기만 했을 뿐, 우리는 그들이 어디서 어떤 삶을 살고 있고 어떻게 죽는지 돌보지 않았다. 마치 ‘돌봄’이 신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재생산의 책임과 비용을 전부 외부로 전가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자본주의의 외부가 아니었다.

이런 개수대의 인식구조는 그것을 비판해왔던 환경주의 담론에서도 나타나기도 한다. 기후위기의 세계를 탄소가 가득 찬 공간으로 환원하고 정치적 의제를 과학적 의제로 전환하는 경향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런 관점은 현실의 지배관계와 생산관계를 외부로 소거시키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마치 정치적 무중력 상태의 공간처럼 바라보게 한다. 배출되는 탄소량만큼 그것을 상쇄할 기술적 수단을 통해 전체량을 ‘제로(0)’로 만든다는 ‘탄소중립’의 개념에도 그런 위험성이 노정되어 있다. 이 상쇄의 셈법이 시장경제라는 개수대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말이다.

탄소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지속가능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5년간 증가한 탄소배출량의 절반을 상위 10%의 부유층 오염 엘리트가 내뿜었다. 이들이 내뿜은 탄소는 누가 흡수하고 있는가? 자연과 동물,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삶터가 다시 배출된 탄소를 흡수하는 ‘상쇄원’이 된다. 기업들은 돈으로 탄소배출권을 사고판다. ‘탄소를 배출했으면 그만큼 나무를 심어야 한다’가 아니라 ‘탄소를 배출하려면 나무를 심으면 된다’가 상쇄의 원리가 되어버렸다. 탄소상쇄의 기술적 방법들은 수도를 잠그기보다는 배수구를 넓히는 쪽으로 점점 발전하고 있다. 관계성에 대한 사유와 돌봄의 철학이 누락된 기술방법론적인 해결 대안은 도처에서 출현한다.

얼마 전에 어떤 에너지 전문가가 음식폐기물을 푸드뱅크와 연동하여 재활용하자는 정책 제안을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먹고 남은 음식쓰레기와 별도로 생산이나 유통과정에서 폐기되는 식품을 가축의 사료나 빈자의 식품으로 재활용하는 대안은 일견 효율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정의롭지 못하다. 탄소배출권처럼 기업에 면죄부를 주고 가난한 이들을 처리장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서구 국가들이 원조라는 이름으로 제3세계 민중의 삶터를 자국의 잉여생산물과 쓰레기 처리장으로 삼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해자를 구원자로 둔갑시키는 ESG나 RE100 같은 정책을 지금 환경운동이 자본과 함께 주창하며 조력자가 되고 있다. 성찰을 촉구한다. 그동안 전기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쓰레기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왔다. ‘그곳’에서 채굴되어 ‘이곳’에서 사용되고 다시 ‘그곳’으로 폐기되는 불평등한 경로를 신·재생에너지는 다르게 만들어낼 수 있는가? 정의로운 전환은 이 경로를 바꾸는 것이다. 탄소감축이 새로운 불평등이 되지 않으려면 이 물음부터 물어야 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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